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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기본합의서[南北基本合議書]

탈냉전 시기 남북관계의 기본 틀을 규정하다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 대표 이미지

1991년 남북 기본 합의서 교환

연합뉴스

1 개요

남북기본합의서는 1991년 12월 통일 및 남북간 화해·협력을 위한 기본 원칙과 실천 방향을 명시한 문서다. 정식 명칭은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이다. 남북기본합의서는 직접적으로는 1990년 9월부터 진행된 여러 차례의 남북 고위급 회담의 결과물이며, 1980년대 말 전개된 탈냉전이라는 시대상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남북기본합의서는 분단 이래 최초로 남북한 당국이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국호를 사용한 공식합의서이며, 남북관계 발전에 중요한 전기가 되었지만 1990년대 초 본격화된 북핵문제로 인해 구체적 이행 방안까지는 도출하지 못했다.

2 탈냉전과 남북관계의 변화

1980년대 말 자본주의, 공산주의 진영의 냉전 구도는 붕괴되기 시작했다. 1985년 집권한 소련의 고르바초프(Mikhail Sergeyevich Gorbachev)는 페레스트로이카(개혁)·글라스노스트(개방)를 표방했다. 이는 공산주의 국가에 오랜 시간 누적되어 온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제들을 기존의 체제 및 방법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공산주의 진영의 지도 국가인 소련이 스스로 인정한 것과 다름없었다. 여기에 소련은 아프가니스탄 전쟁(1979~1989년)의 실패로 커다란 정치적·경제적 타격을 입었고, 이러한 일련의 상황은 소련의 공산주의 진영 내 지도력을 떨어뜨렸다. 이에 따라 폴란드, 헝가리, 동독, 체코슬로바키아 등 동유럽 공산 국가에서는 체제 변혁 요구가 빗발쳤고, 1989년을 전후하여 동유럽의 공산 정권은 연쇄적으로 붕괴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국제정세의 변화는 한반도 정세에도 밀접한 영향을 주었다. 1970년대 초 ‘데탕트’ 국면에서 남과 북이 상호 접근하여 7·4 남북공동성명을 도출해낸 것과 유사하게, 탈냉전이라는 국제적인 전환의 흐름은 남북대화와 관계 개선을 위한 새로운 기회를 창출했다.

노태우 정부는 1988년 7월 ‘민족자존과 통일 번영을 위한 대통령 특별선언’(이하 7·7선언)을 발표했다. 7·7선언은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실천 방안으로 남북 동포간 상호교류 및 왕래를 위한 문호 개방, 이산가족 문제의 적극 해결, 남북간 교역 개방, 남북간 대결 외교 지양 등을 제시했다. 7·7선언은 북한을 적대와 경쟁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민족의 일부로 포용하고, 상호 신뢰 구축을 바탕으로 공동 번영을 추구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이어서 노태우 정부는 1989년 9월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을 발표했다.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은 남과 북이 중간 단계 없이 하나의 국가로 단번에 통일을 이룩하는 것이 아니라 과도적 단계로서 ‘남북연합’을 구성, 남북 간 교류와 협력을 실현하여 상호 이해와 동질성을 제고할 것을 선결 과제로 제시했다.

1990년에는 남북의 교류와 협력을 실질적으로 활성화하기 위한 구체적인 제도적 장치들도 마련되었다. 1990년 8월에 ‘남북교류협력에 관한 법률’과 ‘남북협력기금법’이 시행되었고, 통일원 장관을 부총리급으로 승격시켜 그 위상을 강화했다.

북한은 동유럽 공산권의 붕괴와 남한의 ‘통일 공세’에 대해 염려와 의구심을 가지면서도 급격히 변화되는 국제 정세 및 한반도 정세에 대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북한은 1960년 처음으로 연방제 통일방안을 제시했고, 1980년 10월 조선로동당 제6차 당대회에서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방안’을 공식적인 통일 방안으로 내놓았다. 1980년대 말 북한은 기존의 연방제 통일방안을 계속 고수하면서도, 두 개의 조선 반대 및 통일 지향, 외국군 철수, 남북 군축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포괄적 평화방안’을 발표했다. 또한 1990년 5월에는 김일성 주석 시정연설을 통해 남북 자유왕래와 전면 개방, 평화통일을 위한 남북대화의 발전 등을 내용으로 하는 ‘조국통일 5개 과제’를 발표했다. 북한이 이렇게 행동한 까닭은 국제적으로 냉전이 해체되고, 남한이 적극적으로 남북대화와 상호 교류를 주장하는 상황 속에서 북한이 계속하여 대결적 자세를 고수한다면 고립을 자초할 가능성이 있었고, 북한은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 어떤 식으로든 남북대화에 응하고 남북관계의 새로운 문법을 정립하는 데 참여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3 남북기본합의서의 체결 과정과 주요 내용

이러한 배경 속에서 남북은 상호 접근의 필요성에 공감대를 형성했다. 1988년 11월 북한 은 남북 각각 부총리급을 단장으로 하는 정치·군사 회담을 제의했고, 남한은 그에 대한 답으로 남북관계 개선 문제를 포괄적으로 논의할 고위급 당국자 회담을 제의했다. 이를 논의하기 위해 1989년 2월 예비회담이 개최되었으나, 한·미 팀스피리트(Team Spirit) 연합훈련 및 문익환 목사 방북 사건 등으로 논의가 중단되었다. 이후 남북은 다시 접촉을 재개해 1990년 7월 회담의 의제 및 시기, 장소를 합의한 후 1990년 9월부터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고위급 회담을 진행했다. 남북고위급회담은 남과 북의 총리를 수석 대표로 했으며, 1992년 10월까지 8차에 걸쳐 진행되었다.

회담은 일단 1990년 12월까지 3차에 걸쳐 진행되었으나, 북한이 1991년 1월 발생한 걸프전쟁과 3월에 이루어진 팀스피리트 훈련을 구실로 회담 중단을 일방적으로 선언하면서 1년 가까이 교착 상태에 빠졌다. 그러나 북한의 전통적 우방인 소련과 중국이 한국과 관계 개선에 나서고, 1991년 9월 남한과 북한이 유엔(UN)이 동시 가입하는 등의 정세 변화 속에서 북한이 경직된 태도를 계속 유지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중단되었던 회담은 1991년 10월 평양에서 4차 회담이 열리면서 재개되었다. 회담 과정에서 한국과 미국은 북한의 보다 전향적인 태도를 유도하기 위해 몇 가지 조치를 취했다. 1991년 11월 남한의 핵포기정책 선언, 1991년 12월의 남한 배치 미군 전술핵무기 철수 선언 등이 이에 해당한다.

그 결과 1991년 12월 서울에서 열린 5차 회담에서 남북한은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의 전체 내용에 합의할 수 있었고, 1992년 2월 평양에서 열린 6차 회담에서 양측 수석대표가 이에 서명함으로써 합의서의 효력이 발생하게 되었다.

합의서는 남북관계를 포괄적으로 규율하는 서문, 4장 25조에 걸친 세부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합의서는 남북관계를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로 규정했다. 즉 남북관계는 일반적인 외교 관계의 틀 속에서 규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닌 민족 내부의 특수관계이며, 분단국을 구성하고 있는 두 정치 실체 간의 관계를 의미한다.

제1장 ‘남북화해’는 남북관계의 일반 원칙에 관한 내용이다. 남북은 상대방의 체제에 대한 인정과 존중(제1조), 상대방의 내부 문제에 간섭하지 않을 것(제2조), 상대방에 대한 비방 및 중상의 금지(제3조), 상대방을 파괴·전복하는 행위의 금지(제4조) 등을 규정했다. 또한 1953년 정전협정 발효 이래 지속되고 있는 정전 상태를 공고한 평화상태로 전환시키기 위해 공동으로 노력하되 그러한 평화 상태가 이루어지기까지 현 군사정전협정을 준수할 것(제5조), 남북 상호간 긴밀한 연락과 협의를 위해 합의서 발효 후 3개월 내 판문점에 남북연락사무소를 설치·운영할 것(제7조) 등에 합의했다.

제2장 ‘남북불가침’은 군사 분야의 합의사항을 담았다. 상대방에 대해 무력을 사용하거나 무력 침략을 하지 않을 것(제9조), 남과 북의 불가침 경계선과 구역은 1953년 7월 27일자 군사정전에 관한 협정에 규정된 군사분계선과 지금까지 쌍방이 관할하여 온 구역으로 할 것(제11조), 상호 불가침의 이행과 보장을 위하여 합의서 발효 후 3개월 안에 남북군사공동위원회를 구성할 것(제12조), 우발적인 무력충돌과 그 확대를 방지하기 위해 쌍방 군사당국자 사이에 직통전화를 설치할 것(제13조) 등을 규정했다.

제3장은 ‘남북교류·협력’이다. 민족경제의 통일적이며 균형적인 발전과 민족 전체의 복리향상을 도모하기 위해 자원의 공동개발, 물자교류, 합작투자 등의 경제교류 및 협력을 실시할 것(제15조), 민족구성원들의 자유로운 왕래와 접촉을 실현할 것(제17조), 이산가족의 자유로운 서신 거래와 왕래와 상봉 및 방문을 실시하고 자유의사에 의한 재결합을 실현할 것(제18조), 끊어진 철도와 도로를 연결하고 해로, 항로를 개설할 것(제19조) 등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교류를 위한 실천 방안을 담았다. 제4장 ‘수정 및 발효’는 쌍방 합의에 의해 합의서의 수정 보충이 가능하며(제24조), 합의서의 효력발생시점에 대한 규정(제25조) 등을 담았다.

4 남북기본합의서 체결 이후 상황과 역사적 유산

남북기본합의서는 첫째, 남북관계의 특수한 성격을 규정하고 명문화했고, 둘째, 통일의 전제 조건이 남북간의 화해와 협력임을 규정하고 그러한 화해·협력 단계에서의 남북관계를 규율했고, 셋째, 한반도 문제를 당사자인 남북한 주도로 해결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합의서는 탈냉전 이후 새로운 국제정세에 따라 변화될 남북관계의 로드맵이라 할 수 있으며,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과정에서 중요한 기준점을 세운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남북기본합의서는 곧바로 실천으로 옮겨지지는 못했다. 합의서는 원칙적인 사항들로 구성되어 있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남북이 정치, 군사, 교류협력 등의 각 분과에서 합의서 이행을 위한 구체적 실행 방안을 도출해야 했지만, 이를 위해 1992년 3월부터 12월까지 남북간에 개최된 분과위원회 회의는 합의를 도출하지 못했다. 여기에다 ‘북핵 위기’가 본격화되면서 합의서의 실천은 더욱 어려워졌다. 1992~1993년 국제원자력기구(IAEA)는 북한의 핵개발 의혹을 제기하면서 북한의 핵시설에 대한 사찰을 진행했고, 1993년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PT)을 탈퇴하면서 한반도 안보 위기가 고조되었다. 북핵 위기가 증폭되는 가운데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까지 남북의 짧았던 긴장 완화 국면이 끝나고 다시금 갈등이 표면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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