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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H사건

유신정권의 경직성·폭력성을 폭로하다

1979년

YH사건 대표 이미지

YH 무역 농성 강제 해산을 보도한 기사

동아일보

1 개요

가발수출업체였던 YH무역의 여성노동자들이 회사의 위장폐업조치에 항의해 1979년 8월 9일부터 야당인 신민당 당사에서 농성 시위를 벌이던 중 11일 새벽 경찰의 폭력적 강제 진압으로 해산 당한 사건을 가리킨다. 특히 이 과정에서 상무집행위원이었던 노동자 김경숙이 사망했다. 이 사건은 본질적으로 노동자들의 생존권투쟁에서 비롯했지만 그에 그치지 않고 유신체제의 폭력성을 선명히 드러냄으로써 신민당의 대여투쟁 명분을 강화했고, 나아가 독재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와 저항의식을 자극했다.

2 YH무역주식회사

YH무역회사는 충북 옥천 출신의 장용호가 1965년에 설립한 가발 생산 업체였다. 당시 뉴욕의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 한국무역관 부관장이었던 그가 미국 가발시장의 성장과 동시에 미국이 중국 봉쇄의 일환으로 유럽 국가들에게 대미(對美) 가발 수출품의 원료원산지 증명을 요구하면서 생산량의 90%를 미국에 수출하던 이탈리아 가발 산업이 몰락하는 등의 국제 정세 를 눈여겨 본 결과였다.

서울 왕십리에 종업원 10여 명의 소규모 공장으로 출발했지만 사업은 단기간 비약적으로 성장해 1970년에는 종업원이 4천 명을 넘는 대기업이 되었다. YH무역은 1969년 약 400만 달러를 수출해 수출의 날에 국무총리상을 수상했고 국가적으로 수출 10억$를 넘긴 1970년에는 1천만 달러를 수출해 철탑산업훈장까지 받았다. 장용호 개인도 1971, 72년 종합소득세 납부실적이 각각 8위, 7위에 오를 만큼 부를 축적했다. 그는 자신의 동서에게 회사 사장직을 맡기고, 1970년 이후로는 뉴욕에 거주하며 YH무역 뉴욕지사장 직함으로 활동했다.

3 YH노조 결성과 투쟁

YH노동자들은 1975년 5월 24일, 전국섬유노조 산하 YH노조를 결성했다. 세 차례의 실패를 거듭한 끝에 얻은 결과였다. YH노조는 섬유노조와 가톨릭노동청년회의 지원으로 출발했지만 이후에는 시행착오를 거치면서도 간부들만이 아닌 기층 조합원들의 의견을 수렴하고 준법투쟁과 단체행동을 적절히 전개했다. 이를 통해 노동자들의 지지를 얻고 조금씩이나마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 회사 측도 초기에는 노사협상을 거부했지만 곧 노무과를 만들어 일정하게 대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75년 9월에 노동자들에게 추석 보너스로 2~3천 원씩 지급케 되고, 연말의 노사협의에서 상여금 50%에 합의한 것은 모두 이 같은 활동의 결과였다. 이후에도 노조는 자치회나 소그룹 활동을 통해 조직력을 다지는 한편 임금 인상 등을 두고 사측과 교섭을 계속했다.

4 1979년 YH무역의 폐업 공고

1979년 3월 30일, YH무역은 경영부실로 사업을 계속할 수 없다는 이유로 4월 30일자 폐업을 공고했다. 뉴욕지사는 본사로부터 제품을 싸게 수입한 후 대금 결제를 하지 않는 사실상 외화 도피를 했고 본사 사장은 사원 상여금 등의 회사자본을 빼돌려 YH해운을 설립하는 등 방만한 경영을 했다. 이로 인해 1974년 6억 3천만 원이었던 회사채무가 1979년에는 40억 5천만 원까지 늘어나며 재무구조가 악화되었다. 1979년 1월, 조흥은행은 누적된 적자로 대출원리금 상환이 중단된 YH무역에게 거래를 중지하는 것은 물론 면목동의 공장을 차압하겠다고 경고했다. 그에 앞서 회사가 가발업이 사양산업이라는 이유로 휴업을 반복하고, 아무런 제반환경이 갖춰지지 않은 충북 옥천군 청산에 지방 공장을 설치하는 등 노동환경을 불안정하게 함으로써 1970년 4천 명에 달했던 종업원은 1978년 5월에는 550명 정도로 줄어든 상태였다.

YH노조는 노사협의를 통해 공장 운영에 적극 협조하는 한편 기업 재건을 위해 적극 노력했다. 지방에서 상경해 최저 생계비에도 미치지 못하는 저임금을 받으면서도 제품 생산과 수출에 지대한 공헌을 했던 노동자들에게 회사의 일방적 폐업은 생존권을 위협하는 것이었다. 노조는 전 조합원에게 그간의 경위를 설명하는 교육을 실시하는 한편 청와대·재무부·상공부·보사부 등에 협조 공문을 발송하고 조흥은행과 북부 노동청 등 관계기관에 찾아가 회사 정상화를 진정했다. 그러나 회사 측은 고용승계를 보장하겠다는 처음의 약속과 달리 강성 노조 때문에 회사 인수가 이뤄지지 않는다는 등의 루머를 퍼뜨리고 일감을 제공하지 않는 등 노동자의 이탈을 유도했다. 노동청도 성의 있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YH노조의 노력과 몇 차례 농성에도 불구하고 회사는 8월 6일 퇴근시간을 기해 재차 폐업공고를 냈다. 8월 8일에는 기숙사의 전기 및 수도가 끊겼다. 회사는 9일 기숙사를 폐쇄하며 10일까지 퇴직금과 해고수당을 수령치 않으면 법원에 공탁하겠다고 통보했다. 마지막 국면에서 노조는 한국교회사선교협의회, 영등포도시산업선교회 등 종교·인권단체에 도움을 요청해 문제를 ‘외부화’하고자 했고, 마포 신민당사를 방문해 농성 상황을 설명하고 신민당의 조사단 파견을 요청했다.

5 8월 9일부터 11일까지, 신민당사 농성과 김경숙 열사의 죽음

마침내 8월 9일 새벽, YH노조 여성노동자 187명은 신민당 당사로 농성 장소를 옮기는 데 성공했다. 당일 오전 문동환 목사, 고은 시인, 이문영 교수로부터 이들의 호소를 들어달라는 부탁을 받은 김영삼 총재는 당사는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으며 최선을 다해 돕겠다고 답했다. 노동자들은 4층 강당에 모여 “배고파 못 살겠다, 먹을 것을 달라” 등의 플래카드를 걸고 “정상화 아니면 죽음이다”라고 쓴 머리띠를 두른 채 농성에 들어갔다.

이들의 농성이 정치화되면서 신문에 관련 기사들이 게재되는 등 상황에 다소 변화가 있었다. 신민당은 당내 사회노동문제 대책위원회를 구성하는 한편, 국회 보사위원회 소집을 요청하고 대정부 비난 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보사위 소집 건은 여당의 반대로 무산되었고, 정부는 신민당 당사를 경찰기동대로 에워싼 채 노동자들을 해산시키라는 요구만 반복했다. 경찰력이 강화되며 긴장감이 높아지자 YH조합원들은 8월 10일 밤 노조종결대회(긴급결사총회)를 열어 최후까지 맞서겠다고 결의했다.

8월 11일 새벽 2시, ‘101호 작전’이라 불린 경찰의 농성진압작전이 시작되었다. 고가사다리차와 물탱크차, 조명용 소방차 등을 동원해 대낮처럼 환히 불을 비추는 가운데 1천여 명의 경찰이 당사로 진입해 조합원들을 무차별 구타하고 끌어냈다. 신민당 국회의원과 당원들, 기자들도 예외 없이 폭력의 대상이 되었고, 김영삼 총재도 강제로 끌려나와 상도동 자택으로 보내졌다. 진압작전을 완료하는 데는 채 30분이 걸리지 않았다. 7개 경찰서로 분산 수용된 노동자들은 조사 받은 후 12일 오후 회사 본사에서 상여금·월차수당 등이 빠진 최소한의 퇴직금을 수령한 후 버스에 태워 고향으로 보내졌다. 회사 기숙사에서 농성 중이던 58명의 노동자들도 역시 해산되었다. 미국 국무부가 한국 경찰의 지나치게 잔인한 폭력 사용을 개탄하며 적절한 문책을 바란다고 논평할 정도였다.

특히 과잉 진압과정에서 22살의 노조 상무집행위원 김경숙이 사망했다. 당시 경찰은 그가 자해했다고 했으나 2008년, 부검보고서와 시신 사진을 검토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동맥을 끊은 흔적이 없고 오히려 손등과 후두부에 쇠파이프 및 날카로운 것으로 가격당한 치명적 상처가 있었다고 발표했다.

사건 이후 최순영 등 YH노조 간부를 비롯해 한국교회사선교협의회 문동환 목사, 영등포도시산업선교회 인명진 목사, 고은 시인 등이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 및 「집회와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등으로 구속되었다. 또 정부는 YH노조 여성노동자들의 취업을 제한하였다. 신민당은 정부의 폭거에 항의하며 18일간 농성했고, 「겨울공화국」(1975) 등의 시로 잘 알려진 시인 양성우는 김경숙을 기리며 「그대 못다 부른 슬픈 노래를」이란 추도시를 남겼다.

6 유신체제 몰락의 기폭제가 된 YH사건

한 신문사가 “한 노동자(전태일)의 죽음으로 막을 연 1970년대는 또 다른 한 노동자(김경숙)의 죽음으로 종언을 고했다” 고 평할 만큼 YH사건과 김경숙의 죽음은 1970년대 노동운동사에 중요한 발자취를 남겼다. YH무역의 폐업이나 여성노동자들의 해산을 막지 못했다는 점에서는 일차적으로 실패로 볼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 사건을 거치며 신민당은 유신체제에 대해 더 강경히 맞서게 되었다. 또 이 사건은 본질적으로 노동자들의 생존권 차원의 투쟁이었지만 유신체제는 그 같은 최소한의 요구마저 가장 강경하게 탄압함으로써 체제의 경직성을 드러냈다. 이는 정계를 넘어 국민 일반의 독재정권에 대한 분노와 저항의식을 자극했다. 역사의 큰 흐름에서 YH사건은 1979년 9월 이후 일련의 야당 탄압과 부마항쟁 과정에서 유신정권이 무너지게 되는 하나의 기폭제가 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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