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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광주 민주화운동

1980년대 한국 변혁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출발점

1980년

5·18 광주 민주화운동 대표 이미지

1980년 5월 20일, 광주 금남로에서 시민들과 차량 행렬이 시위를 벌이는 모습

5·18기념재단

1 개요

1980년 5월 18일부터 5월 27일까지 광주 및 전라남도에서 시민들이 신군부에 맞서 싸운 대중봉기 형태의 항쟁을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라 부른다. 운동 참여자들은 계엄령 철폐, 전두환 퇴진, 김대중 석방 등의 구호를 외쳤으며 공수여단의 강경진압으로 희생자가 발생하자 5월 21일 시민군을 조직하여 계엄군을 광주 외곽으로 몰아냈다. 5월 27일 새벽 공수부대의 진압작전으로 항쟁은 종결되었다. 희생자는 사망자 165명, 행방불명자 65명, 상이 후 사망자 376명 등 606명으로 집계되었으나 암매장자 및 미신고 인원을 고려했을 때에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2 운동의 배경 : 12·12 쿠데타와 5·17 비상계엄 전국 확대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하자 노동자, 농민, 학생, 재야인사 등은 억눌렸던 민주화 요구를 분출하였다. 민주주의 회복을 둘러싸고 다양한 전망들이 발산하는 가운데 12월 12일 전두환·노태우의 하나회를 중심으로 신군부 세력은 쿠데타를 일으켰다. 신군부는 계엄사령관이었던 정승화 육군참모총장과 군 지휘부를 불법 연행하여 군 지휘권을 장악하였다.

1980년 4월부터 전개된 노동쟁의는 5월 초까지 전국에서 격렬하게 전개되었고, 대학생들은 5월 13일부터 캠퍼스를 벗어나 거리에서 계엄령 해제, 민주주의 회복을 외치며 시위에 나섰다. 5월 15일 서울역에는 10만 명의 대학생이 결집하였는데 총학생회장단은 시위대 해산을 결정하였다. 이를 ‘서울의 봄’과 ‘서울역 회군’이라 부른다.

한편 신군부는 북한 남침설을 유포하고 대중운동을 사회혼란으로 규정하였다. 1980년 2월부터 후방 부대에 시위진압 지침을 전달하고 공세적인 진압훈련인 ‘충정훈련’을 실시하였다. 군의 사회개입은 대학생 시위가 소강 사태에 접어든 5월 17일 전군(全軍) 주요지휘관 회의에서 구체화되었다. 이 회의에서 비상계엄의 전국 확대가 결의되었고, 국무회의는 이를 형식적으로 승인하는 절차였다. 5월 17일 24시부로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고, 새벽 2시 국회는 무력으로 봉쇄되었다. 계엄 확대 이전인 17일 밤부터 전국 군·검·경 합동수사본부는 학생, 정치인, 재야인사 등을 예비검속으로 불법 연행하였다. 비상계엄 전국 확대는 신군부가 직접 사회를 장악하고, 신군부에 저항하는 세력을 ‘적색분자’, ‘불순세력’, ‘폭도’ 등으로 규정하는 조치였다.

3 운동의 양상 및 전개 : 계엄군을 몰아내고 ‘해방광주’를 만들어내다

비상계엄이 확대되자 7공수여단이 전라남북도 주요 대학을 점거하였다. 7공수여단은 대학을 점거하며 물리력을 사용했고, 전북대에서는 ‘비상계엄 철폐 및 전두환 퇴진’ 밤샘 농성을 하던 이세종이 공수부대원들에게 쫓겨 사망하였다. 광주 전남대, 조선대에 남아 있던 학생들도 공수부대에게 구타 및 연행을 당하였다.

5월 18일 아침, 전남대 정문 앞에서는 비상계엄과 휴교령에 반발하는 학생 시위가 전개되었고, 7공수여단은 학생들을 강제 해산시켰다. 학생들은 전남도청이 있는 금남로 및 광주 시내 곳곳에서 산발적인 시위를 벌였고, 경찰은 최루탄 등을 사용하며 이들을 진압하였다. 오후부터 7공수여단이 직접 시위대 진압에 나서며 상황이 급변하였다. 군 지휘부는 포고령 위반자의 엄중 처리, 소요자 타격 및 체포 명령을 내렸고, 공수부대는 진압봉뿐 아니라 총기 개머리판, 대검까지 휘두르며 공세적 진압에 나섰다. 연행자를 금남로에서 옷 벗기고 구타하는 상황이 지속됐다. 이날 하루 동안 학생 224명, 일반인 181명 등 405명이 연행되었다.

5월 19일, 11공수여단이 광주에 추가 투입되었고, 공수부대는 2인 1조로 순찰하며 금남로 일대를 완전히 통제하였다. 군은 장갑차, 헬기 등 중장비를 시위 진압에 투입하였다. 시민들은 적극적으로 공수부대 진압을 곳곳에서 저지하였다. 4시 40분경, 동원빌딩 인근에서 분노한 시민들이 계엄군 장갑차를 공격했고, 이 과정에서 11공수여단 장교의 발포로 총상자가 발생하였다.

5월 20일은 운동의 첫 번째 분수령인 날이었다. 군의 강경진압에 항의하는 시민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었고, 시위대는 언론 왜곡보도의 상징인 광주MBC와 행정을 상징하는 광주세무서를 불태웠다. 이날 군은 보고에서 4~5만 명의 시위대가 기물을 파손하고 계엄군과 대치한다고 보고하였다. 군은 시위대를 ‘난동자’로 보았고, 일선 부대에 M16 실탄 배부 및 무장을 명령했다. 3공수여단이 광주 시청에서 시민을 향해 발포하였고, 다음날 새벽 병력이 광주역에서 전남대로 복귀하면서 시민들과 충돌하여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5월 21일 새벽, 시민들은 광주역 앞에 방치된 시위 참여자 시신들을 발견하였다. 시신을 수습하고 공수부대의 만행을 시내 도처에 알리면서 금남로로 행진하였고 전남도청 앞에서 계엄군과 대치하였다. 오전에만 10만여 명이 거리로 나왔으며 시민대표단은 전남도지사를 만나 사과 및 연행자 석방, 공수부대 철수를 요구했다. 그러나 정오를 기해 전남도청 앞, 전남대 정문 부근에서 공수부대는 집단 발포를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시민들은 광주 부근 무기고를 털어 자체 무장을 시작하고, 계엄군과 전투를 시작했다.

5월 21일 오후부터 공수부대는 시내를 벗어나 광주시 외곽을 봉쇄하며 새로운 경계를 만들었다. 그 내부에 존재하는 광주 시민을 ‘폭도’로 규정하였다. 이 때문에 광주를 벗어나거나 이동하는 민간인을 향한 무차별 발포가 시작되었다. 특히 3공수여단이 봉쇄작전을 펼쳤던 광주교도소 부근의 광주와 담양을 잇는 길목에서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계엄군이 물러간 광주에서 시민군은 시내 방위대, 지역 방위대를 조직하여 자치질서를 수립했다. 시민군은 청소년의 총기 휴대 금지, 계엄군의 선제 발포시에만 사격 허용 등을 제시하며 총기 사고 예방에 힘썼다. 종교인, 지역유지 등으로 구성된 시민수습대책위원회는 계엄군과 협상 및 무기 회수를 시도하였다. 계엄군은 수습대책위원회의 협상안에 불응하였고 23~26일 도청 광장에서는 매일 시민궐기대회가 개최되었다. 5월 26일 젊은 청년을 중심으로 민주시민학생투쟁위원회가 결성되었고, 이들은 수습파를 도청에서 몰아내고 결사 항전을 결의했다.

‘해방구’ 광주는 정부와 군 입장에서 ‘치안부재의 상태’로 규정되었다. 최규하 대통령은 사태의 책임을 광주 시민에게 떠넘기는 특별담화를 발표했는데, 이에 윤공희 천주교 광주대교구 대주교는 ‘광주 시민들의 평화적인 시위를 다스리는 데 있어서 계엄군이 광주시 곳곳에서 천인공노할 잔악한 행위를 수많은 시민들이 지켜보는 한 가운데서 자행했기 때문에, 자기 아들, 딸들이 군인들의 몽둥이에 얻어맞고 구둣발에 채여 유혈이 낭자한 채 길바닥에 쓰러지고 다 죽게 뻗어버린 채로 차에 실려가는 것을 본 시민들이 얼마나 격노’한 것이라 반박하였다.

군은 5월 27일 새벽 3시 30분을 기점으로 최종 진압작전인 상무충정작전을 실행하였다. 공수여단 특공조가 광주 시내로 침투하였고, 20사단과 31사단이 외곽에서 시내로 진입했다. 4시 5분 전남도청에서 시민군과 교전이 벌어졌고, 4시 55분 전남도청 진압이 완료되었다. 새벽 5시를 전후로 광주관광호텔, 광주국군통합병원, 전남도청, 광주경찰서 등 주요 기관의 군부대 진입이 완료되었다. 이 작전으로 윤상원, 박용준을 비롯한 17명의 시민군이 사망했고, 227명이 연행되었다. 시민군은 지도부 명령에 의해 마지막 저항을 결정한 것이 아니었다. 윤상원 등 시위 지도부는 ‘굳은 각오와 결의가 없는 사람은 지금 나간다고 해도 말리지 않겠다’고 말했다. 시민군의 희생 속에서 열흘간 전개된 항쟁이 마무리되었다.

4 운동의 지향 및 지역성

5·18 광주 민주화운동은 1979년 유신체제 붕괴에서 촉발된 전국적 민주화 요구의 연장선상에서 전개되었다. 운동 지도부는 유신독재와 신군부를 광주 비극의 원인으로 규정했다. 신군부를 ‘유신잔당’으로, 공수부대를 ‘전두환의 친위대’로 규정했다. 민주시민투쟁위원회 지도부 12명 가운데 절반이 넘는 7명은 1970년대 민주화운동 참여자였다. 운동은 1970년대부터 이어진 반유신 및 민주화운동의 지향을 일정 부분 계승하였다. 5월 21일과 22일 계엄군을 몰아내고 광주 시내에서 손쉽게 볼 수 있었던 태극기는 자유민주주의를 기반으로 한 저항성을 보여준다. 한편, 광주의 자치질서 확립과 전남도청 사수투쟁은 공동체, 도덕규범, 분배 정의 등을 요구했던 민중주의적 지향을 보여준다.

전국적인 5월 민주화 요구 속에서 광주에서만 대중봉기로 전개된 까닭은 다음과 같다. 첫째, 공수부대의 과잉진압이 그 원인이었다. 경찰로 통제가능한 시위에 군대가 개입하면서 희생자가 발생했고, 이것이 시민의 분노로 이어졌다. 둘째, 시위 및 강경진압이 발생했던 금남로의 장소성을 들 수 있다. 금남로는 광주 및 인근 지역의 버스까지 통행하던 교통 중심지였고, 오랫동안 행정 중심지이자 시민들의 참여와 저항이 이어지던 공간이다. 이 때문에 공수부대의 과잉진압 소식은 빠르게 인근 지역으로 전파될 수 있었다. 셋째, 호남 유력 정치인 김대중의 연행이 촉발한 측면이 있다. 1971년 신민당 대선 후보로서 전국적인 돌풍을 일으켰던 김대중은 박정희 사후 정치권력 장악 및 민주화 과정에서 핵심적인 인물이었다. 김대중 연행은 호남지역에서 신군부를 비판하는 정서를 확산시켰다.

5 운동의 영향 : ‘광주세대’의 등장과 끝나지 않은 진상규명

5·18 광주 민주화운동은 사건 이후 한국 민주화운동의 자양분이 되었다. 전두환 정부는 운동을 내란(內亂), 폭동(暴動)으로 규정했고, 민주화운동 세력은 정부에 맞서며 광주학살 진상규명 투쟁을 벌여나갔다. 광주가 희생되는 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도덕적 부채와 지속적인 군부정권의 폭력은 대학가에 ‘광주세대’를 낳았고, 이들은 운동을 급진적으로 재현(再現)했다. ‘광주세대’는 전두환 정부를 친미(親美)적인 폭력 정권으로 이해했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변혁운동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광주세대는 변혁이론에 기반하여 1970년대 민주화운동의 이데올로기적 한계를 극복하고자 했다. 이처럼 5·18 광주 민주화운동은 1980년대 변혁운동과 민주화운동에서 정서적·이념적인 저수지 역할을 했으며, 1987년 6월 민주항쟁으로 계승되었다.

제도적 민주화가 성취되고 1995년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어 헌정질서 파괴 범죄행위에 대한 공소시효 정지 등이 결정되었다. 1997년 4월 전두환·노태우는 쿠데타와 광주 학살의 대가로 각각 무기징역, 17년형을 선고받았으나 같은 해 12월 특별 사면되었다. 같은 해에 국가기념일로 ‘5·18 민주화운동 기념일’이 제정되었고, 2011년 유네스코(UNESCO)는 관련 기록물을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했다. 2018년에는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이 제정되어 운동 당시 자행되었던 반민주적·반인권적 행위에 대한 진상규명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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