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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자촌, 달동네, 철거민

‘서울보통시민’들 이야기

미상

판자촌, 달동네, 철거민 대표 이미지

1970년대 판자촌 전경

사회복지법인 복음자리

1 개요

‘판자촌’이란 판잣집이 모여있는 동네를 뜻한다. 판잣집이란 판자로 벽체를 세운 허술한 집을 의미하는 것으로 저렴하지만 부실한 주거 형태였다. 그러므로 ‘판자촌’의 의미에는 가난한 주민들의 거주지역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역사적으로 서울에 판자촌이 출현한 것은 식민지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920년대부터 경성의 인구가 늘어나면서, 빈민들이 무허가 주택을 지어 살기 시작한 것이 판자촌의 기원이었다. 해방 이후에도 서울의 판자촌을 계속 유지되었으며, 시간이 지나면서 이동하는 양상을 보였다. 식민지기부터 당국은 무허가주택에 대해 ‘단속과 철거’ 방식으로 대응하였다. ‘재정착 사업’으로 밀려난 도시 빈민들은 서울 외곽 지역이나 주변 야산으로 이동하여 새로운 판자촌을 형성하였다. 상하수도 시설 부재 등 온전한 도시 인프라를 갖추지 못한 곳에 사는 판자촌 주민들은 “서울보통시의 시민”이라고 불렸다. 거주의 대안이 없는 주민들은 당국의 단속 정책에 반발하였고, ‘철거대상’을 의미하는 철거민들은 주거권(생존권)을 위해 싸웠다. “서울보통시민”들의 역사는 서울의 도시개발 역사의 이면을 보여준다.

2 판자촌과 달동네의 탄생

서울의 무허가주택 집결지역을 부르는 명칭이 처음부터 ‘판자촌’은 아니었다. 식민지기에 사용된 용어는 ‘토막촌’이었다. 땅을 약간 파내려간 이후 그 위에 거적 같은 걸 덮은 형태의 집을 ‘토막(土幕)’이라고 했다. 조선시대까지 1가구 1주택이 보편적인 현상이었지만, 1920년대 일제의 농촌수탈이 심화되자 농민들은 생존을 위해 도시로 몰려들었다. 당시 대표적인 도시인 경성, 즉 현재의 서울은 이들을 수용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경성에 몰려든 농촌 사람들은 도시 내외곽 유휴지(遊休地), 공유지(公有地) 등에 임시 거처로 토막을 지어 살았다. 그리고 그 지역은 토막촌이 되었다. 1940년대 초 ‘토막촌’의 토막집은 약 6,000호에 이르렀다. 일제 강점기 토막민이란 “조선인 빈궁계급”을 일컫는 말이었다.

건축 재료의 변화에 따라 ‘거적’에서 ‘판자’로 업그레이드된 것이 판잣집이었다. 그 외에도 달동네, 산동네, 비닐하우스촌 등으로 불리고 있다. 특히, 해방 전후 서울 도심을 중심으로 형성된 청계천의 판자촌은 한국의 무허가주택을 대표한다.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남한에 귀환인과 월남민이 대거 유입되었고, 1950년대 중반 이후 농촌빈곤의 심화, 자연재해(태풍) 등 농어촌 영세민들이 생존권을 위협받으면서 도시로 이주하였다. 하지만 인구의 유입에 비하여 주택의 증가는 부족했다. 1960년 12월 1일 현재 서울 인구대비(가구) 주택 부족율은 약 50%에 달하고 있었다.

상경한 신규 주민들이 갈 곳은 하천 주변, 산등성이 등에 마련된 무허가주택이었다. ‘달동네’는 야산 꼭대기까지 난립한 무허가주택 지역을 일컫는 용어였다. 판잣집들이 점차 증가하면서 이 지역은 판자촌이 되었고, 판자촌은 서울 중심은 물론이고 내외곽에 대거 형성되었다. 청계천, 후암동, 한남동, 미아리고개, 수유리, 노량진 등 서울 전역에 걸쳐 분포되어 있었다. 판잣집이 29,589호, 천막이 8,378호, 토막집이 3,251호로 1940년대 토막집과 비교하면 무허가주택이 해방 이후에 급격히 증가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승만 정부와 서울시는 급격히 증가하는 판자촌(도시빈민)에 대한 구제책을 내놓기보다 “단속과 철거”로만 일관하였다. 기껏 내놓은 대책이 주민들을 서울시 외곽으로 분산 이주시키는 ‘재정착 사업’이었다. 1959년부터 미아리 정착지 사업을 시작으로 이른바 ‘재정착 사업’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이 정책은 기존의 무허가주택을 철거하면서 주민들을 다른 곳으로 이주시키는 임시방편 성격이 강했다. 주택 미소유자를 위한 별다른 정책이나 지원이 없는 상황은 새로운 판자촌의 형성을 낳을 뿐이었다.

3 철거반대운동과 제정구(1960~1980년대)

1960년대부터 한국사회는 ‘개발의 시대’로 진입했다. 공업화와 도시의 발전은 한국 사회의 도시 입구 유입을 가속화하였다. 대표적으로 1960년에 2,445,000명이던 서울의 인구는 3,470,000명(1965년), 5,525,000명(1970년)으로 급격히 늘어나고 있었다. 서울에 유입된 인구는 다양했고, 그중 도시빈민 계층이 형성되었다. 도시에서의 삶에 대한 막연한 기대, 보다 나은 삶을 꿈꾸며 이주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도시 비공식부문의 단순육체노동, 비정기적 노동을 전전하거나 사실상 실업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기존의 서울 주택에 거주할 수 있는 재정적 여유를 갖추지 못했다. 즉, 판자촌을 비롯한 무허가주택 지대는 불법 거주였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 저소득자를 위한 주거지가 되고 있었다. 정부는 무허가주택 단지를 암묵적으로 허용함으로써 도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서울시 인구 증가에 따라 합법적인 거주지에 대한 수요도 확대되고 있었다. 이에 정부는 무허가주택들이 난립하고 있었던 지대를 재정비함으로써 도심에 가까운 새로운 거주 지역을 창출하고자 하였다. 1960년대 후반부터 정부는 장래 늘어날 노동력을 수용할 기반을 확대하고 도심지역을 정비하면서 기존 무허가주택 철거·이전정책을 대대적으로 실시하였다. 당시 서울시민의 약 15%에 해당하는 인구가 강제이주와 철거 대상이 되었다. 무허가란 이유만으로 강제이주와 철거는 기존의 거주자를 위한 아무런 대책을 제시하지 않았다. 기존 거주자들은 반발할 수밖에 없었다. 서울 전역에서 철거민과 정부 간의 마찰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서울시는 철거민들을 도시 외곽으로 이주시키고 새로운 주거 대책을 약속하였다. 하지만 이주 정책은 ‘탁상공론’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다. 1971년의 광주대단지사건은 서울시의 무책임한 철거 정책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였다.

광주대단지사건은 빈민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다. 1970년대 이후 급속한 공업화와 서울의 확대, 급격한 인구 증가, 서울시의 도시개발 계획에서의 배제 등 철거민들의 입지는 계속 좁아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철거민들의 처지를 공감하고 정부의 판자촌 철거 정책에 대한 비판은 사회운동으로 확장될 수 있었다. 1970년대 초반부터 철거민운동이 조직화되고 반정부 운동의 일환으로 부상하였다.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인물이 제정구였다. 1966년 서울대 입학 이후 학생운동을 시작한 제정구는 1972년 청계천 판자촌에서 야학을 시작했고 판자촌 생활에 충격을 받아 철거민 문제에 투신하여 ‘빈민운동의 대부’가 되었다. 정부는 철거민 문제에 학생운동 출신 인사들이 결합하는 것을 부정적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탄압이 시작되었고, 이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던 제정구도 민청학련사건으로 구속되었다.

제정구는 출소 후 철거된 청계천 주민들이 이주한 양평동에서 운동을 계속 이어갔다. 1975년에 양평동에서 평생의 동지가 된 천주교 예수회 소속의 정일우 신부를 만났다. 양평동의 제정구 활동에 대한 지지도 많았다. 1976년에 5평 남짓한 규모로 만든 마을사랑방에 김수환 추기경은 보금자리라는 뜻의 ‘복음자리’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현판식에도 참석하였다. 그러나 양평동 생활도 오래지 못하고 철거민들은 이주해야 하는 운명에 놓이게 되었고 1977년 천주교와 독일해외지원단체의 도움으로 경기도 시흥군 신천리 과수원과 논밭에 새로운 ‘복음자리’ 마을을 건설하여 철거민들을 위한 새로운 마을을 조성하였다. 제정구와 정일우 신부가 건설한 ‘복음자리’ 마을은 철거민들의 공동체 생활을 위해 복음신용협동조합을 만들어 사회경제적 자립을 도왔다. 이후 ‘복음자리’ 마을은 도시빈민과 철거민들의 집단이주의 모델이 되었다. 1979년에는 당산동, 신림동, 시흥동, 봉천동 철거민 164가구를 ‘복음자리 ’마을 주변에 이주시켜 ‘한독마을’을 조성했다.

제정구와 복음자리 공동체는 자신들의 생활에만 집중한 것이 아니라 다른 지역의 철거민 투쟁에도 힘을 보태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목동 철거민 투쟁이었다. 서울시는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와 안양천 홍수 대책을 위해 목동, 안양천 주변 무허가주택 정리사업을 실시했고 주민들의 투쟁은 2년간 계속되었다. 이 과정에서 철거민투쟁은 조직적인 투쟁운동으로 발전했고 이 때부터 ‘도시빈민운동’이라는 용어가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3년여에 걸친 목동 철거투쟁 끝에 철거민들의 일부가 ‘복음자리’ 마을 옆 ‘목화마을’을 조성하여 이주하였다.

당시 철거민들과 도시 당국이 힘겨루기를 하는 과정에서 인명피해가 발생할 정도의 폭력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제정구의 빈민운동은 철거민 투쟁의 새로운 방식을 추구하였다. 그는 도시빈민 생존권 문제에 더욱 적극적으로 대응하고자 1985년 3월 ‘천주교도시빈민사목협의회’(이후 천주교도시빈민회)를 발족시키고 초대 회장으로 일하면서 서울 각지 철거문제에 관여하였다. 제정구의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그는 ‘빈민운동의 대부’라고 불렸고, 도시빈민 생존권을 위해 활동한 공로를 인정받아 1986년 아시아의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막사이사이상(지역사회지도 부문)을 정일우 신부와 공동 수상하였다.

1960∼80년대 서울 도시개발과 확대는 서울 주변부 개발로 귀결되었고 사회경제적으로 취약했던 무허가주택 주민들은 점차 서울 외곽으로 내몰리게 되었다. 제정구와 같이 도시빈민 문제를 조직적으로 해결하려는 노력들이 있었으나 거대 도시로 발전하는 서울에서 도시빈민들을 위한 자리는 사라지고 있었다.

4 부동산공화국의 그림자(1990년대 이후)

1987년 6월 민주화항쟁을 계기로 서울시철거민협의회가 결성되어 각 재개발지역에서 공동투쟁이 시작되었고 조직적인 운동은 1989년 노태우 정부가 25만 호 영구임대주택 정책을 도입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특히, 무허가주택 세입자에게도 입주권을 부여하여 ‘도시빈민운동’의 성과가 드러나게 되었다.

1980년대 후반부터 주택 보급률이 하락하자 주택가격이 상승했고 토지와 아파트가 가격상승을 주도했다. 1970년대부터 계속되어 온 물가상승률과 부동산 정책의 실패는 부동산 투기를 심화시키면서 주거권 문제는 무허가주택 주민을 비롯한 서울 시내 세입자를 포함하는 국민적 사안이 되었다. 당시 노태우 정부는 신도시개발과 공공임대주택을 건설하여 주거권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미 급등한 부동산 가격은 도시빈민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이었고, 도시 환경개선사업과 주택 공급을 위한 서울 달동네 재개발이 본격화되자 철거민들의 주거권이 위협받기 시작했다. 1990년대 이후 부동산 가격이 등락을 계속하는 가운데 달동네의 재개발이 확대되었고 이들은 다시 서울 외곽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대표적으로 1980년대 강남 개발을 시작으로 밀려난 철거민들이 서초동과 개포동의 비닐하우스촌, 장지동 비닐하우스촌, 우면동 비닐하우스촌, 구룡마을을 조성하였다. 이 지역들에는 사회기반시설이 갖춰지지 않아 기초적인 생활도 어려운 상황에 놓였을 뿐만 아니라 상시적인 화재에 노출되어 있었다. 그러나 정부의 신도시건설과 철거민 문제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감소하면서 주거권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노력은 현실화 되기 어려웠다.

21세기에 들어선 이후 한국에서 판자촌과 무허가주택, 그리고 철거민 문제는 더 이상 사회 문제로 언급되지 않는다. 하지만 판자촌 문제의 기저에 있는 도시 지역의 주거지 부족 문제는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서울과 수도권의 부동산 가격 급등으로 인한 거주비용 부담이 사회문제로 되고 있다. 주거지 문제가 궁극적으로 해결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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