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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정의 실시(미군정청)

해방과 함께 점령이 시작되다

1945년

군정의 실시(미군정청) 대표 이미지

중앙청에 성조기가 게양되고 있는 모습

전자사료관(국사편찬위원회)

1 개요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미소 합의에 의해 한반도 분할점령이 결정되었고 이에 북위 38도선 이남에는 남한 점령군으로 선발된 미국 육군 24군단이 진주하여 미군정을 설치하였다. 미군정의 기본적인 점령 목적은 일본군을 무장해제하고, 소련의 독자적인 한반도 점령을 막기 위한 보루로 남한을 만든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미군정의 기본적인 정책은 현상유지와 소련과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성격을 띠고 전개되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3년여에 걸친 미군정 통치는 막을 내렸다.

2 해방과 주한미군정의 설치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의 항복이 임박하자 미국은 한반도에 대해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한 미소 분할점령안을 구상했고, 소련이 이 안을 받아들임으로써 남과 북은 해방과 동시에 각각 미국군과 소련군의 점령통치를 받게 되었다. 이에 따라 미육군 태평양사령부 사령관 맥아더(Douglas MacArthur)는 일본으로부터 정식 항복을 받은 후, 1945년 9월 2일 「일반명령 제1호」를 발표해 북위 38도선 이북의 한국에 주둔한 일본군은 소련 극동군 최고 사령관에게, 북위 38도선 이남의 한국에 주둔한 일본군은 미육군 태평양사령부 사령관에게 항복할 것을 지시했다. 곧이어 9월 7일 38도선 이남에 미군정 실시를 선포한 「미육군 태평양사령부 포고 1호」가 발표되었고 , 9월 8일에는 미 육군 24군단이 남한 점령을 위해 인천에 상륙했다.

남한 점령군으로 선발된 24군단은 1944년 4월 8일 하지(John Reed Hodge) 중장을 사령관으로 하여 하와이에서 창설된 뒤, 여러 전투에서 전공을 쌓은 전투부대였다. 소련의 빠른 남하를 견제하기 위해 점령군의 신속한 한반도 이동을 최우선 목표로 삼은 미국 정부와 군부는 순전히 한국으로 가장 빨리 이동할 수 있는 거리에 있다는 물리적인 이유에서 당시 오키나와에 주둔 중이던 24군단을 남한 점령군으로 선택했다. 그런데 미육군 남조선주둔사령관으로 임명된 하지는 민정(民政) 경험도 한국 관련 지식도 전혀 없는 전형적인 야전 지휘관이었다. 그는 상부의 강한 대소(對蘇) 견제의식을 전달받으면서 미군의 남한 점령 목적은 기본적으로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하고, 남한을 소련의 전한반도 점령을 막기 위한 보루로 만들기 위한 것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점령 목적에 따라 한반도에 진주한 하지는 점령 초기에는 기존의 총독부 체제를 그대로 이용하는 것을 구상했다. 하지는 1945년 9월 9일 서울에 진주해 일본군을 무장해제하고 이들의 정식항복을 접수했으며 점령통치를 위해 총독부 체제를 유지하고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 총독을 비롯한 일본 식민지 고위 관료들을 유임시킨다는 방침을 취했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가 한국인들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키자 9월 12일 아베 총독을 해임하고 아놀드(Archibald Vincent Arnold) 소장을 군정장관으로 임명했고 이어 주요 총독부 관료들을 해임시킨 후 그 자리에 미군 장교들을 임명하며 공식적인 미군정청의 수립을 선포했다. 이렇게 수립된 미군정청은 남한 내 민간행정을 담당했으며 주로 점령지역의 행정·경제 관련 업무를 처리했다. 그러나 민사(民事) 업무 전반을 담당했을 뿐 아니라 경찰이 군정청 산하에 있었기 때문에 군정청의 활동은 국내정치와 밀접히 관련을 맺으며 전개되었다.

3 현상유지정책과 우익 주도의 정계개편

점령 초 총독부체제 유지를 계획한 데서 알 수 있듯이 미군정의 초기 한국 통치는 기본적으로 현상유지적인 성격을 띠었다. 이에 따라 최초의 군정기구는 기본적으로 조선총독부 기구를 그대로 답습하여 내각관방(內閣官房)에 총무, 외사, 인사, 기획, 회계, 지방 등의 과(課)를 두었고, 집행기관으로 경무, 재무, 광공, 학무, 농상공, 법무, 체신, 교통 등의 국(局)을 두었다. 또한 한국인들의 반발로 총독부 고위 관료들은 해임되었지만 고문으로 남았고, 일제시기 활동했던 한국인 관료들도 대부분 유임되었다. 비록 이후 미군정 기구는 점령통치의 효율화와 중앙집권화를 위해 획기적으로 개편되었지만 이처럼 점령 초기 새로운 군정 통치기구의 수립은 식민지 통치기구와 연속성 위에서 이루어졌다.

미군정은 또한 현상유지 정책의 일환으로 해방 후 한국인들의 자체적인 정치·사회적 개혁이나 정부 수립 움직임을 모두 허용하지 않았다. 군정장관 아놀드는 1945년 10월 10일, 38도선 이남에는 미군정 외에 어떤 정부도 있을 수 없다는 성명을 발표함으로써 건국준비위원회를 계승해 해방 이후 자치적인 치안, 행정 활동을 벌이고 있던 인민공화국을 부정했다. 일제시기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펼쳤던 대한민국 임시정부 또한 정부 자격의 귀국이 금지되었다. 더불어 점령 직후 각지에 미군을 파견해 인민위원회, 치안위원회 등 해방 이후 나타난 지방의 자생 조직들을 해체하고 일제 식민지 체제를 기반으로 하는 미군정의 직접통치 체제를 구축했다.

한편 점령의 목적이 소련에 대한 보루 구축이라 사고했던 반소·반공적 성향의 미군정은 해방 이후 좌익 세력의 우세를 극복하기 위해 조직적인 우익 육성과 우익 중심의 정계 개편을 시도했다. 10월 5일, 군정장관 아놀드 소장은 주로 우익 정당인 한국민주당 계열 인사들로 이루어진 군정청 고문단을 임명했다. 이들은 대부분 일제시기 친일경력을 가진 보수적인 인사들로 대중적 인기는 없었으나 초기 군정 정책에 적극 참여하며 세력을 넓혔다. 미군정은 이후 이승만, 대한민국 임시정부 등 명망 있는 우익 인사들이 귀국하자 이들을 이용해 한국인들을 대표하는 외양을 갖춘 자문·입법기구 형태의 정무기구를 설치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에 따라 1945년 10월 23일, 이승만을 중심으로 하는 독립촉성중앙협의회가 발족했으며 , 1946년 2월 14일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도로 결성된 비상대표국민회의를 기반으로 하여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이 출범했다. 미군정은 이러한 우익 중심 정계 개편 노력과 함께 1945년 10월의 조선인민공화국 부인, 1946년 1월의 조선국군준비대 해산, 9월의 『조선인민보』 등 좌익계열 신문 정간 등을 통해 좌익 세력을 약화시키고자 시도했다.

4 제1차 미소공위 이후 정책변화와 미군정의 종료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에 따라 미소 협의를 통해 한국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개최된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무기휴회 되자 미국 정부와 미군정은 한국인들의 보다 많은 지지를 확보해 향후 수립될 임시정부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대한정책에 변화를 꾀했다. 이러한 변화의 주요내용은 군정 행정기구에 한국인의 참여를 확대하는 것과 온건 좌·우파, 즉 중간파 정치인을 활용한 정계통합을 이루고 이를 기반으로 새로이 입법자문기구를 구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미군정은 먼저 군정에 한국인 참여를 점차 확대해 최종적으로는 한국인에게 점차 행정권을 이양하는 이른바 ‘군정의 한인화’ 정책을 추진했다. 미군정은 이미 1945년 12월, 각 부서에 미국인과 한국인을 각각 1명씩 국장으로 두는 양(兩)국장제도를 실시했고 1946년 3월 29일, 대폭적인 기구 개편을 단행하며 군정에 한국인을 다수 충원한 바 있었다. 제1차 미소공위 무기휴회 이후 이러한 경향은 더욱 강화되어 1946년 9월 한국인에게 행정권을 이양하겠다는 미군정의 발표가 있었으며, 1947년 2월 5일 안재홍이 민정장관으로 취임한 후 미군정청의 국장, 부장급과 도지사 등 지방고위직에도 한국인사가 충원되며 남조선과도정부가 출범하게 되었다. 이처럼 과도정부가 수립됨으로써 한국인에게 행정권이 이양되었으나 최종적 권한까지 이관된 것은 아니었다. 미군사령부 및 군정장관, 그리고 각 부서에 배치된 미국인 고문들이 여전히 주요 인사의 임면, 법령 포고, 주요 정책을 결정하는 권한과 최종 결재권을 행사했고, 행정권 중에서도 재정, 귀속재산 관리, 원조물자 배분 등 점령통치의 물적 기반과 치안분야에 대한 통제권은 행정권 이양에서 제외되었다.

다음으로 미군정은 기존의 우익 중심 정책에서 벗어나 대표적인 중간파 정치인인 여운형, 김규식을 중심으로 하는 좌우합작운동을 지원했고, 나아가 보다 넓은 대중적 기반을 가진 입법자문기구를 조직하고자 했다. 그러나 좌파를 미군정이 주도한 정무기구에 포섭하려는 시도는 사실은 조선공산당과 그 후신인 남조선로동당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 세력을 고립시키려는 분열정책에 입각한 것이었다. 이에 좌우합작운동은 1946년 5월 정판사 위폐사건, 9월 조선공산당 지도부에 대한 체포령 등 공산당에 대한 탄압 조치와 함께 이루어졌고, 이로 인해 조선공산당 계열의 좌익세력은 좌우합작운동에서 완전히 철수하고 입법자문기구 수립에 참여하지 않았다. 뒤이어 여운형마저 입법자문기구에 참여하지 않음으로써 미군정의 중간파 정책은 결국 우파만의 기구인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의 수립으로 귀결되었다.

이처럼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이후 나타난 미군정의 정책변화는 기존의 반소·반공 노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이었고, 이후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마저 실패로 돌아가고 미소 합의에 의한 한반도 통일정부 수립이 불가능해지자 미군정은 남한만이라도 소련의 영향권에서 지키기 위해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추진하게 되었다. 미국의 제안으로 한국문제가 유엔에 이관되고 소련의 유엔임시한국위원단 입경 거부로 인해 유엔 소총회에서 끝내 남한만의 단독선거가 결정된 상황에서 미군정은 유엔 소총회의 결정을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남한 단독선거를 전폭 지원했다. 이에 따라 1948년 5월 10일, 남한에서는 제헌국회 구성을 위한 총선거가 치러졌고 8월 15일에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며 3년여에 걸친 미군정의 통치는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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