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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부고속도로 개통

‘조국근대화’의 동맥이 뚫리다

1968년

경부고속도로 개통 대표 이미지

경부고속국도 서울-부산간 완공 당시 준공식 현장

국가기록원

1 개요

경부고속도로는 제2차 경제개발5개년계획 기간 중인 1968년 2월 1일에 착공해 약 2년 후인 1970년 6월 30일에 완공된 총연장 416km의 고속국도 제1호선이다. 경인고속도로에 이어 두 번째로 완공된 고속도로로 서울과 부산을 각 종점으로 해 수원·오산(이상 경기도)·천안(충청남도)·대전·영동(충청북도)·김천·구미·왜관(이상 경상북도)·대구·울산·양산(경상남도) 등 전국 주요 도시를 연결해 흔히 ‘국토의 대동맥’으로 불린다. 또 1960-70년대 한국경제 고도성장과 산업화를 상징하는 성과물로 평가되기도 한다.

2 고속도로 이전의 ‘유사 고속도로’

국내에서 ‘고속도로’라는 용어는 1959년경 처음 사용되었다. 다만 이때의 고속도로는 식민지기에 건설된 빈약하고 부실한 도로의 포장을 개선하는 데 중점을 둔 것으로 지금의 개념과는 다소 달랐다. 이 시기의 도로 건설은 장기적인 계획이 아닌, 필요에 따라 그때그때 기존 도로를 보수하는 작업이 주를 이뤘는데 그런 가운데서도 고속 주행을 가능케 한 ‘고속화도로’, 통행료를 받는 ‘유료도로’ 등은 일반도로에서 고속도로로 넘어가는 일종의 과도기적 도로에 해당했다. 이 같은 소위 ‘유사 고속도로’ 건설계획은 특히 산업지역을 연결하는 산업도로나 대도시 인구를 분산하기 위한 도로 등에 적용되었다.

3 최초의 고속도로 : 경인고속도로 건설

최초의 고속도로는 1967년 3월 24일에 착공해 1968년 12월 21일에 개통된 경인고속도로였다. 경인고속도로 건설계획은 1962년 6월 건설부의 ‘경인지구건설종합계획’에서 구체적인 형태로 등장했다. 이 계획의 핵심은 서울-인천 구간을 기존 1시간에서 20분으로 단축시켜 경인선과 국도의 교통난을 해결하는 한편 일대를 새로운 공업지대로 육성한다는 것이었다. 계획은 1964년 2월,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국토건설종합심의회에서 ‘서울-인천 특정지역안 국토건설 심의서’의 일부로 진지하게 검토되었고, 이것이 같은 해 11월 대통령 재가를 얻어 궤도에 올랐다. 또한 계획은 서울의 과대화 방지 및 도시발전을 위한 방사선·순환선 고속도로 건설을 포함했는데 이 점은 경부고속도로를 포함한 여타 구간의 고속도로 건설 구상으로 연결될 수 있었다. 한편 계획 수행을 위한 재원 확보과정에서 건설부는 국제부흥개발은행(IBRD)에 국내 교통·운수·해운 전반에 걸친 실사조사를 요구했다. IBRD는 큰 틀에서 수송상의 애로를 극복하기 위해 교통체계를 기존 철도 중심에서 도로 중심으로 바꿀 것을 건의했는데, 이는 경부고속도로 건설계획이 수면 위로 부상하는 데 중요한 계기이기도 했다.

4 경부고속도로 건설계획의 등장

서울과 부산을 잇는 경부국도는 한국전쟁 정전 이후 지속적으로 보수되었다. 이 구간을 고속도로로 새롭게 연결한다는 구상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65년 9월이었다. 건설부는 경부 구간에서 한강-낙동강 수계를 연결하는 직선 고속도로를 건설해 기존 국도보다 약 156km를 단축한다는 계획을 수립했다. 단 이 계획은 구체적인 공기에 대한 고려는 없었고, 600여 억 원에 달하는 막대한 공사비 등의 문제로 실현되지 못했다.

건설부가 경부고속도로 건설계획을 다시 꺼내든 것은 위의 IBRD 조사단이 한국정부에 조사보고서를 제출한 1966년 6월 이후였다. 도로 건설은 당시 제2차 경제개발5개년계획 건설부문계획에서 최우선 순위로 고려되었는데 IBRD가 이 부분에 약 390억 원을 지원한다고 하자 경부국도의 포장이 아닌, 고속도로 건설안을 내놓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때의 기본구상은 폭 30m 왕복 4차선의 총연장 440km 도로로, 8년간의 공사 후 완공 시에는 서울-부산간 기존 10시간의 소요시간이 5시간 반 정도로 단축될 것으로 예상되었다. 약 600억 원으로 예상된 공사비는 국제개발처(AID) 차관과 IBRD 차관 등으로 조달하고자 했다. 그러나 차관 도입이 난항에 빠지면서 정부는 내자 조달에도 힘썼다. 1967년 1월 도로정비촉진법을 제정해 도로 관련 세입을 도로에 투자토록 한 것이나 1968년 2월 휘발유세를 인상한 것 등이 이에 해당한다.

5 1967년 제6대 대통령선거와 건설계획을 둘러싼 논란

건설부의 여러 구간계획 중 하나였던 경부고속도로는 1967년 5월의 제6대 대통령선거에서 공화당 후보로 나선 박정희대통령이 ‘대국토건설계획’을 제시하면서 본격적으로 세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 ‘계획’에서 박정희는 “대국토건설사업은 조국근대화의 기본설계의 하나이다. (…) 도로는 서울~인천, 서울~강릉, 서울~대전~부산, 대전~목포 간의 척추고속도로를 건설하겠다. (…) 자원은 유엔개발계획(UNDP), AID, IBRD, 국제개발협회(IDA), 아시아개발은행(ADB), 유엔세계식량계획(WFP), 대한국제경제협의체(IECOK)에서 얻겠으며 구체적인 계획이 서면 국제금융채권을 발행하고 대일청구권, 정부보유달러(KFX), 미공법 480호(PL480)Ⅱ에서 충당할 것”이라고 밝혔다.

1967년 박정희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한 후 같은 해 10월에 단행한 개각에서 국토개발 전문가인 주원이 건설부장관에 임명되면서 계획은 더욱 추진력을 얻었다. 주원은 11월, 정부여당 청와대연석회의에서 도로개발계획을 보고하면서 특히 고속도로 건설을 중점적으로 브리핑했다. 이 과정에서 서울과 부산을 각각의 기점으로 하여 산업 활성화 및 인구 분산을 도모하고자 한 처음의 구상은 서울-부산을 잇는 거대 도로망 구상으로 발전했다. 이때의 예상 노선은 최종 확정된 것과 달리 대구에서 마산-진해를 거치는 노선이었고, 총 680억 원을 투입해 1968년부터 1971년까지 4년간 공사하여 완공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정부는 건설부·재무부 등 정부 부처와 육군공병감실, 현대건설 등이 참여한 소요비용 산출과정을 거쳐 330억 원 규모로 계획을 조정했다.

경부고속도로 건설계획이 정부의 주요 정책으로 단시일 내 급부상하면서 자연 관련한 사회적 논의도 활발해졌다. 교통수송 상의 필요성에는 어느 정도 공감하면서도 비판적인 여론도 만만치 않았다. 야당도 줄곧 부정적이었다. 가장 주된 비판지점은 재원 또는 재정상의 문제였다. 즉 일본 등 여타 국가의 사례를 보았을 때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정부가 예상한 것 이상의 천문학적 비용이 소요될 것이라는 점, 계획대로라도 이미 정부 1년 예산의 20%가 넘어 특정 부문에 지나치게 집중되므로 경제성을 따져 이를 보다 가시적 성과를 낼 수 있는 부문에 투입해야 한다는 등의 비판이었다. 그 외에 고속도로란 개념이 여전히 생소하고 관련 전문가나 기술진이 부족한 상황에서 과연 기술적 역량을 갖추었는지, 또는 기술적 측면을 비롯해 노선이나 필요성 등을 검증하기 위한 타당성조사가 충분히 이뤄졌는지에 대한 비판이 있었다. 또 사업을 급속도로 추진하는 정부의 태도도 문제시되었다.

6 경부고속도로의 건설

이렇듯 반대 의견이 적지 않았지만 박정희 대통령은 건설계획을 밀어붙였다. 1964년 서독 방문 시 본-쾰른을 연결하는 아우토반에 깊은 인상을 받았던 박정희는 고속도로 건설은 각종 산업의 발달과 지역개발 촉진, 생활권 확대 등 국민경제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이후 추풍령 휴게소에 세워진 준공기념탑에도 썼듯, 그는 경부고속도로를 자신의 캐치프레이즈였던 ‘조국근대화’의 상징으로 여겼다.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1967년 12월 국가기간고속도로 건설추진위원회와 산하 계획조사단을 설치했고, 대통령 직속으로 청와대 파견단을 만들어 그 자신이 계획과 건설과정을 주도했다. 계획조사단에서 1968년 10월까지 최종 노선이 결정되었다. 대구-부산 구간의 경우 마산 쪽이 아닌, 경주와 언양, 그리고 양산을 경유하는 노선으로 확정되었다.

사업은 1968년 2월 1일 서울과 오산을 잇는 제1공구를 시작으로 4월 3일 오산과 대전 간의 제2공구, 9월 11일 대구와 부산 간의 제4공구, 1968년 1월 13일 대전과 대구 간의 제3공구 순으로 공사에 들어갔다. 그 결과 1968년 12월 제1공구가 준공되었고, 1969년 12월 제2·4공구, 마지막으로 1970년 7월 7일 제3공구까지 준공 및 개통되었다. 총연장 428km, 전체 2년 5개월간 공사비 총 429억 원과 연인원 약 900만 명 및 장비 165만 대를 투입한 결과였다.

7 경부고속도로의 역할과 의의

경부고속도로는 1970년 개통 당시 전 구간 왕복 4차선이었으나 교통량 증대에 따라 1980년대 중반부터 확장의 필요성이 논의되었다. 2021년 현재는 약 160km 구간에서 왕복 6차선 이상으로 확장된 상태이다. 우리나라 수도인 서울과 두 번째 도시 부산을 연결하는 기간도로로서 여전히 국가경제는 물론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일반적으로 고속도로는 정치·경제·사회·문화 모든 분야에서 광범한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이해된다. 경인고속도로와 더불어 우리나라 고속도로의 선조 격이라 할 수 있는 경부고속도로도 마찬가지이다. 특히 경부고속도로는 그전까지 철도 중심이었던 수송구조와 체계를 공로(公路) 위주로 재편하는 큰 변화를 가져왔다. 고속도로의 여객 및 화물 수송분담율은 해마다 증가해 오늘날 말 그대로 국가산업 및 국민생활의 대동맥 역할을 하고 있다.

다만 당대에 초점을 맞출 때 완공 후 몇 년간은 ‘관광도로’ 등으로 불리며 제 역할을 하지 못했던 기간이 있던 것도 사실이다. 또 조기 완공을 마냥 서둘렀던 탓에 건설과정에서 공식적으로만 77명의 사망자가 발생했고, 건설 당시에는 km당 1억 원 가량의 저렴한 공사비로 완공했지만 막상 준공 후에는 그것을 훨씬 상회하는 유지보수비용이 들어갔다. 이미 복선철도가 있던 경부노선에 고속도로가 더해짐으로써 지역편중개발을 부추기는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점 역시 산업화의 빛에 가려진 그늘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떻든 경부고속도로는 1960-70년대 산업화 나아가 박정희정부와 대통령 그 자신에 대한 하나의 상징이다. 박정희가 ‘조국근대화’의 상징으로서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다소 무리하게 추진했던 것은 역설적으로 이 사업의 성격이 단지 경제적 차원에 국한되지 않음을 의미할 것이다. 요컨대 경부고속도로 건설의 공과는 경제적 측면은 물론 당대 정권의 의도라는 정치적 차원을 함께 고려할 때 보다 적절히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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