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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체제

20세기의 중·후반의 세계 질서

미상

냉전체제 대표 이미지

한반도를 양분한 38도선

전자사료관(국사편찬위원회)

1 개요

2차대전 직후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 진영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공산주의) 진영 간의 이데올로기(이념) 대결을 기반으로 형성된 국제 질서를 지칭한다.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양 진영간 대립은 냉전 기간 세계 질서를 움직인 핵심적인 힘이었으며, 각국의 시민들은 정치·경제·사회·문화를 망라하는 다양한 영역에서 광범위한 ‘비(非)평화’ 상태를 경험했다.

2 냉전의 정의와 기원

‘냉전(cold war)’이라는 용어가 널리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947년경이다. 1947년 4월 당시 트루먼(Harry S. Truman) 미국 대통령의 고문이었던 바루크(Bernard Baruch)가 최초로 공식 석상에서 ‘냉전’이라는 개념을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같은 해 미국의 언론인 리프먼(Walter Lippman)이 『냉전. 미국 대외정책 연구(The Cold War. A Study in US Foreign Policy)』 라는 제목의 논문을 출간하면서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양 진영의 대결 구도를 ‘냉전’으로 지칭하는 용례가 대중적으로 확산되었다.

냉전은 물리력을 동원한 직접적인 무력 충돌을 의미하는 열전(hot war)에 대비되는 용어로서, 병력과 무기를 동원하여 맞붙는 일반적인 의미의 전쟁은 아니지만, 사실상 전쟁을 방불케 하는 대결·긴장 상태가 유지되는 상황을 의미한다. 냉전 기간 미국 중심의 자본주의 진영과 소련 중심 사회주의 진영은 자기 진영 전체의 무력을 총동원한 세계대전을 벌이지는 않았지만, 전면전을 제외한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 상대 진영을 약화시키고 자기 진영의 결속력을 강화하고자 노력했다.

이처럼 ‘전면적인 무력 대결 없는 대결 상태’가 ‘냉전’ 개념의 핵심적 의미라고 볼 수 있겠으나, 냉전 기간 한반도를 포함한 탈식민 지역, 제3세계에서는 ‘열전’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서구 강대국들과 소련의 직접적인 대결 무대였던 유럽에서는 냉전 기간 직접적인 무력 충돌은 없었던 데 반해, 2차대전 이후 등장한 신생 독립국의 대부분이 모여 있었던 아시아·아프리카지역에서는 자본주의·사회주의 이념 대립으로 무수한 전쟁과 무력 대결이 발생했다. 한반도에서 벌어진 6·25 전쟁(1950~1953),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벌어진 베트남전쟁(1946~1975)은 냉전 시기 발생한 열전의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이 때문에 ‘냉전’이라는 개념 자체가 지나치게 미국 및 유럽 중심적이라고 비판하는 학자들도 적지 않다.

그렇다면 냉전이 발생하게 된 근본적인 원인, 다시 말해 냉전의 ‘기원’은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냉전의 기원에 대한 주장은 크게 셋으로 나뉜다. 첫째, 소련의 팽창주의가 냉전의 원인이라는 주장이다. 소련이 세계 혁명을 통한 사회주의의 전 세계적 확산을 꿈꾸었고, 이러한 소련의 호전성과 ‘야욕’이 냉전을 불러온 핵심 원인이라는 것이다. 둘째, ‘첫째’와는 반대로 미국이 냉전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에 따르면 소련은 2차대전 직후 전쟁의 참화로 팽창과 정복을 꿈꿀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오히려 미국이 지속적인 시장 확보를 위해 소련에 대해 공격적이고 비타협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냉전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셋째, ‘첫째’ 및 ‘둘째’ 주장에 대한 일종의 대안적인 주장으로, 미국과 소련의 서로의 의도에 대한 ‘오해’ 및 잘못된 판단이 결국 냉전을 불러왔다는 것이다. 냉전이 끝난 이후 각국의 문서고가 열리며 새로운 사료들이 계속 등장하고 있으므로, 이에 대한 역사학적 연구를 통해 냉전의 원인을 보다 명확하게 밝힐 수 있을 것이다.

3 냉전의 전개 과정

2차대전 기간 미국과 소련은 일시적인 동맹 관계를 형성했다. 2차대전 발발 이전 미국과 소련은 전반적으로 불편한 관계였다.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제정 러시아가 무너지고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서자 미국은 영국, 프랑스, 일본 등과 함께 혁명을 저지할 목적으로 시베리아에 간섭군을 파병했고, 1933년 루즈벨트(Franklin D. Roosevelt) 정권기에 와서야 뒤늦게 소련을 외교적으로 승인할 정도였다. 그러나 1939년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며 2차대전을 시작하고, 뒤이어 1941년 독-소 불가침조약을 깨고 소련을 침공하자 상황은 달라졌다. 미국과 소련은 나치 독일이라는 공동의 적을 격퇴하기 위해 영국·프랑스 등과 함께 연합국을 형성했고, 결국 2차대전을 승리로 이끄는데 성공했다. 영국, 프랑스 등 ‘구 제국주의 국가’들이 승전국임에도 전쟁 기간 국가 역량을 크게 소진하며 주춤한 사이 미국과 소련은 전후 질서를 좌지우지하는 초강대국의 반열에 올랐다.

그러나 미-소의 ‘일시적’인 동맹 관계가 깨지면서 냉전이 본격화되었다. 1945년 종전 직후 미국 정부와 군부 내에서는 전쟁 이전의 반공주의와 대소 경계심이 되살아나기 시작했으며, 소련 또한 미국의 태도 변화를 감지하며 점점 공격적 태도를 취했다. 미-소 관계가 점점 악화하는 가운데, 1947년 3월 미국이 공산주의에 맞서 싸우는 국가들에 대한 원조를 공개적으로 천명하는 ‘트루먼 독트린(Truman Doctrine)’을 발표하면서 냉전은 공식화되었다. 이에 맞서 소련도 1947년 9월 정권의 2인자 즈다노프(Andrei Zhdanov)의 입을 빌려 세계를 미국 중심의 “제국주의적 반민주주의 진영”과 소련 중심의 “반제국주의적 민주주의 진영”으로 양분하는 ‘두 개의 진영론’을 발표하며 맞섰다. 냉전이 표면화하는 과정에서 동유럽, 중국, 한반도 북부 등의 지역에는 사회주의 정권이 수립되며 소련과 더불어 ‘제2세계(공산권)’를 형성, 미국 중심의 ‘제1세계(서방 자본주의 진영)’와 대결구도를 형성했다.

1950~60년대 일련의 사건들은 양 진영 사이의 대립선을 더욱 선명하게 했다. 1950년 발발한 6·25 전쟁은 냉전 시기 최초로 벌어진 열전으로, 냉전이 언제라도 대규모 병력과 무기를 동원한 물리적인 전쟁으로 비화될 수 있음을 전 세계에 일깨워 주었다. 1950년대 중반 스탈린(Joseph Stalin)을 이어 소련의 지도자로 등장한 흐루쇼프(Nikita Khrushchev)가 ‘평화공존론’을 내세우면서 냉전의 긴장이 일시적으로 이완되는 듯 했지만,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는 미-소 대립이 언제든 전 세계를 핵전쟁으로 몰아넣을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양 진영의 대립 구도는 1970년대 초 이른바 ‘데탕트’라는 국제적인 긴장 완화 정세를 만나며 변화를 맞게 된다. 미국과 소련의 대립이 근본적으로 해소된 것은 아니었지만, 데탕트를 거치며 기존의 양극적인 냉전 질서는 상대적으로 다극화되는 양상을 보였다.

이러한 변화를 불러온 요인 중 하나는 ‘제3세계’의 등장이다. 2차대전 패전국의 식민지는 종전 직후에 대부분 독립했지만, 영국·프랑스 등 승전국의 식민지는 상당수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식민지 독립에 대한 요구는 시간이 지날수록 강렬해졌고, 그 결과 1950~60년대를 지나며 아시아·아프리카 지역의 다수 식민지들이 독립하여 국제 무대에 등장했다. 이들 중 상당수 국가들이 ‘중립’을 표방하며 미국과 소련 양대 진영의 어느 한 편에 서기를 거부했고, 반둥회의(1955), 비동맹회의(1961)를 개최하며 독자적인 정치세력화를 도모했다.

미국은 베트남전쟁의 실패로 냉전 전략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은 남베트남과 동남아시아의 공산화를 방지하기 위해 1960년대 초반부터 막대한 군사력과 재정을 투입하여 베트남전에 개입했지만 큰 희생만을 남긴 채 물러나야 했다. 미국은 베트남에서 실패를 겪으며 대외적 개입을 대폭 축소하는 등 근본적인 정책 변화를 모색했다.

소련-중국의 대립과 그 반대 급부로 이루어진 미국-중국의 관계 개선도 중요한 요소였다. 1950년대 중반부터 중국이 소련의 평화공존론을 비판하자 양국은 불편한 관계로 접어들었고, 1960년대 들어서는 서로를 공개적으로 비난하고 국경에서의 무력 충돌까지 겪었다. 소련-중국의 대립으로 인해 미국과 중국이 ‘소련 견제’라는 공동의 이해관계를 갖게 되었고, 이는 1970년대 초반 양국 간 최초의 정상회담 등 관계 개선 노력으로 이어졌다. 소련과 더불어 공산권의 양대 강국이었던 중국의 이러한 행보는 기존의 양극적 냉전 질서를 흔들어 놓았다.

1979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으로 데탕트 분위기가 깨지면서 다시금 양 진영간 첨예한 대립의 분위기가 연출되기도 했지만, 1980년대 들어 냉전의 와해는 가속화되었다. 소련은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실패, 과도한 군비 지출, 누적된 경제 위기 등 다방면의 위기에 시달리고 있었고, 이에 1985년 집권한 고르바초프(Mikhail Gorbachev)는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트(개방)’을 선언하며 개혁에 착수했다. 소련의 변화는 동유럽 국가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고, 1989년을 전후한 시기 동유럽의 사회주의 정권은 연쇄적으로 붕괴했다. 1990년에는 동독이 서독으로 통합되면서 유럽 냉전의 상징이었던 독일의 분단 문제가 해결되었으며, 1991년에는 소련이 해체되면서 냉전이 종식되었다.

4 냉전체제와 한국현대사

한반도는 냉전체제의 영향을 가장 직접적이고 깊게 경험한 지역 중 하나이다. 1945년 해방 직후 38선을 경계로 남쪽에는 미군이, 북쪽에는 소련군이 임시적으로 주둔했다. 1946년까지 미국과 소련은 미소공동위원회를 통해 타협적인 방식으로 통일 한국 정부를 수립하는 방안을 모색했지만, 1947년 양국이 냉전에 들어서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1947년 미국은 자신이 유리한 유엔(UN)에 한국의 정부 수립 문제를 상정했고, 소련과 북한의 거부 속에 1948년 5월 유엔 감시 하에 남한만의 총선거가 치러졌다. 결국 1948년 8월에는 대한민국 정부가, 9월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가 수립되며 분단 체제가 도래했다.

6·25 전쟁은 냉전기 양 진영의 대리전이었다. 미국은 자본주의 진영 국가들과 함께 유엔군을 조직하여 대규모로 참전했고, 공산 진영에서는 중국의 대규모 파병 및 소련의 배후 지원이 이루어졌다. 3차 세계대전으로의 확대를 바라지 않았던 양 진영은 전쟁을 한반도 안으로 제한했고, 결국 전쟁은 남북한의 분단선을 38선에서 휴전선으로 바꾼 채 정전협정 체결이라는 불완전한 결말로 마무리되었다.

냉전체제는 한반도 주민들의 삶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고, 그 영향은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냉전체제는 남북한에 독재정권이 등장하는 핵심적인 배경을 제공했고, 국제적 차원에서 냉전이 종식되었음에도 한반도의 분단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냉전체제의 마지막 유산 중 하나인 한반도의 분단 질서를 어떻게 평화 질서로 전환할 것인지 깊은 고민과 노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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