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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실명제

은행 오실 땐 신분증 가져 오세요

1993년

금융실명제 대표 이미지

금융실명제 실시 직후인 1993년 8월 13일의 은행 창구 모습

동아일보

1 개요

금융실명제란 금융기관의 예금이나 증권 매입 등 모든 금융거래를 지어낸 이름이나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하는 것을 금지하고, 거래자 본인의 이름으로 할 것을 의무로 규정한 제도를 말한다. 금융실명제의 필요성은 오랜 기간 동안 논의되어 왔지만, 김영삼 정부 들어서야 제도가 시행됐다. 김영삼 대통령은 1993년 8월 12일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긴급재정명령」을 전격적으로 발표함으로써 금융실명제의 실시를 선언하였고, 이는 김영삼 정부의 가장 대표적인 개혁정책으로 평가받고 있다.

2 금융실명제 유보의 역사

금융실명제에 따라 개인은 금융기관에 예금을 하거나 주식을 사고 파는 등의 일을 할 때 규정에 맞는 신분증을 이용해 주민등록번호와 이름을 확인하고, 회사는 사업자등록증을 이용해 사업자등록번호와 상호를 밝혀 거래당사자를 확인한다. 보통 사람들은 가명이나 차명으로 금융거래를 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금융실명제가 필요하다는 이야기 자체를 의아하게 여겼다. 그러나 부정한 돈거래를 통해 이익을 챙겨온 사람이나 조직이 엄연히 존재했으며, 이러한 소위 ‘지하경제’를 막아 공정한 규칙에 따른 경제활동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제도를 정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많았다.

한국에 금융가명제가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은 5·16 군사 정변으로 집권한 군사정부가 1961년 7월 「예금·적금 등의 비밀보장에 관한 법률」을 제정해 예금과 적금은 물론 주식이나 채권 등 모든 금융자산의 가명 및 무기명 거래를 제도적으로 보장해주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불법이나 부정하게 모인 돈이 금융기관을 거쳐 나오면서 소위 ‘돈세탁’이 손쉽게 이뤄질 수 있었다. 아무리 부정한 돈이라도 은행에 실체가 없는 사람의 이름으로 예금을 하고 주식을 사고 파는 과정을 몇 번만 되풀이하면 자금추적이 어려워 깨끗한 돈으로 바뀌는 것이 가능했다. 돈세탁이 가능하게 되면서 부정부패와 탈법이 확산되는 것은 당연했다. 한국 정부는 각종 금융 사고와 사기 사건 등이 발생할 때면 금융실명제를 실시하겠다고 공약했지만, 잠시 논의되는 체하다가 시간이 지나면 슬며시 자취를 감추는 행태가 되풀이되었다.

금융실명제 실시의 본격적인 논의는 1980년대 대형 금융사고가 되풀이되면서 시작되었다. 금융사기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사건들이 권력과 연관됐으리라 짐작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소위 ‘이철희·장영자 어음사기 사건’이다. 이 사건은 이철희·장영자 부부가 1981년 2월부터 1982년 4월까지 공영토건 등의 회사로부터 편취 또는 차용 형식으로 7111억원에 달하는 어음을 받아 사채시장에서 할인해 사용한 사기 사건으로 처리되었지만, 많은 사람들은 신군부의 정치자금 조달을 위해 치밀하게 계획된 정치적 부정사건이라고 생각했다. 국민들의 의혹이 쉽게 수그러들지 않고, 불만이 높아져가자 전두환 정부가 1982년 7월 3일에 ‘사채 양성화와 관련한 실명거래제 실시와 종합소득세제 개편방안’(이른바 7·3조치)을 발표하면서 금융실명제 실시가 공식적으로 논의되기에 이르렀다. 이에 1982년 12월 31일 「금융실명거래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고, 1983년에는 시행령과 시행규칙이 마련되었다. 그러나 행정 준비상황과 경제여건을 감안해 1986년 1월 1일 이후 대통령이 정하는 날로부터 시행하기로 함으로써 사실상 금융실명제의 실시는 유보되었다.

이후 1987년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공정분배를 통한 경제정의의 실천에 대한 국민 요구가 확대되자 노태우 후보 측이 금융실명제 실시를 선거공약으로 내세웠다. 그리고 집권하게 된 노태우 정부에서는 1989년 4월 11일 재무부 산하에 ‘금융실명거래 실시준비단’을 발족시키며 금융실명제 실시 의지가 확고함을 드러내었다. 그러나 1990년 4월 경제 활성화 대책을 발표하면서 금융실명제 실시를 무기한 연기시키는데, 경제가 어려움에 처해 있는 상황에서 금융실명제가 실시될 경우 우리 경제가 심각한 부작용에 시달릴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처럼 금융실명제는 그 필요성이 계속 이야기됐음에도 한국의 경제여건을 생각해야 한다는 명목 하에 계속 유보되어 왔다.

3 금융실명제 추진 과정

1992년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김영삼 대통령은 임기 초 개혁과 부정부패 척결을 주요 국정지표로 삼고, 공약으로 내세웠던 금융실명제를 다시 추진하기 시작했다. 김영삼 정부는 금융실명제 실시에 앞서 공직자 재산공개를 먼저 실시하고, 이에 따라 사정작업을 벌여나갔다. 그리고 이러한 재산공개와 사정의 실효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금융실명제가 필요하다며 명분을 쌓아나갔다. 당시 공직자 재산공개 내역을 살펴보면 대다수의 정치인이 재산신고액에 비해 예금액은 터무니없이 적은 것으로 나타났다. 많은 정치인들이 돈의 사용내역을 감추기 위해 차명계좌를 사용했기 때문이었고, 정치인들 대다수가 금융실명제 실시를 원치 않았을 것이라고 판단하는 근거가 되었다.

이와 함께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이하 경실련)과 같은 시민단체들이 적극적으로 금융실명제 실시를 지지하고 나섰으며, 많은 국민들 역시 김영삼 정부 초기의 개혁에 큰 기대를 걸고 있다는 점도 중요한 배경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1992년 말부터 경기침체와 경상수지 적자를 이유로 금융실명제실시에 반대하는 그룹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금융기관 단체장들은금융실명제의 단계적 실시와 경제 활성화 우선을 주장했고, 여당인 민자당 내부의 보수 정치인들을 중심으로 금융실명제를 찬성하지 않는 흐름이 이어졌으며, 야당 또한 적극적인 입장이 아니었다. 김영삼 정부 내에서도 경제수석과 재무부장관이 금융실명제 실시에 신중한 입장을 펴는 등 다양한 이견이 존재하는 상황이었다.

김영삼 대통령은 오히려 경제 상황이 좋지 않을 때 금융실명제를 실시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입장에 서 있던 이경식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에게 비밀리에 금융실명제 실시 방안을 연구하여 최대한 빨리 실시할 수 있도록 지시했다. 이경식 부총리는 KDI 연구위원들을 주축으로 작업을 진행했고, 6월부터는 홍재형 재무부장관과 재무부 팀도 금융실명제 실시안 작성에 참여하게 됐다. 이 과정에서 경기회복을 우선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던 경제수석과 국무총리는 배제될 정도로 정부 내에서도 보안을 철저히 하였다.

결국 대부분의 사람들이 1994년 초에야 예고를 거쳐 시행되리라 예상했던 금융실명제는 1993년 8월 12일 대통령의 긴급명령으로 전격 시행됐다. 정확한 명칭은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긴급재정명령’이었다. 이는 경제분야를 담당하는 참모인 경제수석도 예상치 못했고, 여당과 야당 등 모든 정치인들이 논의과정에서 배제될 정도의 전격적인 결정이었다. 국회는 단지 사후조치로 금융실명제를 승인하는 역할을 할 뿐이었다. 그만큼 금융실명제 실시는 많은 사람들에게 예상 외의 충격을 안겨준 사건이었다. 이로 인해 금융실명제실시는 김영삼 대통령의 개인적인 결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김영삼 대통령 개인으로서도 많은 공을 들인 대표적인 개혁정책이 금융실명제인데, 개혁의 필요성에 대한 국민적 합의는 이미 이뤄졌다고 판단되었기에 긴급명령으로 밀어붙일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4 금융실명제의 내용과 한계

1993년 8월 12일에 발표된 긴급재정경제명령으로 실시된 금융실명제의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모든 금융기관과의 거래 시 실지 명의 사용 의무를 규정하였다. 물론 이는 금융기관을 통한 거래에만 국한되는 것으로 개인 간의 거래까지 의무를 부여하지는 않았다. 대부분의 금융 거래가 금융기관을 통해 이뤄지고 있는 현실을 감안할 때, 이러한 규정만으로도 소기의 목적 달성이 가능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실지 명의 사용 여부는 금융기관이 실명 확인 증표를 이용해 확인하도록 했는데, 개인의 경우는 주민등록번호와 이름을 확인할 수 있는 사진이 첨부되어 있는 신분증을 이용하고, 법인이나 각종 단체의 경우는 세무서에서 발급한 사업자등록번호 또는 고유번호 발급 사실 통보문서 등을 이용한다.

둘째, 기존 비실명 금융자산 관련한 처리 방침이 포함되었다. 금융실명제는 과거의 잘못을 들춰내어 처벌하겠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었지만, 성실하게 세금을 부담해 온 선량한 예금주와의 형평성을 고려하여 다음과 같은 조치를 취하도록 했다. 우선 금융실명제 실시 일로부터 2개월 간의 실명 전환 의무기간을 설정하여 기존 비실명 자산 거래자는 이 기간 중에 명의를 본인의 실명으로 전환해야 했다. 그리고 30세 이상의 예금주의 경우 최대 5천만원까지는 자금출처 조사를 면제하였으며, 실명 전환으로 발생하는 법률 위반에 대해서는 1년 내에 시정할 경우 처벌을 면제해 주었다. 부족하게 징수된 소득세에 대해서는 과거 5년간의 부족분을 추징하기로 하였다. 실명 전환 의무기간이 지난 후부터는 비실명에 의한 자금 인출은 금지되었으며, 전환 시기가 늦어질수록 과징금을 부과하였다.

셋째, 긴급명령의 제목에도 포함되어 있듯이 금융거래정보의 비밀보장을 강화하겠다는 의지를 담았다. 이는 국민들이 안심하고 금융거래를 할 수 있도록 만든 조치였으며, 금융정보를 제공할 수 있는 요건과 절차를 좀 더 명확하게 규정해 금융기관은 명의인의 서면상 요구나 동의를 받지 않고서는 금융거래의 내용에 대한 정보 또는 자료를 타인에게 제공하거나 누설할 수 없도록 했다. 또한 예외적으로 정보 제공이 인정되는 경우에도 사용 목적에 필요한 최소한의 범위로 정보 제공을 요청하도록 제한하였으며, 비밀보장 의무를 위반한 경우에 대한 벌칙 조항을 설치했다.

금융실명제 실시 이후 3년이 지난 1996년 12월말 실명예금의 실명 확인율은 98.3%이고, 비실명예금의 실명 전환율은 98.8%로서 대부분 실명이 확인되고, 실명으로 전환된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소득세 탈루 규모가 축소되어 조세 형평성이 제고되었으며, 근로소득 분배 형평은 미세하게 악화됐으나 이자 및 배당 등의 여타소득 분배의 형평성이 개선된 것으로 나타났다. 금융실명제 실시 이후 선거 때만 되면 나타나던 자금 수요의 과열 현상이 발생하지 않게 되었는데, 이는 출처가 불분명한 비자금을 동원하여 금권선거를 치르던 관행이 줄어들었음을 뜻한다. 이러한 변화들은 금융실명제가 정착되어 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금융실명제가 전격적으로 실시된 덕분에 반대세력이 저항할 시간적 여유나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던 것은 분명한 호재였다. 실시 직후 절대적인 여론의 지지에 힘입어 금융실명제 보완에 대한 목소리도 크게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대통령 긴급명령을 일반 법령 체계로 바꾸어 제도적으로 정착시키는 과정이 이루어지지 못하여 이후 금융실명제의 효력이 반감되었다. 이와 같은 후속조치가 이뤄지지 못한 와중에 대북정책의 일관성 결여, 1994년과 1995년의 대형사고 발생 등으로 김영삼 정부 지지도는 점차 낮아졌다. 1995년 6월 지방선거에서 여당인 신한국당이 패배하면서 보수 정치인들이 재계의 불만을 앞세워 금융실명제 보완에 대한 의견을 내세우기 시작했다.

1997년 1월 경기 침체가 심각해지자 금융실명제 보완론자의 주장이 힘을 얻게 되었고, 외환위기를 맞은 11월에 들어서자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는 경제 회생을 이유로 금융실명제 전면 유보를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언론도 금융실명제 보완을 찬성하는 상황에서 국회는 1997년 12월 29일 금융실명제 긴급명령을 대체하는 법안을 확정했다. 금융실명제의 방법과 시기가 잘못되었고, 과거의 잘못에 대해 너무 가혹하게 취급함으로써 경제 정의의 실현보다는 투자와 경제활동 면에서 타격을 주었다는 비판을 받으며 금융실명제는 많이 퇴색될 수밖에 없었다. 또한 2년간 실시됐던 금융소득종합과세가 무기한 유보되면서 금융실명제의 가장 중요한 목적 중의 하나였던 형평 과세라는 목적을 잃게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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