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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 사태

한국전쟁 이후 최대의 국가위기

1997년

IMF 사태 대표 이미지

IMF 사태 당시 당시 금모으기에 참여하는 국민들

e영상역사관(한국정책방송원)

1 개요

IMF 사태란 좁게는 1997년 12월 3일 협상 타결로 인해 IMF의 긴급 구제금융을 지원받게 된 것을 의미하고, 넓게는 1997년 초부터 진행된 일련의 경제위기를 의미한다. 1997년 1월 대기업 한보의 부도 사태에서 촉발된 신용경색으로 재벌 그룹들이 줄줄이 무너지기 시작했고, 빌려준 돈을 돌려받지 못할 것을 우려한 외국 자본들이 자금 회수를 요청하면서 한국 경제는 외환위기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결국 한국 정부는 IMF의 긴급 구제금융을 신청하고, 회생절차를 밟기로 결정하였다. IMF 사태는 한국 국민에게 커다란 충격을 가져다 준 사건이었으며, 이후 한국 사회의 모습을 크게 변화시켰다.

2 IMF란?

한국에서는 IMF를 경제위기의 대명사처럼 사용하고 있다. 경제 성장률이 떨어지거나 실업률이 상승했을 때와 같은 경제 상황은 물론, 고령화와 저출산 등 사회문제를 경제와 연관시킬 때조차 IMF라는 단어를 활용하기도 한다. ‘IMF 사태’, ‘제2의 IMF’ 등의 표현이 널리 쓰이고 있듯이, 한국에서는 IMF라는 단어 자체를 경제위기라는 단어로서 사용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IMF는 경제위기를 뜻하는 영어의 약자가 아니다. IMF는 국제통화기금(International Monetary Fund)의 줄임말이다. 1944년에 체결된 브레튼우즈 협정에 따라 1945년에 설립되어, 1947년 3월부터 세계은행(International Bank for Reconstruction and Development, IBRD)과 함께 업무를 개시한 국제금융기구가 바로 IMF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인 1944년 미국의 휴양지인 브레튼우즈에서 미국, 영국 등 제2차 세계대전 승전국의 경제학자와 정책담당자가 모였다. 여기서 전쟁 후의 새로운 세계금융질서로 미국 화폐인 달러를 기준으로 한 고정환율제가 논의되었고, 이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기구로 IMF 창설이 논의되었다. 1970년대 전 세계적으로 고정환율제를 포기하고 변동환율제를 채택했기 때문에 현재는 환율이 시시각각 변화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의 달러화를 세계의 기축통화로 삼는 것은 여전히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 이처럼 1944년의 논의를 통해 만들어진 세계금융질서를 협상 장소의 이름을 따서 ‘브레튼우즈 체제’라고 부른다. 브레튼우즈 체제는 제2차 세계대전과 함께 형성된 냉전체제 하에서 자본주의 국가들이 사회주의 국가들을 경계하면서, 동시에 자본주의 국가들 간의 경쟁이 전쟁으로 확대되는 것을 방지하면서 함께 번영할 방법을 찾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렇기에 브레튼우즈 체제 하에서 창설된 IMF는 자본주의적 경제 발전의 확산과 유지를 위해 움직인다. IMF는 자금을 빌려주는 역할을 하기에 일반 은행과 비슷하다고도 생각할 수 있지만, 단순히 자금을 빌려주는 것에만 그치지 않는다. IMF는 자금을 빌리는 나라와 협의하여 그 나라의 경제 정책에 개입한다. 이 과정에서 자금을 빌리는 나라들은 자본주의 시장에 깊숙이 발을 들이게 된다.

이처럼 IMF는 미국이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으며, 금융위기 해결사를 자처하는 국제기구인 셈이다. 2021년 기준 총 190개의 나라가 회원국으로 가입되어 있으며, 한국은 1955년에 가입하였다.

3 1997년 경제위기의 발생과 긴급 구제금융 지원

한국에서 ‘IMF 사태’라고 하면 좁게는 1997년 12월 3일 협상 타결되어 IMF의 긴급 구제금융을 지원받게 된 것을 의미하고, 넓게는 1997년 초부터 진행된 일련의 경제위기를 의미한다. 따라서 IMF 사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1997년 경제위기의 발생부터 짚어볼 필요가 있다.

1997년 경제위기의 원인에 대해서는 여전히 학자들 사이에서도 다양한 의견이 제기되고 있다. 이것은 각자 경제위기를 바라보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크게는 국내 경제구조의 문제를 강조하거나 단기간에 외국 자본이 빠져나간 국제 금융상황을 원인으로 보는데, 어느 하나만이 경제위기의 원인으로 작용한 것이 아니라 외부의 충격과 내부의 취약함이 동시에 나타났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만큼 IMF 사태는 총체적인 문제들이 복잡하게 폭발한 사건이었다.

1997년의 경제위기는 외환위기라는 외부의 충격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한국에 들어와 있는 외국 자본은 대부분 투기자본이었다. 1993년 한국 정부가 예외적으로 금융기관에게 무역 관련 금융과 해외지사 단기차입을 허용함으로써 단기 외채 도입의 ‘뒷문’이 열리게 되었고, 일단 문이 열리자 금융기관들은 금리가 낮은 일본 등으로부터 자금을 대규모로 차입하였다. 그런 상황에서 1997년 여름 일본 은행들이 자금을 회수하기 시작했다. 이런 식으로 단기간에 대규모 외국 자본이 들어왔다가 단기간에 빠져나가는 과정에서 외국 자본이 투자하거나 빌려준 돈을 국내 금융기관이 돌려주지 못하면서 부도 사태를 맞았다. 1997년에 한국뿐만 아니라 아시아의 다른 나라에도 비슷한 위기가 있었다는 것은 IMF 사태에 외부적 요인이 크게 작용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외국 자본이 빌려준 자금을 급히 돌려받으려 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외국 금융사들이 빌려준 자금을 돌려받기 어려울 수 있다는 판단 아래 투자 자금의 회수를 서둘렀기 때문이다. 그러한 신호를 준 것은 1997년 1월에 일어난 대기업 한보의 부도였다. 이 사건은 IMF 사태의 서막을 여는 것이었다. 한보의 부도는 곧바로 한보에 대출을 해준 은행의 부실로 이어졌는데, 예전과 달리 정부가 지원하지 않겠다고 함으로써, 외국 자본의 불안감을 부추겼다. 이에 따른 갑작스런 국내자본의 해외 유출은 한국의 은행들이 감당할 수 없는 사태였다. 한국 정부가 은행의 외채에 대해 지급보증을 했지만, 한국 정부도 은행의 외채를 대신 갚아줄 능력이 없었기에 외환위기는 가속화 되었다.

외부의 충격이 있더라도 국내의 경제상황이 튼튼하거나 대응이 적절했다면 그 영향은 줄어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외환 정책의 실패, 금융 감독의 실패, 자본 자유화 정책과 업종 전문화 제도의 실패 등 한국 정부의 대응 실패도 누적되고 있었다. 이와 더불어 1997년 이전에 한국 정부는 빠른 경제개방을 추진하고 있었다. 급속하고 광범위하게 진행된 개방은 한국의 경제와 사회의 체질을 허약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었다고 평가받는다.

한보의 부도가 안겨준 충격으로 신용경색 현상이 나타나면서 연쇄효과로 재벌 그룹들이 줄줄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3월 삼미, 4월 진로, 5월 대농과 한신, 7월 기아, 11월 해태와 뉴코아, 12월 고려증권과 한라가 쓰러졌다. 이에 한국 정부는 IMF 긴급 구제금융 신청을 고려했다. 11월 14일 한국 경제의 IMF행이 결정되었고, 11월 16일에는 미셸 캉드쉬(Michel Camdessus) IMF 총재 일행이 비밀리에 한국으로 들어와서 한국의 외환상황에 대한 브리핑을 받았다. 11월 21일 밤에는 임창열 경제부총리가 IMF 지원요청 계획을 발표했으며, 11월 28일에는 IMF 협상단이 서울에 도착했다.

12월 3일 아침 서울을 다시 방문한 캉드쉬 IMF 총재는 대통령 선거 후보들이 모두 IMF 협상 결과를 받아들인다는 각서의 제출을 요구했다. 며칠 후면 대통령 선거가 예정되어 있었는데, 새로 선출된 대통령이 IMF와의 협상을 없던 것으로 되돌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김영삼 대통령은 후보들의 각서를 받되 IMF에 제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내는 형식으로 하자고 제안했고, 대통령 후보들은 각서를 제출했다. 이날 저녁 10시 임창열 경제부총리와 이경식 한국은행 총재가 공동 서명한 이행각서가 세계 언론이 지켜보는 가운데 캉드쉬 IMF 총재에게 전달되었다. 이 협상을 통해 한국은 IMF의 긴급 구제금융을 지원받게 되었다.

4 IMF 사태가 바꿔놓은 한국 사회

긴급 구제금융 지원과 관련하여 12월 3일을 ‘국가부도의 날’ 혹은 ‘경제 국치일’이라고 부르거나, 구제금융을 지원받아야 했던 상황을 ‘IMF 신탁통치’나 ‘한국전쟁 이후 최대의 국난’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IMF 사태는 한국 국민들에게는 커다란 충격이었다. 충격이 컸던 만큼 IMF 이후 한국 사회는 많은 것들이 변화했다. 이때부터 만들어진 변화들이 그 후의 한국 경제와 사회의 모습을 규정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IMF 사태는 구제금융을 지원받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지원을 받기 위해 내걸었던 여러 조건들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 문제였다. 여기에는 한국 경제의 회생에 도움이 되는 것들도 있었지만, 동시에 한국의 회복보다 IMF의 입장을 강화시키는 프로그램들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IMF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미국의 입장이 반영된 것이기도 하였다. 수입처의 다변화 제도나 무역 관련 보조금 폐지, 수입승인제 폐지, 수입증명절차 간소화 등이 그러한 예다. 즉 미국의 입장은 외국의 자본이 한국 시장으로 들어올 때 발생하는 충격을 막는 방파제를 제거하라는 요청이었다.

이러한 프로그램의 실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본의 이동이 자유로워졌다는 점이다. 이로써 단기 외국 자본이 더욱 손쉽게 한국으로 유입될 수 있었고, 외환 시장과 화폐 가치를 요동치게 만들 위험성도 높아졌다. 몸집 불리기에 집중하여 과도한 빚더미에 눌려 있었던 한국의 기업들은 확장된 사업을 외국인 투자자에게 빨리 팔아 넘겨야만 살길을 모색할 수 있었다. 결국 한국의 기업들이 적대적 인수·합병(M&A)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시장이 열린 것이었다. IMF는 정부의 긴축 재정과 은행 자금의 대출 절제를 요구했다. 이에 한국 정부는 긴축 예산을 편성하고, 은행은 대출에 고금리 정책을 적용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많은 기업들이 부도를 맞았는데, 더는 회생이 어려웠던 한계 기업은 물론 우량 기업조차도 고금리와 자금난 때문에 부도를 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기업의 부도와 인력 구조조정으로 실업자 숫자는 급속히 커져갔다. 늘어난 실업자들을 국가의 복지시스템이 보호해주어야 했지만 한국의 복지시스템은 제대로 정비되어 있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런 와중에 IMF 사태를 맞이하게 되면서 복지는 오히려 더욱 축소되어 갔다. IMF 체제로 대표되는 경쟁적 세계 시장 경제는 경쟁에서 승리한 강자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경쟁에서 낙오된 이들을 위해 재정을 투입하는 복지시스템은 긴축 재정을 요구하는 IMF에게는 불필요한 지출일 뿐이었다. 이처럼 경제위기에서 발생하는 충격은 가장 취약한 계층에게 가장 크게 다가왔다.

IMF 사태 이후 회생절차를 거치면서 한국 경제는 세계 자본시장에 그대로 노출되게 되었고, 외국 자본이 대거 유입되었다. 기업의 부도와 실직은 중산층의 붕괴를 가져왔으며, 부자와 가난한 자의 격차는 더욱 벌어졌다. 이처럼 IMF 사태는 한국 사회의 양극화를 가속화시키고 경쟁체제를 더욱 공고히 하였다.

5 금 모으기 운동

한국 국민들에게 IMF 사태는 다양한 모습으로 기억되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이미지를 꼽으라면 ‘금 모으기 운동’일 것이다. 한국 정부가 IMF로부터 195억 달러를 빌린 국가적 경제위기 상황에서 정부와 언론은 국민들이 구국운동에 나설 것을 호소하였다. 정부의 정책 실패나 기업경영 탓만 할 게 아니라 전 국민이 힘을 모아 위기를 이겨내야 할 때라는 주장이 연일 보도되었다. 경제위기가 외환보유고가 바닥난 탓에 닥친 것이라는 점에서 ‘달러 모으기 운동’이 먼저 시작되었다. 그러나 당시 달러라는 것이 일반 국민들이 가정에서 가지고 있을만한 보편적인 화폐는 아니었다.

그러던 중에 금을 모아 수출하여 달러로 바꾸고, 그 돈으로 외환보유고를 늘리자는 주장이 제기됐다. 1998년 1월 5일 ‘KBS 금 모으기 캠페인’이 생방송되면서 시작된 금 모으기 운동은 공식적으로는 3월 14일에 종료되었다. 이 운동의 결과 당시 시세로 21억 7천만 달러에 이르는 약 225톤이 모금되었다. 전국적으로 349만여 명이 참여한 것으로 기록된 금 모으기 운동은 한국인들의 공동체 정신이 발휘된 사건이었다. 2015년 8월 MBC 방송국이 대국민 의식조사를 했을 때, 광복 이후 가장 자랑스러웠던 순간의 3위에 금 모으기 운동이 꼽힐 정도였다.

그러나 금 모으기 운동을 경제위기 극복의 해결책으로 제시하고, 고통분담이라는 수사 아래에 국민들의 개인 책임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전개된 것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IMF 사태가 발생한 본질적인 원인이라고 할 수 있는 사회·경제구조의 문제를 국민 애국심의 문제로 치환함으로써 기업이나 국가 등의 책임을 추궁하지 못하는 효과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금 모으기 운동은 정부나 기업만이 아니라 국민 전체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IMF 구제금융 조기상환이 가능했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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