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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남북공동성명

최초의 남북대화가 낳은 성과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 대표 이미지

‘7·4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하는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국가기록원

1 개요

1972년 7월 4일 남북한 당국이 한반도 통일 및 평화정착의 원칙 및 방법에 관하여 발표한 합의 문서를 말한다. 7·4 남북공동성명은 실질적으로 남한과 북한 두 당국이 최초로 합의한 역사적 문건이자, 1970년대 초 동·서 데탕트의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진 남북대화의 성과를 집약하는 합의 문서다.

2 미·중 데탕트와 남북간 접촉의 전개

1948년 남북한 정부가 각각 수립된 이래 남·북한 당국은 공식적인 차원의 대화 없이 대결과 무력 충돌을 계속했다. 특히 1960년대 중반 남한 정부가 베트남전쟁에 대규모의 전투병을 파병하고 북한이 군사모험주의적 대남전략을 채택하면서 양측의 충돌과 갈등은 한층 격화되었다. 1968년에는 북한의 무장 공작원들이 청와대 습격을 시도한 ‘1·21 사태’, 미 해군의 첩보함 푸에블로호가 원산 앞바다에서 북한에 의해 나포당한 ‘푸에블로호 납치 사건’, 120여 명의 북한 특수부대원들이 울진과 삼척에 침투하여 유격근거지 형성을 기도한 ‘울진·삼척지구 무장간첩 침투 사건’ 등이 연쇄적으로 발생했다. 북한의 군사모험주의가 절정에 달한 1968년 한 해에만 남·북한의 군경과 민간인이 500여 명 이상 희생되었다.

이와 같이 남북의 피흘리는 대결이 진행되는 동안 국제 정세는 바뀌고 있었다. 자본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의 적대적 분위기가 상대적으로 누그러지고 냉전적 대결 구도가 완화된 ‘데탕트’(détente) 정세가 도래한 것이다. 데탕트는 프랑스어로 ‘완화’ 내지는 ‘휴식’을 의미하는 단어로, 1940년대 후반 이래 냉전 구도 속에서 대결과 적대를 지속하던 자본주의·공산주의 양 진영이 대화와 관계 개선을 추구하기 시작한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중엽까지의 국제 정세를 일컫는 개념이다.

미국과 중국의 상호 접근과 관계 개선은 데탕트를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1949년 마오쩌둥(毛澤東)이 이끄는 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가 국민당 정부를 대만으로 몰아내고 대륙을 장악한 이래 양국은 오랫동안 적대관계를 유지했다. 특히 두 나라가 6·25전쟁 중 직접적인 군사적 충돌을 경험하면서 적대관계는 더욱 심화되었다.

그러나 1960년대 후반 들어 변화된 세계 정세 속에서 미국과 중국은 적대 일변도의 관계를 청산하고 새로운 관계 수립을 모색하게 된다. 미국은 크게 다음과 같은 동기로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필요로 했다. 첫째, 미국은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통해 베트남전쟁을 보다 용이하게 종결시키고자 했다. 미국은 1964년을 기점으로 지상군을 포함한 대규모의 전투병력을 베트남에 투입했지만 유의미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특히 1968년을 전후하여 국내에서 반전(反戰) 여론이 격화되면서 베트남으로부터의 ‘출구전략’을 모색하게 되었다. 미국은 중국이 베트남전쟁의 ‘명예로운’ 종결에 정치적·외교적 역할을 해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 둘째,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통해 공산권의 지도 국가인 소련을 견제할 수 있다는 점도 중요했다.

중국도 다음과 같은 이유로 미국과의 관계 개선에 응했다. 첫째,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통해 소련을 견제하고자 했다. ‘사회주의 우방’이었던 소련과 중국은 1960년대 내내 서로를 ‘교조주의’와 ‘수정주의’로 비판하며 갈등하고 있었고, 1969년에는 양국 간의 국경지대에서 무력 충돌까지 발생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중국에게는 미국보다는 오히려 소련이 중국의 안보를 위협하는 존재로 각인되었고, 소련 견제를 위해서 미국과의 관계 개선이 필요했다. 둘째, 중국은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통해 대만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즉 미국으로부터 대만은 중국의 일부라는 ‘하나의 중국’ 원칙을 확실하게 인정받고자 한 것이다.

이렇게 양측의 이해관계가 일치한 가운데, 미국과 중국은 1969년 11월부터 외교관들 사이의 비밀 접촉을 시작했고, 1971년 4월에는 미국의 탁구 대표팀이 베이징(北京)을 방문하여 중국 탁구 대표팀과 친선 경기를 치른 ‘핑퐁 외교’가 이루어졌다. 1971년 7월에는 백악관 안보보좌관이자 미국 대외정책의 실세였던 헨리 키신저(Henry Alfred Kissinger)가 비밀리에 베이징을 방문하여 중국 지도부를 접촉했고, 1972년 2월에는 닉슨(Richard Milhous Nixon) 대통령이 중국을 공식 방문하여 최초로 미국과 중국 간의 정상회담을 개최했다.

이러한 미국과 중국의 데탕트는 남북대화의 개시에 직접적인 계기를 제공했다. 남·북한은 냉전의 양 진영간 긴장이 완화되고 대화 채널이 구축되는 전 세계적인 흐름을 거스르기 어려웠다. 또한 미국과 중국의 관계 개선 과정에서 한반도 문제가 주요 의제 중 하나로 다루어질 것이 예상되었기 때문에, 한반도 문제가 강대국의 이해관계에 의해 흥정될 수 있는 가능성에 대비하기 위해서도 남과 북은 어떤 형태로든 대화에 나서지 않으면 안 될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3 7·4 남북공동성명의 발표

남북간의 접촉은 적십자 회담으로부터 출발했다. 1971년 9월 이산가족 찾기를 위한 남북적십자사 예비회담이 개최되었다. 이 회담은 표면적으로는 양국 적십자사가 모여서 비정치적 사안을 논의하는 형식을 취했지만, 그 배후에서는 남북 정부가 회담의 진행과 논의 과정에 깊이 관여했다. 11월부터 남북한 정부가 적십자 대표단의 일원으로 파견한 중앙정보부 소속의 정홍진과 조선로동당 책임지도원 김덕현의 비밀 접촉이 시작되면서 남북한 정부 고위급 인사들이 접촉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1972년 5월 2일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이 비밀리에 평양을 방문, 김일성과 두 차례의 회담을 가졌다. 5월 말에는 북한의 박성철 부수상이 비밀리에 서울을 방문하여 박정희 대통령과 회담을 가졌다. 극비리에 진행된 남북 고위급 인사들간의 연속적인 회담의 결과 남북공동성명의 발표와 남북조절위원회 설치 등이 합의되었다.

남북한 정부는 1972년 7월 4일 오전 10시 서울과 평양에서 각각 방송을 통해 7·4 남북공동성명을 동시에 발표했다. 공동성명은 자주, 평화, 민족적 대단결이라는 3개의 ‘조국통일원칙’에 합의했고, 남북 사이의 긴장 상태를 완화하고 신뢰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상대방에 대한 ‘중상 비방’ 및 ‘무장 도발’을 자제하는 한편 상호 이해를 증진하기 위해 ‘다방면적인 제반 교류’를 실시하기로 했다. 이러한 합의 사항을 구체적으로 이행하기 위해 남북간 정치적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남북조절위원회를 설치하고 서울과 평양간 상설 직통전화를 개설한다는 내용도 포함되었다.

7·4 남북공동성명은 대결과 적대만을 지속하던 남북한 정부가 평화적 통일의 원칙을 합의한 최초의 문건이라는 점에서 큰 역사적 의의를 지녔고, 남북한 사회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그러나 동시에 공동성명은 남북대화의 취약성을 보여주기도 했는데, 남북한 양측의 정식 국호가 표기되지 않았다는 것, 이것이 암시될 수 있는 서명자의 직책 또한 표시되지 않았다는 것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4 남북대화의 중단

7·4 공동성명 이후 약 1년 동안은 적십자 회담과 남북조절위원회 회담을 축으로 남북대화가 지속적으로 진행되었다. 1972년 8월부터 1973년까지 7월까지 7차에 걸쳐 진행된 남북적십자 본회담은 이산가족 찾기 등 남북간 인도주의적 교류를 위한 각종 사업들에 대해 협의했으나 실질적인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남북조절위원회 회담은 1972년 10월부터 1973년 6월까지 총 6회 개최되었는데, 남한이 비군사적 교류 협력을 위한 논의에 집중하기를 원했던 반면 북한은 군축, 주한미군 철수, 국가보안법 폐지 등 정치적 사안을 먼저 논의할 것을 주장하면서 회담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

적십자 회담과 남북조절위원회 회담이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하는 가운데 남한 정부가 1973년 6월 23일에 발표한 「평화통일 외교정책에 관한 특별성명」 (‘6·23 선언’)은 남북관계에 또 다른 악재로 작용했다. 이 선언에서 남한 정부는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에 반대하지 않겠다고 표명하였는데,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론은 북한이 남북대화 과정에서 이미 명시적인 반대 의사를 표명한 사안이었다. 남북 유엔 동시가입은 남북 분단의 상태를 현실로 받아들이고 ‘두 개의 한국’을 수용하는 것을 의미했던 바, 이는 자신의 체제 정통성을 민족해방운동의 논리에서 찾는 북한 입장에서는 수용하기 쉽지 않은 방안이었다.

북한은 1973년 8월 28일 북한이 김대중 납치사건과 6·23 선언을 비난하며 일방적으로 대화중단을 선언했다. 이로써 데탕트와 7·4 남북공동성명으로 조성된 남북대화의 장은 일단 막을 내렸다. 북한은 남북대화는 중단한 채 1974년 3월 북미평화협정 제안 등을 통해 미국과의 직접 접촉을 시도했지만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5 7·4 남북공동성명의 의의와 한계

7·4 남북공동성명은 통일 3원칙을 비롯하여 남북관계의 진전을 가져올 수 있는 여러 사항들을 담고 있었지만 장기지속적이고 실질적인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남북한 당국이 실제로 남북관계의 개선에 관심이 있었다기 보다는 국내외 여론에 ‘보여주기’ 식으로 대화를 진행한 것에 불과하다는 평가도 존재한다. 남북한 정부는 7·4 공동성명과 남북대화를 내부적으로는 독재체제 구축에 십분 활용하기도 했다. 1972년 말 남한 정부는 통일에 대비한 새로운 정치체제가 필요하다는 명분으로 ‘유신’을 선포했고, 같은 시기 북한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주의 헌법」을 공포하며 유일사상체계 및 후계체제 구축에 박차를 가했다.

이처럼 7·4 남북공동성명이 한계도 명확하게 보여주었지만, 그것이 가진 역사적 의의 또한 무시할 수 없다. 7·4 공동성명이 남북한 당국이 최초로 무력이 아닌 평화적 통일의 원칙에 합의한 문서라는 점, 비록 위기와 단절이 반복되기는 했지만 이후에도 끊이지 않고 이어진 남북대화의 기본적 방향을 제시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런 면에서 7·4 남북공동성명은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의 역사에서 여전히 중요한 이정표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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