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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개발 5개년 계획

정부 주도의 경제성장을 추진하다

1962년 ~ 1981년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대표 이미지

1962년 광화문에 설치된 경제개발5개년계획 모형전시

국가기록원

1 개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제2공화국 장면 정부에서 기획되어 1960~70년대 박정희 정부에서 본격적으로 집행된 정부 주도 경제성장 방식을 말한다. 현 기획재정부의 전신인 경제기획원은 공식적으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이끄는 선도 기관이었으며, 시기별로 경제개발 및 자원 동원, 집행을 위한 전체 계획을 수립하였다. 정부 산하 각 부처는 5개년 계획에 따라 부처별 세부 시책을 수립 및 집행하였다. 경제개발 계획은 경제 현황과 미래 전망을 토대로 작성되었기 때문에 변화하는 경제 상황에 따라 수차례 수정되었다. 1982년부터 경제사회발전 5개년 계획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제7차 계획(1992~1996년) 이후 IMF금융위기 사태가 발생하고 민간 주도 경제성장이 화두로 제기되면서 정부 주도형 경제개발 계획은 종료되었다.

2 미국 원조정책의 변화와 경제부흥을 위한 노력들

제2차 세계대전이 종료되고 냉전체제가 수립되면서 제3세계 저개발 국가에서는 정부 주도로 경제정책을 수립하고, 빠른 공업화를 추진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또한 1950년대 후반 미국은 원조정책의 경제성을 중요시하며 냉전전략을 조정하였고, 그 결과 미국의 무상원조는 감소하기 시작하였다. 미국은 한국 정부 측에 ‘자조(self-help)’를 반복하여 주문하였다. 이처럼 미국의 원조정책이 변화하며 한국 정부는 전후복구에서 더 나아가 경제개발 전략을 수립해야 하는 조건에 놓였다. 이승만 정부는 1958년 4월, 미국의 동의하에 경제개발 계획을 전담할 부흥부 산하 산업개발위원회를 조직하였고, 이 위원회는 1960년부터 1962년까지 시행하는 경제개발 3개년 계획안을 마련하여 1960년 4월 국무회의에 제출하였다. 이승만 정부의 3개년 계획안은 북한과 체제경쟁이라는 현실정치의 조건 하에서 구성되었고, 빠른 자본 축적과 생산력 극대화를 통한 공업화를 성장 모델로 채택했다.

3개년 계획안은 1960년 4·19 혁명으로 제2공화국 장면 내각이 출범하며 경제개발 5개년계획으로 계승되었다. 장면 내각은 ‘경제제일주의’라는 기치 아래에 이승만 정부 시기 관치경제를 청산하고, 자유경제 질서를 확립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국토개발계획, 경제개발 계획을 추진하여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룩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계획은 이전 시기와 비교하였을 때에 관치경제 청산을 내세웠지만 동원 가능한 자본 부족과 미국 의존적 경제개발 계획, 국민의 절대적 지지 부족이라는 한계에 노출되며 1961년 5월 군사정변을 맞이하게 되었다.

3 1960년대 제1차, 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5·16 군정 세력은 혁명공약에서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겠다고 밝혔다. 쿠데타 세력은 결여된 민주적 정당성을 극복하고자 장면 내각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계승 및 수정하는 전략을 취했다. 경제기획원은 국가재건최고회의 초안과 부처별 계획을 종합하여 1961년 9월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초안을 완성하였고, 1962년 1월 5일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1962~1966년, 이하 1차 계획)을 공표하였다. 1차 계획은 자립경제 달성을 위한 기반 구축을 기본 목표로 삼아 ①전력, 석탄 등 에너지 공급원 확대, ②농업생산력의 증대로 국민경제 불균형 시정, ③기간산업 확충과 사회간접자본의 충족, ④유휴자원의 활용, ⑤수출증대를 주축으로 국제수지 개선, ⑥기술 진흥과 같은 중점 과제를 제시하였다. 정부는 막대한 경제발전 투자를 위하여 내자(內資) 동원이 필요했고, 1962년 6월 일반은행 국유화 및 통화개혁을 단행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1차 계획 집행을 위한 재원 문제가 대두되며 1962년 11월부터 계획은 수정되었고, 1964년 2월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보완계획’(이하 보완계획)이 발표되었다. 원계획은 연평균 7.1%의 급속한 경제성장을 목표로 하였는데 이는 내자 동원 및 외부자원의 한계를 고려하지 못한 것이었다. 초과수요, 인플레이션, 경제 불안이 예상됐기 때문에, 미국은 한국에 대한 원조비용의 상승을 우려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기존 경제개발 계획에 대한 보완계획은 강력한 긴축정책 같은 재정안정계획의 재수립과 함께 성장률 목표 및 총투자액 감축으로 수렴되었다. 또한 수입대체 공업화에서 수출 부문으로 투자를 변경하도록 변경되었다. 대표적으로 종합제철공장 건설계획이 경제성 및 기술성 측면에서 폐기되었다. 한편 1950년대부터 지속적으로 제기되었던 문제, 즉 경제발전의 주요 제약으로서 원조감축과 외환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절약과 저축에 근거한 내자 동원, 수출무역 확대로 외환 획득 등을 계획에 포함하였다.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7~1971년, 이하 2차 계획)은 국내 전문가뿐 아니라 미국, 서독 측에서 파견한 전문가들의 지원 아래에서 수립되었다. 정부 관계부처 장관, 경제과학심의회, 기획조정실, 한미경제협력위원회(United States Operations Mission, USOM), 미국·서독 고문단이 공동 작업하여 1966년 8월 대통령 승인을 받았다. 2차 계획은 산업구조를 근대화하고 자립경제의 확립을 촉진한다는 기본 목표를 수립하고, ①식량 자급, ②화학, 철강 및 기계공업을 통한 공업 고도화, ③7억불 수출과 국제수지 개선 마련, ④고용 증대와 가족계획으로 인구팽창 억제, ⑤영농 다각화 및 국민소득 증대, ⑥과학 및 경영기술 진흥과 인적자원 배양 등 6대 중점 과제를 선정하였다. 2차 계획 목표인 ‘자립경제 확립’은 후발국 입장에서 수출 공업을 육성하여 국제수지를 개선하고, 1차 산업에서 2차 산업으로, 경공업에서 중화학공업으로 변화를 의미했다. 이 때문에 2차 계획은 수출 목표를 1965년 1억 75백만 달러(상품 수출)에서 1971년 5억 5천만 달러까지 연평균 21%의 수출 증대를 계획하였다.

한편, 2차 계획은 변화하는 정치 상황을 반영하여 수정되었다. 1967년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2차 계획의 1년 6개월 단축 완수 의지를 표명하였고, 4월 선거유세 현장에서 ‘대국토건설계획’(大國土建設計劃)의 일부로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천명하였다. 경부고속도로건설안은 건설부 안으로 수용되어 11월 2차 계획에 삽입되었다. 2차 계획은 경제 상황 변화도 반영하였다.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 이후 외자(外資) 도입이 증가하며, 상업차관은 1965년 2,800만 달러에서 1966년 1억 900만 달러, 1969년 3억 6,100만 달러까지 급증하였다. 상업차관은 경제개발 및 수출 공업 육성에 중요 자금으로 활용되었지만 동시에 1969년부터 시설 과잉, 경영부실의 문제로 나타났다. 경제위기와 부실 기업체 문제 속에서 경제기획원은 1969년 11월, ‘안정기반 구축을 위한 종합대책’을 발표하여 고도성장에 따르는 부작용 최소화, 적정 성장률 모색을 강조하였다.

4 1970년대 제3차, 4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제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72~1976년, 이하 3차 계획)은 ‘자립경제’를 향한 기존의 계획을 계승하면서도 수립과정에서 외국계 지원, 투자계획 보다 국내 각 부처 전문성을 반영하는 정책 기획의 성격을 강화했다. 3차 계획은 부문 계획이 완성된 후 경제계획 실무위원회, 조정위원회, 심의회의를 거쳐 완성되었으며, 1971년 2월 국무회의 의결과 대통령 재가를 받아 최종 확정되었다. 3차 계획은 1970년대 초반까지 지속된 경제위기 및 60년대 경제성장 방식의 재조정 분위기 속에서 수립되었다. ‘성장, 안정, 균형의 조화’가 강조되었고, 부문들 간의 균형을 중요시하며 연평균 성장률도 2차 계획 연평균 11.6%보다 낮은 8.6%로 설정되었다. 중점 과제로서 ①주곡 자급, 농어민 소득 증대, ②농어촌 생활환경 개선, ③수출 35억불 달성, ④공업 고도화, ⑤과학기술의 향상과 인력개발, ⑥사회기초시설의 균형 발전, ⑦지역개발 촉진 및 인구 분산, ⑧국민 복지와 생활향상 등이 제시되었다.

3차 계획은 ‘성장’ 측면에서 수출의 획기적 증대와 중화학공업 건설을 제시하였다. 수출은 1970년 8억 82백만 달러에서 1976년 35억 달러로 4배 증가를 계획하고, 제조업에서 중화학공업 비중은 1970년 35.9%에서 1976년 40.5%로 증대하는 목표를 세웠다. 1973년 1월 정부는 중화학공업정책을 선언하여 철강, 비철금속, 기계, 조선, 전자, 석유화학 등 6개 중화학공업을 집중 육성한다는 계획을 구체화하였다.

3차 계획의 성장주도 계획은 1973년 10월 이후 제1차 석유파동의 경제위기가 닥치자 ‘국민생활의 안정과 적정성장’을 추구한다며 일부 수정하는 듯 보였다. 1975년 한국경제의 외환 사정은 극도로 악화되어 국가부도 위기설까지 흘러나오고, 고위 경제 관료들은 해외를 돌며 직접 돈을 빌려야하는 상황에 처했다. 그러나 1976년 중동건설 붐이 일며 해외 공사대금으로 받은 외환이 국내로 유입되었고, 종합무역상사의 성장으로 수출 및 무역수지 개선이 이뤄졌다.

3차 계획은 ‘안정’ 측면에서 농어촌 환경을 근대화하고 지역 균형 발전을 계획하였다. 지나친 농촌 인구 감소, 대도시 인구 급증은 성장을 해치는 사회문제라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농촌 새마을운동 및 농가소득 증대 사업이 강조되었고, 국토건설종합계획을 통해 금강, 영산강, 낙동강, 한강 등 4개강 유역 개발 및 농업용수 확보를 준비하였다.

제4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77~1981년, 이하 4차 계획)은 성장·형평·능률의 이념 하에 자력성장 구조를 확립하고 사회개발을 통하여 형평을 증진시키며 기술을 혁신하고 능률을 향상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경제성장 모델은 이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고, 수출 및 공업화 노선을 강하게 추진하였다. 연평균 목표 성장률을 9.2%로 수립하고, 이를 위한 고용 증대 및 광공업 비중 확대를 추진하였다. 광공업의 경우 전체 산업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1975년 29.7%에서 1981년 40.9%로, 중화학공업 비율은 1975년 42%에서 1981년 50%로 증가하도록 계획하였다. 한편 4차 계획은 경제개발의 부작용을 최소화하고 국민생활의 안정을 기한다는 목표 아래에 ‘사회개발’을 강조하였다. 그렇지만 사회개발의 내용은 도시 및 공장 새마을운동의 확산, 생활개선, 주택건설 등 이전의 안정화 정책과 큰 차이는 없었다.

4차 계획은 성장과 안정, 두 마리의 토끼를 모두 잡으려는 목표를 가졌지만 1979년 제2차 석유파동이 불어 닥치자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였다. 정부는 4월 17일 ‘경제안정화종합시책’을 발표하여 안정 기반 구축을 강조하였고, 4차 계획을 수정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1980년 성장률은 마이너스 5.7%로 떨어졌으며, 통화량 및 물가가 상승하며 실업률이 높아지는 스태그플레이션(stagflation)에 직면하였다. 1970년대 중화학공업 육성정책에 따라 과잉투자 되었던 기업들이 줄도산을 하면서 경제문제는 더 악화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10·26사건으로 사망하고, 12·12 쿠데타 및 5·17비상계엄 전국 확대로 신군부가 정권을 장악하는 등 정치 불안정이 이어지게 되었다.

5 1980년대 이후 정부 주도 경제개발 계획의 쇠퇴

1960~70년대 정부 주도 경제개발 계획의 수립과 집행은 단기간 급속한 공업화 및 경제성장의 토대가 된 것이 분명하다. 저개발 국가에서 한정된 자원을 경제개발 정책자금으로 집중시킨 과정인 동시에 경제개발을 위해 저임금, 저곡가 정책을 지속했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계획상 도농격차 해소, 균형발전을 제시했지만 정부 정책자금의 수출 공업으로의 집중은 결과적으로 산업간, 직종간, 지역간 불균형을 심화시켰다. 1970년대에 들어 1960년대식 경제성장의 한계를 지적하고 사회개발이 강조되었지만 1차, 2차 계획부터 강조되었던 수출 및 공업 중심의 성장주의 관성은 변화하지 않았다.

1979~80년 경제위기와 정치권력의 변화는 경제개발 계획의 양상을 일부 변화시켰다. 신군부는 1980년 기존의 계획 이름을 ‘경제사회발전 5개년 계획’으로 변경하고, 정부주도 경제 운용에 따른 비능률, 소득계층간 불균형 등의 문제 해결, 양적 성장의 패러다임 변화를 강조하였다. 1982년 시작한 경제사회발전 5개년 계획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정부개입, 양적 성장의 측면을 계승하면서도 점차 민간과 시장경제의 원활한 운용을 위한 정부 지원 성격이 강화되었다. 마지막 경제사회발전 5개년 계획이 추진되었던 1992~1996년 기간 동안 한국경제는 경제협력개발기구(Organization for Economic Cooperation and Development, OECD)에 가입하고, 국민소득 1만 달러 시대를 열었지만 다른 한편 한국경제의 양적 성장에 따른 고질적 문제, 즉 높은 외채 의존도, 소득 양극화, 시장에 대한 민주적 견제의 부재는 여전히 해결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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