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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마민주항쟁

유신의 막을 내리다

1979년

부마민주항쟁 대표 이미지

부마항쟁 당시 부산 중심가 시위 군중들의 모습과 계엄령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1 개요

부마민주항쟁은 박정희 정부 말기이던 1979년 10월 16일부터 20일까지 경상남도 부산과 마산 지역에서 일어난 반정부 항쟁 사건을 말한다. YH 무역 노동자들이 신민당사에서 농성한 사건 이후 정부가 김영삼 의원의 총재직을 정지시키고 의원직을 박탈하자, 신민당 소속 국회의원 66명 전원이 사퇴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러자 김영삼의 정치적 연고지이던 부산에서 10월 15일 민주 선언문이 배포되고 17일부터는 반정부 시위가 전개되었다. 학생들은 물론 각계각층의 시민들로 구성된 시위대는 유신 타도를 외치며 주요 기관을 파괴하였다. 18일에는 시위가 마산, 창원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그러자 정부는 부산·마산 일대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이들을 진압하였으나, 항쟁에 대한 대응을 둘러싸고 내부 갈등이 격화된 끝에 일어난 10·26 사건으로 정권이 종결되었다.

2 배경

박정희 정권 마지막 해였던 1979년, 유신체제는 한계에 다다랐다. 정부는 유신헌법 53조에 규정되어 있던 긴급조치권을 발동하였지만, 9호까지 이어진 긴급조치로 정권 비판 전반을 규제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 전반에 걸친 반정부 운동을 더 이상 통제할 수 없었다. 게다가 코리아게이트 이후 미 하원 프레이저 위원회(Fraser Committee)에서 박정희 정권의 부정부패가 폭로되고 ‘인권외교’를 표방한 카터 행정부가 출범하면서 한미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이런 상황에서 1978년 유신 2기 출범을 알리는 대선이 치러졌지만, 총선에서는 공화당이 고전하고 야당인 신민당이 선전하는 결과가 나왔다.

경제 부문에서는 1970년대 내내 지속된 중화학공업의 과잉 중복투자가 한국경제를 심각한 위기로 몰고 간 끝에, 1978년 제2차 오일쇼크 이후 한국경제는 심각한 위기에 빠졌다. 정부는 1979년 4월 긴축 등을 골자로 한 ‘경제안정화정책’을 채택했고, 경제위기를 해소하기 위해 중소자본가, 봉급생활자, 도시 노동자와 농민 등에게 안정화 비용을 전가했다. 안정화정책 이후 중소기업들이 줄도산하며 부도율이 급증했고 도시하층민들의 생활이 더욱 피폐해졌다. 특히 부가가치세 도입의 영향으로 물가가 상승하면서 일상생활에 직접적인 위기가 되었다. 더구나 노동집약적 제조업이 집중됐던 부산과 마산에서는 상황이 더욱 심각했다. 1979년에 들어서 부산지역 부도율은 전국의 2.4배, 서울의 3배에 달했고, 수출증가율 역시 전국 18.4%에 훨씬 못 미치는 10.2%로 하락했다.

노동계에서는 1970년대 말부터 경공업 부문을 중심으로 어용노조에 대항하는 민주노조를 결성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어나면서 정부와 충돌이 잦아졌다. 특히 1979년 8월에 일어난 YH 사건은 부마민주항쟁의 직접적인 배경이 되었다. 가발 제조업체였던 YH 무역은 부실 운영과 임금 체불로 문제가 된 끝에, 일방적으로 폐업하기에 이르렀다. 노조는 이에 맞서 농성하였으나 회사가 건물을 폐쇄하자, 신민당에 호소하기로 결정하고 200여 명의 노동자가 신민당 당사에서 농성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정부는 8월 11일 새벽 1,000여 명의 경찰을 신민당사에 투입하여 노동자들을 강제 연행하고, 현장에 나와 있던 기자 및 신민당 국회의원이나 당원들에게도 폭력을 가하였다. 사건 직후 강제 연행에 반대하는 시위가 격화되자, 신민당 총재 김영삼이 의원직에서 제명되었다. 그러자 신민당 국회의원 66명 전원이 사퇴했고, 이는 광범위한 반유신 운동을 촉발했다.

3 항쟁의 경과

부산에서는 10월 15일 부산대학교에서 민주선언문이 배포되었다. 다음날인 16일에는 아침부터, 도서관 앞에서 약 500명의 학생들이 모여 반정부 시위를 시작했다. 학생들은 노래를 부르고 구호를 외치며 ‘민주선언문’을 배포했는데, 교문을 나가 가두시위를 시작할 때 인원은 5,000명으로 늘어났다. 학생들은 광복동과 남포동 등 시내 중심가에 진출하여 경찰과 충돌하였다. 동아대학교에서도 1,000여 명의 학생이 시내에 진출하여 합류하였다. 첫날의 시위로 학생 수백 명이 연행되고 양측에서 부상자가 100여 명에 달했다.

이튿날 17일에는 학생들의 시위가 더욱 격화되었으며, 다수의 시민들이 합류하여 시위는 시민항쟁의 양상을 띠었다. 오후까지는 대학생들이 시위를 주도했으나, 야간시위에는 고교생, 자영업자는 물론 사무직·제조업·접객업·일용직 노동자들이 광범위하게 참여하여 인원이 5만명에 이르렀다. 밤늦게까지 시위는 계속되었고, 시위대는 정치탄압 중단과 유신 정권 타도 등을 외치며 KBS부산방송국과 도청·세무서·파출소 등 주요 기관을 공격하였다. 18일에는 마산 지역으로 시위가 확산되었다. 부산과 마찬가지로 경남대학교 학생들이 마산 시내에 집결하였고, 시민들이 합류했다. 마산 역시 야간시위에서 격렬해졌고, 시위대는 주요 기관을 파괴하였다. 19일 마산 시내는 한때 무정부 상태가 되었으며, 오후 8시 시위대의 인원은 약 8,000명에 이르렀다.

부마민주항쟁 기간 동안 많은 지역에서 공통적으로 공화당사와 경찰·파출소가 가장 먼저 시위대의 타겟이 되었다. 여기에 더해 시위대가 ‘부유층’에 대한 적개심을 공공연하게 드러냈다는 점 또한 특징이다. 이것은 전술한 바와 같이 경공업이 집약된 부산이나 마산이 경제위기의 직격타를 맞으며 상대적 박탈감의 진원지가 되었다는 점과도 관련이 있다. ‘부가가치세를 철폐하라’라는 구호와 함께 세무서를 공격한 점 역시 항쟁의 경제적인 배경을 드러낸다. 따라서 학계에서는 이 점을 적극적으로 해석하여 부마민주항쟁이 민주화운동일 뿐 아니라 도시하층민의 봉기였다는 점에 주목하기도 한다.

4 항쟁의 종결과 영향

박정희 정부는 부마민주항쟁의 양상이 심각해지자 곧 강경책으로 대응했다. 18일 새벽 0시를 기해 부산 일원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부산지구 계엄사령부는 18일 0시를 기해 포고문 제1호를 발표하였다. 각 대학에 당분간 휴교조처를 내린다는 점, 야간 통행금지 시간을 2시간 연장한다는 등의 8개 항이었다. 그리하여 공수부대까지 동원하는 등 강도 높은 진압을 지속한 끝에 부산지역에서 1,058명을 연행했으며, 66명을 군사재판에 회부하였다.

또한 부산 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한 지 2일 뒤인 20일 정오에는 마산 및 창원 일원에 위수령을 발동하였다. 마산 지역 작전사령부는 군을 진주시켜 505명을 연행하고 59명을 군사재판에 회부하였다. 이 일대 또한 통행금지가 2시간 연장되었고, 경남대학과 경남산업전문대학에는 무기한 휴교조처가 취해졌다. 또한 24일에는 군·검 합동반을 편성하여 특별수사부를 설치하고, 깡패를 소탕한다는 명목으로 132명을 검거하고 23명을 구속하였다. 이 때문에 계엄령과 위수령 발동 후 부마민주항쟁은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단시간에 진압되었다.

그러나 항쟁은 박정희 대통령 측근 내부의 갈등과 균열을 돌이킬 수 없는 국면으로 몰고 갔다. 부산과 마산의 상황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를 두고 내부에서 강경론과 온건론으로 나뉘어 대립한 끝에, 경호실장 차지철의 강경론에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반발하면서 내부 갈등이 극에 달했다. 급기야 부마항쟁 시작으로부터 열흘 남짓 지난 10월 26일, 궁정동 안전가옥에서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대통령을 저격하는 상황으로 이어졌다. 2인자를 용납하지 않으며, 내부의 경쟁과 갈등을 통한 세력균형을 이용하여 경직된 1인 지배체제를 최대한 유지하려던 박정희 대통령의 분할통치 기술이 애초에 내재하고 있던 비극이기도 했다. 이로써 장장 18년에 걸친 박정희 정권은 마침내 종결되었다.

부마민주항쟁은 1970년대 유신체제 하에서 한국사회 전반에 걸쳐 축적되었던 문제들이 폭발한 사건이었고, 박정희 정권의 종언을 상징하는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항쟁을 둘러싼 다양한 해석과 평가에도 불구하고, YH무역사건과 함께 한계에 다다르고 있던 유신 체제를 아래로부터 붕괴시킨 결정적인 사건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리하여 4·19 혁명, 5·18 민주화운동, 6월 항쟁과 함께 한국현대사에서 큰 영향을 미친 민주화 운동의 하나로서 평가받는다. 2013년에는 ‘부마민주항쟁 관련자의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제11851호)이 제정되어 ‘부마민주항쟁진상규명 및 관련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가 구성되었다. 2019년 9월 17일 항쟁 시작일인 10월 16일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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