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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체제의 종식과 북방외교

경계를 넘어선 교류의 확대, 적(敵)에서 친구로

미상

냉전체제의 종식과 북방외교 대표 이미지

노태우 대통령의 북방 외교와 한국-소련 수교

우리역사넷(국사편찬위원회)

1 개요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당선된 대통령 노태우는 공약으로 대(對)공산권 외교를 약속하였다. 이후 노태우 정부는 1988년 7·7선언을 통하여 남북교류 및 대공산권(사회주의권) 외교정책의 기조를 공식화하였다. 북방외교 또는 “북방정책”의 출발점이었다. 한국 정부가 북방외교를 시행할 수 있었던 것은 1980년대 후반 이래 뚜렷한 국제정세 전환이 나타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공산권 국가들이 체제 개혁과 개방을 선언하였고, 독일이 통일되었으며, 1991년 소련이 해체되면서 냉전체제가 종식되는 것처럼 보였다. 노태우 정권기 북방외교는 국제환경의 변화 속에서 소련과 중국을 포함한 사회주의권 국가와 관계 개선을 도모하고 한반도 평화를 위해 남북관계 개선과 통일을 현실화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1989년 2월 헝가리와의 국교 수립을 시작으로 1992년 8월 한중수교로 마무리된 북방정책은 사회주의권과의 정치‧경제적 교류 확대는 물론 남북관계 개선에 긍정적인 변화를 촉진한 결과 국내외적으로 안정적인 외교(경제)‧안보 조건을 형성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

2 ‘사회주의 형제국’의 문을 두드리다 : 동유럽과의 관계 정상화와 북방외교의 성과

냉전이 시작된 이후 한국은 공산권에 속한 동유럽 국가들과 전혀 교류를 할 수 없었다. 서로 다른 진영에 속해있었고, 공산권 국가들은 북한을 일방적으로 지지하였기 때문이었다. 1960년대 까지 한국과 북한은 서로 상대 정부를 인정하는 국가와 수교 하지 않는다는(할슈타인 원칙) 기조를 유지하고 있었다. 1970년대 초반 국제환경에서 데탕트 분위기가 고조되었을 때 한국 정부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사실상 실패로 끝난 남북대화에 그쳤다. 동유럽 국가들과 교류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된 것은 1980년대 후반에 공산권이 붕괴하고 사회주의 국가들이 체제 개방을 하면서부터였다. 소련에서 1985년에 고르바초프가 지도자로 등장하여 개혁(“페레스트로이카”)과 개방(“글라스노스트”)을 외치면서 새로운 대외정책을 표방하자, 양 진영의 대립 구도는 무너지고 교류와 대화의 장이 마련되었다. 한국 정부도 이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면서 소련, 중국, 동유럽 국가들과 관계 정상화를 추진하기 시작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은 동유럽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동유럽 국가들이 서울올림픽에 참가하면서 자연스러운 접촉 기회를 가질 수 있었고 한국 정부는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동유럽 국가들도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되었던 한국의 경제발전을 직접 경험하면서 인식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었다. 노태우 정부는 동유럽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을 통하여 모든 사회주의 국가와 경제 파트너쉽을 맺어 한국 경제의 성장과 발전에 기여할 수 있도록 하는데 외교적 초점을 두었다.

1989년 동유럽혁명으로 동유럽 각지에서 사회주의 체제가 붕괴하고 체제 변혁을 시도하였다. 이를 계기로 소비에트 연방 체제가 해체되고 공산주의 이데올로기 붕괴, 양극체제의 종식이 가속화 되어 종국에는 냉전의 종식을 예견하였다. 1991년 소련의 붕괴가 공식적인 냉전구조 해체의 시발점으로 분석되고 있지만, 1990년 동독과 서독의 통일은 사실상 첨예했던 냉전의 종식을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한국 정부와 처음으로 교류를 시작한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는 헝가리였다. 한국은 1987년부터 헝가리와 경제 교류를 시작하면서 무역사무소를 설치하였고, 서울올림픽 직후 공식 외교관계를 개설하기로 합의했다. 헝가리는 과거 공산주의 국가로서 한국과 공식적인 수교를 맺은 첫 번째 국가였다. 1989년 2월 한국과 헝가리와의 국교가 수립되자 북한은 과거 ‘사회주의 형제국’이었던 헝가리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노태우 정부의 북방외교는 북한에 부담을 주기 위한 것이었고, 실제로 효과가 있었다. 소위 ‘사회주의 형제국’들이 한국과 수교를 맺으면서 북한의 대외정책에 차질이 빚어졌고, 결국 북한이 국제적으로 고립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한국은 동유럽 국가들과 공격적으로 관계 개선에 나섰다. 1989년 11월 폴란드, 동년 12월 유고슬라비아, 1990년 3월 체코슬로바키아, 불가리아, 루마니아, 1991년 8월 알바니아와 수교하는 등 동유럽 7개국과 모두 외교관계를 정상화했다. 한국과 동유럽 수교국 사이에 교류가 확대되면서 대통령을 비롯한 행정 관료의 상호 방문이 확대되었다. 특히, 한국과 동유럽 국가들은 경제 부분에 집중하면서 무역과 과학기술 등 주요 의제에 대한 상호 간의 협력을 강조하였다. 한국 정부는 동유럽 각국과 다양한 협력을 약속하면서 경제적 교류를 추진했다. 폴란드와는 자동차 제조공장 건설 합의, 정보통신 및 여타 산업 분야 투자를 합의했다. 체코슬로바키아와는 체코 국영기업 민영화에 한국 기업 참여와 투자를 가능하게 하였다. 동유럽 국가들과 교역이 확대되면서 한국의 수출이 급증했는데 주요 수출품은 전자제품, 직물, 섬유, 기계류 등이었다. 국내 대기업들도 동유럽을 중심으로 서유럽에 진출하고자 폴란드, 체코 등에 투자를 확대하였다. 한국 기업들은 동유럽 국가들의 저렴한 노동력과 양질의 기술인력, 관세 혜택을 활용하여 유럽 전체를 공략하고자 하였다.

1989년 헝가리와 수교를 시작한 이래 한국과 동유럽 간 교류는 정치·경제·문화로 확대되었지만, 궁극적으로 북방외교는 소련과 중국과 수교를 목표로 한 것이었다.

3 소련의 붕괴와 한·소수교

북방외교의 목표가 한반도 평화와 안정을 위해 이념과 체제를 달리하는 사회주의 국가들과 관계 개선에 있다는 점에서 소련과 중국은 가장 중요한 국가였다. 북방외교의 성패가 소련, 중국과 관계 개선 성공 여부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1985년 고르바초프의 등장과 ‘신사고’ 외교정책*은 기존 냉전 구도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고, 1989년 동유럽혁명을 시작으로 헝가리, 폴란드 등 나라들이 체제 변혁을 시도하면서 국제정치 환경에 급격한 변화가 시작되었다. 1990년을 기점으로 소련을 중심으로 했던 소련-사회주의 국가들의 군사‧경제 연합체가 해체되면서 ‘사회주의 형제국’에 대한 소련의 부담은 줄어들었고, 각 사회주의 국가들은 점차 소련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 고르바쵸프의 신사고 외교의 핵심 내용은 ‘탈이데올로기’와 ‘군사보다 경제 우선’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소련이 동아시아 지역문제에 정당한 이해관계를 가진 아시아 태평양 국가임을 강조하고, 집단안전보장기구와 경제협력체제를 바탕으로 한 새로운 국제 질서를 동아시아에 형성하자는 것은 한국에 적용된 신사고 정책이었다.

소련의 태도 전환은 정치‧외교적 관계 변화에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했다. 즉, 소위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로 한국의 북방정책이 입안될 수 있는 국제환경이 마련되었다. 또한 소련이 아시아태평양지역에 군축을 시작하고, 중국과 적대적인 관계를 개선하면서 아시아 태평양지역에 일정한 안보적 안정기가 찾아왔다. 국내적으로는 1987년 민주화운동에 이어 통일운동이 대두되면서 한반도 안보와 남북관계 개선은 시대적 요구로 받아들여졌다. 노태우 정부는 국내외적 정세 변동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면서 사회주의 국가들의 중심인 소련과 공식적인 관계 개선에 나설 수 있었다.
  * 1986년 이후 소련의 고르바초프 정권이 추진하였던 정책의 기본 노선. 국내적으로는 민주화·자유화를, 외교적으로는 긴장 완화를 기조로 한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기점으로 소련 영사단이 한국을 방문한 이래 한‧소 경제 교류가 시작되었고 1990년 3월 소련에 대한민국 영사처, 한국에 소련 영사처가 개설되어 정치‧경제적 교류가 본격화되었다. 특히, 1990년 6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노태우 대통령과 고르바초프가 정상회담을 가진 후 동년 10월 한‧소 외교관계가 수립되었다. 이후 2차례의 정상회담이 모스크바와 제주도에서 차례대로 열리면서 한‧소 관계가 급속히 진전되었다.

한국과 소련의 관계 개선은 상호 간의 필요성에 의해 급속히 발전할 수 있었다. 당시 소련이 겪고 있는 경제적 어려움은 한국과의 관계 개선을 통해 통상은 물론 차관까지 얻을 수 있는 기회로 작용했다. 한‧소 수교 이후 소련은 한국으로부터 30억 달러 차관제공을 약속받고 1992년까지 약 15억 달러를 집행 받았다. 또한 소련은 한국과 수교를 맺으면서 한반도 안정화에 기여하고 극동지역 국경 안정에 기여할 수 있었다. 한국 입장에서 소련과의 수교는 정치적 요인이 강하게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은 소련과 수교하면서 한반도 긴장 완화에 기여하고, 소련의 정치적 위상을 통한 국제사회에서의 지위 공고화, 소련을 통한 북한에 대한 영향력 제고 등 궁극적으로 한반도 평화를 중심으로 한 정치적 실리 획득이 가능해졌다. 또한 한‧소 수교는 한‧중 수교의 촉매제 역할을 하게 되면서 중국과의 관계 개선이 현실화되었다.

4 한·중수교와 남북한 UN 동시 가입

중국은 1970년대 데탕트 이래 국제무대로 조금씩 진출하고 있었다. 특히 최고지도자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정책이 본격화되자 중국은 눈에 띄게 변화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국과의 관계는 민간을 통한 비공식 교류에 그치고 있었다. 우방국인 북한을 배려한 중국의 입장 때문이었다. 중국이 한국과 교류가 확대될수록 북한과의 관계가 악화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중국은 공식적인 외교관계 수립에 소극적이었다.

그러나 중국은 새로운 국제정치 환경의 변화에 따라 동아시아에서 자국의 역할을 강화하고 싶었기 때문에 한국과의 관계도 개선할 필요가 있었다. 한국과 중국은 1986년 아시안게임, 1988년 올림픽을 계기로 교류 분야가 점차 확대되었고, 한국 정부는 대만과의 단교를 준비했다. 스포츠 교류와 무역 증대로 양국 관계의 정상화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1989년 한·중 간 무역량이 31억 달러에 달하면서 중국은 중앙 차원 무역사무소 설치를 한국에 제의했고, 1991년에야 양국에 무역 대표부가 개설되었다. 중국과의 수교는 풍부한 자원을 보유한 국가가 지리적으로 인접하여 있다는 경제적 이점을 얻는 효과를 가져왔고, 이는 향후 중국이 한국의 최대 무역 상대국으로 등극한 데서 확인되었다.

또한 중국과의 관계 개선은 한국의 유엔(UN) 가입으로 이어졌다. 그간 한국의 유엔 가입 의사는 번번이 퇴짜를 맞았는데, 남북한 단일 가입을 주장하는 북한의 입장과 그에 대한 소련·중국의 동의 때문이었다. 한국이 1973년부터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을 주장한 데 반해, 북한은 ‘고려연방공화국’의 단일 가입을 주장해 왔다. 한·소 수교 이후 소련은 한국이 제출한 개별적 유엔 가입신청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을 것을 분명히 했다. 문제는 중국이었다. 한국의 북방정책이 등장한 1989년 11월에도 한국이 유엔 단독 가입신청 했을 때 중국은 북한의 입장을 지지했다.

그런데 중국은 국제환경의 변화와 한국과 경제 교류가 확대됨에 따라 1990년에 들어서면서 남북한 유엔 가입문제는 남북한이 상호협의해서 해결해야 할 문제라는 표현을 쓰면서 사실상 북한 지지 입장에서 후퇴하였다. 남북 간의 협의가 지지부진한 가운데 1991년 3월 한국의 이상옥 외무장관이 중국의 지지 여부와 관계없이 유엔 가입을 강행할 것임을 선언하자 중국 정부는 북한을 설득하여 남북한 동시 유엔 가입이 성사되었다. 1991년 9월 17일(18일 한국시간) 제46차 유엔총회에서 남북한은 동시에 161번째 유엔 가입국이 되었다.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은 한·중 수교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남북한이 유엔 가입국이 되자 남북한이 상호를 공식적으로 인정하면서 중국은 새로운 단계의 관계를 정립시킬 수 있었다.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 이후 한국은 중국에 수차례 수교회담을 제의했고 1992년 4월 국교정상화 회담을 시작으로 2차례의 외무장관 회담 이후 1992년 8월 24일 한·중 수교 공동성명을 채택하였다.

5 탈냉전기 북방외교의 적극적 역할

북방외교는 국제적으로는 냉전의 해체가 가속화된 국제정세 변화와 국내적으로는 민주화된 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요구가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환경에서 가능했다. 노태우 정부는 이전과는 다른 환경 속에서 새로운 외교정책을 실행할 수 있었다. 헝가리부터 중국까지 노태우 대통령 재임기간 공격적으로 북방외교 정책을 펼치면서 많은 성과를 낼 수 있었다. 북방외교는 냉전시기 진영외교에서 벗어났다는 점, 향후 한국의 구(舊) 사회주의 국가와 외교 관계를 수립할 때 기준이 되었다는 데 의미가 있다. 이를 계기로 한국 정부의 외교정책과 남북관계(교류)의 전환점이 되었으며, 국제환경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한국을 중심으로 외교정책을 펼쳐 새로운 자주적 외교의 가능성을 열어주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북방외교의 성과로 한국은 소련과 수교할 수 있었다. 사회주의 국가들의 리더였던 소련은 중국과 북한과의 관계 개선에도 가장 중요한 변수였으며, 해방 이후 한국과 소련과의 관계를 고려했을 때 북방외교의 성공은 소련과의 수교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고르바초프의 ‘신사고’ 이후 한국은 소련과 외교적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되었고 소련은 국내 경기침체의 돌파구라는 경제적 이익, 한국은 한반도 평화 추구라는 정치적 이익이 상호 부합하면서 마침내 한·소간 외교 정상화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 한국은 소련과의 외교 정상화를 통해 소련의 국제적 위상을 활용한 국제 외교무대에서 지위를 공고화할 수 있었고 북한·중국과 관계를 맺는 데 필요한 중요 변수를 제거함으로써 향후 중국과의 외교 정상화, 북한과의 대화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중국과 한국의 수교 역시 북방외교의 성과였다. 한·중수교는 중국의 경제적 필요와 한국의 정치적 결정에 따라 상호 동기가 결합하면서 성공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한·중수교를 기점으로 한국은 주요 국제시장인 중국에 진출하면서 경제적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었으며 중국은 경제발전을 위해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노태우 정부는 북방정책의 성과를 바탕으로 남북관계 개선에도 나설 수 있었다. 총리가 주관하는 고위급회담 결과, 1991년 12월 남북 기본 합의서, 즉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 협력에 관한 합의서」를 조인하였다. 남북관계의 새로운 관계를 정립할 수 있었던 것은 탈냉전과 공산권 붕괴가 북한이 남북대화에 나서게 하는 압력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것과 관련하여 한국 정부가 가만히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공산권의 변화에 조응하여 대응하고자 했던 것이 북방정책의 의미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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