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4년 ~ 1975년
1960년부터 1975년 4월 30일까지 지속된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NFL)과 미국 사이의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통상 ‘베트남전쟁’이라고 부른다. 남베트남 내의 반정부 세력인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과 남베트남 정부 사이의 내전(內戰)으로 시작했으나, 1964년 8월 7일 미국이 통킹만 사건을 구실로 북베트남을 폭격한 뒤에 전쟁은 미국과의 전면전으로 확대되었다. 이후 냉전의 대립 속에서 한국을 비롯한 타이, 필리핀,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중국 등이 참전한 국제전으로 전개되었으나, 1968년 구정공세를 계기로 미국은 전쟁의 종결을 검토하기에 이르렀다. 정전협상을 진행하는 과정에서도 미국은 출구 전략을 모색하기 위해 대규모 북폭을 지속하고 전장을 인도차이나 반도 전역으로 넓혔지만, 끝내 1973년 평화협정 이후 미군을 철수시켰다. 곧이어 1975년에는 남베트남 정권이 완전히 종결되었고, 이듬해인 1976년에 남북이 통합된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이 출범하였다.
베트남전쟁은 베트남이 프랑스와 벌인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1946~1954년)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프랑스는 19세기 중반 이후부터 베트남을 식민지로 지배하였고, 베트남인들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1927년에는 베트남 국민당을, 1930년에는 인도차이나 공산당을 조직하는 등 독립운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일본 제국이 베트남을 점령하자, 호치민의 주도 아래 1941년 5월 19일 베트민(Viet Minh, 베트남독립동맹)이 결성되어 일본군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벌였다. 1945년 8월 일본이 항복한 뒤에 베트민은 하노이를 점령하고 그해 9월 2일 베트남민주공화국의 수립과 독립을 선포했다.
하지만 프랑스는 베트남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고 1946년 11월 23일 하이퐁(Hai Phong) 항구에 함포 사격을 가해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일으켰고, 전쟁은 1954년 5월 7일 프랑스군의 거점인 디엔비엔푸(Dien Bien Phu)가 함락될 때까지 9년 동안 지속되었다. 그리고 그해 7월 미국·영국·프랑스·소련 등 4개국 외상 회의가 베를린에서 열렸고, 4개국의 합의 아래 제네바 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 디엔비엔푸 함락 이후의 인도차이나 문제에 대한 토의가 본격화되었고, 국제무대에 갓 등장한 중화인민공화국의 저우언라이(周恩來)의 노력으로 휴전을 위한 제네바 협정이 성립되었다. 그 결과 북위 17도선을 잠정적 군사 경계선으로 하여, 베트남은 남과 북으로 분단되고 프랑스군을 비롯한 모든 외국군은 즉시 철수할 것이 결정되었다.
협정에서는 또한 1956년 국제감시위원회의 감독 아래 베트남 전역에 걸쳐 자유선거를 실시하도록 규정했으나 1955년 미국의 지원을 받아 남베트남(베트남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 된 응 오딘 지엠(Ngo Dinh Diem)은 선거 실시를 거부했다. 미국은 남베트남에 반공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대규모의 군사와 경제 원조를 하였다. 특히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케네디 행정부는 베트남 공화국에 대한 원조를 더욱 강화하였으나, 지엠 정권의 독재와 부패로 민심은 악화되었고, 이러한 경향은 1963년 지엠은 쿠데타로 실각한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특히 남베트남 정부는 이전에 베트민이 토지개혁을 실시하여 농민들에게 분배한 농지를 다시 회수하고, 무리하게 친 가톨릭 노선을 고수하여 광범위한 반발을 샀다. 결국 카오다이(Cao Dai)나 호아하오(Hoa Hao) 등의 종교집단을 중심으로 봉기가 시작되었고, 여기에 베트민의 구성원들이 합세하면서 1950년대 중반부터 이른바 ‘베트콩(Viet Cong)’이라고 불렸던 게릴라 군사조직이 등장했다. 남베트남 정부는 1958년 반공법을 시행하는 등 강경책으로 저항을 억누르려 했으나, 게릴라 세력은 1960년 12월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NFL)으로 정부와의 대치를 본격화했다. 그러면서 민족 민주정부의 수립, 토지개혁, 평화통일, 중립외교 등의 강령을 내세웠다.
지엠 정권에 대한 반발이 확대되자 1963년 즈엉반민(Dưong Van Minh) 등은 미국의 방조 아래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응 오딘 지엠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했다. 하지만 1964년 응우옌칸(Nguyen Khanh)이 다시 쿠데타를 일으키는 등 남베트남 정권은 잇따른 쿠데타로 크게 불안정해졌다. 이렇듯 남베트남의 상황이 악화되자 미국의 존슨(Lyndon Baines Johnson) 정부는 남베트남에 주둔하는 미군의 숫자를 늘렸다. 그리고 미국의 구축함이 북베트남의 어뢰 공격을 받았다는 이른바 ‘통킹만 사건’을 구실로 1964년 8월 7일 북베트남에 폭격을 가해 전쟁을 북베트남과의 전면전으로 확대했다. 미국은 그 뒤 1968년까지 북베트남에 약 1백만 톤에 이르는 폭탄을 퍼부었으며, 약 55만 명에 이르는 지상군을 파병했다. 그리고 동남아시아조약기구(SEATO) 등에 파병을 요청해 한국,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태국, 필리핀 등의 참전을 이끌어냈다.
한국의 경우 베트남전쟁에 미국 다음으로 많은 병력을 파병한 국가였는데, 이처럼 대규모의 한국군 파병은 한국과 미국 양측의 이해관계가 합치된 결과였다. 한국의 경우 자국 군대를 파견함으로써 한반도 내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의 규모를 유지하려 했고, 미국의 한국군 감축노선에 방어하려는 차원에서 한국군의 파병을 추진했다, 무엇보다 파병을 통해 한미 동맹을 강화하고, 미국으로부터 받아낼 수 있는 원조를 확대하는 데 궁극적인 목적이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5·16 쿠데타 직후인 1961년 11월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이 미국에 방문했을 당시부터, 한국군 파병을 제안했다.
한국의 제안에 미온적이던 미국은 1964년 통킹만 사건 이후 북폭을 시작하고 ‘많은 깃발(Many Flags)’ 정책을 채택하여, 자유진영 국가들에 적극적으로 파병을 요청했다. 특히 한국군의 경우 미군에 비해 유지비가 싸면서도 같은 아시아인이었기 때문에 전투에 투입하는 데 유용했을 뿐 아니라 한국전쟁 경험도 있었기 때문에 선호되었다. 이후 자국 내 반전시위가 격해지면서 자국에서 병력자원을 동원하기 어려워지자 파병요구가 더욱 강해졌다. 특히 1966년 3월 ‘브라운 각서’는 파병의 반대급부를 제시한 것으로 주목된다. 그 결과 한국은 1964년 9월 의료진을 중심으로 한 비전투요원을 파견한 것을 시작으로, 맹호부대와 청룡부대, 백마부대 등 만 8년 6개월 동안 30만 명이 넘는 병력을 베트남에 파병했다.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은 1968년 1월 30일 음력 설날을 이용한 이른바 구정 대공세를 펼쳐 주요 도시들에서 미국과 동맹국들의 주요 시설을 점령했다. 미군과 남베트남 정부군은 곧바로 빼앗겼던 도시와 시설들을 탈환했지만, 이 사건은 미국의 여론에 큰 영향을 끼쳤다. 전쟁의 승리를 낙관하기 어렵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미국에서는 반전 여론이 높아졌고, 결국 존슨 대통령은 재선에 실패하고 군사개입의 중단을 내세운 닉슨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닉슨은 1969년 ‘닉슨 독트린(Nixon Doctrine)’을 새로운 안보·외교 전략으로 내세우며 미군의 철수 계획을 발표하였다. 그러자 한국 정부로서는 더 이상 파병의 명분을 찾을 수 없게 되었고, 미국 정부와의 관계에서 파병을 협상 카드로 쓰기도 어려워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정부는 파병의 반대급부로 얻을 수 있는 원조나 전쟁 특수를 포기하려 하지 않았고, 철수를 지연하는 동안 한국군 역시 계속해서 전사자가 발생했다.
구정 대공세 이후인 1968년 5월부터 미국과 북베트남의 정전 협상이 시작되었으나, 1972년까지는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오히려 1970년 이후에는 미국이 캄보디아의 내전에 군사적으로 개입하면서 전장이 캄보디아와 라오스 등 인도차이나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1972년 4월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이 각지에서 대규모 봉기를 일으키자, 미국은 북베트남의 모든 항만에 기뢰를 부설하고, 하노이와 하이퐁에 대규모 폭격을 가하는 등 북베트남에 대한 공세를 더욱 강화하기도 했다. 그러나 1972년 여름부터 미국과 북베트남 사이의 정전 협상이 비밀리에 재개되었고, 마침내 1973년 1월 27일 파리에서 평화협정이 체결되었다. 파리평화협정은 남북의 휴전과 선거를 통한 통일정부 구성, 60일 안에 모든 미군의 철수 등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평화협정을 체결한 뒤 미군은 남베트남에서 완전히 철수했고, 북베트남과 미군 사이에 포로 교환도 이루어졌다. 미국은 남베트남에 대한 원조 규모를 크게 줄였고, 오일쇼크로 촉발된 경제위기를 배경으로 1974년 1월부터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과 남베트남 정부 간의 갈등은 다시 무력충돌로 확대되었다. 결국 북베트남은 1975년 대규모 공세를 벌여 그해 4월 30일 남베트남의 수도인 사이공을 점령했고, 남베트남의 대통령이던 즈엉반민의 항복을 받았다. 사이공이 점령된 뒤 남베트남공화국이 수립되었고, 1976년 7월 2일 남북 베트남이 통합해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을 수립하면서 베트남은 하나의 국가로 통일되었다.
미국에게 베트남전쟁은 역사상 최초로 패배한 전쟁으로, 패권국 지위까지도 수정되어야 했던 트라우마를 남겼다. 달러화의 지위가 하락하고, 아시아에서는 긴장을 줄이기 위해 미중관계 개선이 추진되었으며 대내적으로는 광범위한 반전시위와 민권운동이 촉발되었다. 그리하여 학계에서는 냉전과 근대(modernity)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이 제기된 끝에, 수정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이 등장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반면 한국 사회에서 베트남전쟁은 순전히 ‘베트남 특수(特需)’로만 기억되는 경향이 있다. 파병군인 및 기술자의 월급으로 외환이 들어왔을 뿐 아니라, 현지에서 공사를 담당하고 물품을 조달하는 일을 담당했던 신흥 대기업들이 급성장하면서 한국 내 재벌 순위가 변동할 정도였다.
그러나 정부와 기업은 월남에 파견된 군인이나 노동자에 대해 충분히 보상하지 않았다. 사병의 경우 전투수당이 미군의 사분의 일에 불과했고, 전사했을 때 받는 금액이 당시 직장인의 1년치 월급을 조금 웃도는 액수일 정도로 재해보상금도 극히 적었다. 무엇보다 이들 군인이나 노동자들이 벌어들인 외화는 국내로 송금하고 환전하는 과정에서 정부에게 고가의 수수료를 떼였다. 심지어 상당수의 기업에서는 노동자들에게 그 임금조차 제때 주지 않고 체불하기까지 했다. 한진 노동자들이 밀린 임금을 달라고 요구하다가 회사에서 외면하니까 급기야 KAL 빌딩에 불을 지른 사건도 있었다.
또한 박정희 정부는 베트남전쟁을 겪으며 동원체제를 정비할 수 있었다. 주민등록법에 근거한 징병제가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으면서 징병 기피가 처벌로 이어지는 시스템이 구축되었고, 향토예비군을 설치하여 병역의무를 수행한 이후에도 통제가 지속되었다. 여기에 교련교육과 민방위 훈련 등등 현역 군인으로 징집되지 않는 사람들도 통제 망에 포함시켰고, 파월 장병을 지원한다는 명목으로 위문사업의 형식으로 동원되기도 하였다.
정글에 숨어있는 베트콩들을 찾아낸다는 명목으로 저질러진 고엽제 살포와 민간인 학살 문제 역시도 베트남전쟁의 가장 어두운 면 중의 하나이다. 미군이 베트콩을 색출하기 위해 다이옥신 계열의 고엽제를 뿌려 밀림을 고사시키려 한 작전은 베트남인들은 물론 전쟁의 많은 참여자에게 엄청난 후유증을 남겼다. 한국의 경우도 많은 참전 군인들이 고엽제 피해 등의 후유증에 시달렸다. 1999년에는 1만 6천여 명의 고엽제 피해자들이 고엽제 제조사들인 미국의 다우케미칼과 몬산토 사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으나 제대로 보상받지 못하였다.
또한 당시 열악한 상황에서 민간인 사이에 숨어있는 게릴라를 색출해내야 하는 작전 특성상 병사들이 신경질적으로 반응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 과정에서 대규모 민간인 학살이 발생했다. 구정 공세 직후에 중부지역에서 특히 극심했는데, 이 시기 미군의 학살 사례로는 밀라이 학살 사례가 익히 알려졌으며, 한국군의 경우 빈딘성 지역 하미 마을과 꽝남성 퐁니·퐁넛 마을 사례가 최근 알려지고 있다. 특히 2018년에는 한국 내 시민사회단체들이 주도하여 꽝남성 사례의 피해자가 직접 원고로 참여하는 시민평화법정이 일종의 모의재판 형식으로 진행되어 주목받기도 했다. 이처럼 베트남 전쟁은 한국 사회에서 오랫동안 전쟁특수 혹은 한미동맹 강화의 관점에서만 인식되어 왔으나, 최근 전쟁 참여자들의 가해와 피해 및 한국 사회에 미친 영향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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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