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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백산업[三白産業]

미국 원조에 기댄 대자본의 성장 서사

미상

삼백산업 대표 이미지

인천항에서 미국 원조 식량을 트럭에 옮겨 싣는 모습

국가기록원

1 개요

삼백산업(三白産業)이란 1950년대 미국의 원조 자금 및 원조 물자를 바탕으로 성장한 제분(製粉), 제당(製糖), 면방직(綿紡織) 공업을 말한다. 삼백산업은 사람들이 일상에서 필요로 하는 주요 소비재를 생산하는 산업으로, 한국전쟁 이후 한국에 형성된 대자본을 대표했다. 이전까지 한국은 밀가루, 설탕, 면직물을 수입했으나, 미국이 원조한 소맥(小麥, 이하 밀), 원당(原糖), 원면(原綿)을 활용한 삼백산업이 형성, 발전함에 따라 수입 대체에 성공했다. 1950년대 중반 미국발 원조 자금과 원조 물자, 그리고 한국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호황을 누렸으나, 1957년 이후 미국의 대한(對韓) 원조가 축소됨에 따라 불황에 빠졌다. 이처럼 1950년대 삼백산업은 원조공업의 한계를 온전히 벗어나지 못했으나, 이후 한국 자본주의 전개에 있어 산업적 기반을 조성하고 자본축적 전략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2 삼백산업의 발흥 배경

삼백산업이 발흥한 시기는 한국전쟁을 겪은 직후로 대내외적으로 한국 사회를 재건하는 시기였다. 이에 삼백산업의 형성과 성장은 이러한 시대적 조건과 조응하며 이루어졌다. 특히 1950년대 대자본을 대표하는 삼백산업의 발흥을 이해하려면 당시 ‘미국의 원조’와 ‘한국 정부의 지원’이 어떠한 맥락에서 이루어졌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

우선 1950년대는 미국의 한국을 상대로 원조 규모를 대폭 확대한 시점으로, 이 원조는 삼백산업이 성립할 수 있는 기초와 자본축적의 주요 동력을 제공했다. 미국이 무상으로 원조한 자금과 물자는 전쟁으로 황폐해진 한국 경제가 1950년대 중반 이후 상당 부분 복구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특히 면방직 공업의 원료인 원면, 제당 공업의 원료인 원당, 그리고 제분 공업의 원료인 밀이 대량으로 원조 됨에 따라, 삼백산업은 생산 설비 마련에 자금 지원을 받았음은 물론, 원자재 대부분을 값싼 원조 물자로 공급받을 수 있었다.

당시 미국이 한국에 원조를 제공한 이유는 미국의 이해에 따른 것이었다. 무엇보다 미국은 동아시아에서 안보를 확보하기 위해 한국을 지원했다. 1950년대로 돌입하며 시작된 한국전쟁은 자유진영과 공산진영 간의 대결을 가일층 격화시켰고, 미국은 한국을 재건함으로써 동아시아 최전선에서의 안정을 획득하고자 했다. 가령 삼백산업에 원료가 되는 밀, 원면 등을 원조하는 법적 근거였던 미 공법 480호 ‘1954년 농업무역발전 및 원조법’은 한국 정부로 하여금 원조 농산물 판매대금 전액을 국방 예산에만 사용하도록 강제했다.

또한 미국은 내부적으로 농산물 과잉 생산 문제를 안고 있었다. 과잉 생산된 농작물은 시장 가격을 폭락시키고 농가 경제에 타격을 주고 있었다. 미국 정부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세금으로 잉여 농산물을 사들인 후 대외 원조 물자로 활용했다. 미국이 오랜 세월 쌀밥을 주식으로 살아온 한국에 굳이 밀 등을 원조한 이유가 그러했다. 요컨대 미국 관점에서 원조는 대외적으로 진영의 군사 안보를 공고히 하고, 대내적으로 농산물 수요-공급 균형을 회복하는 일거양득의 수단이었다.

한편 1950년대는 한국 정부가 산업 건설에 전폭적인 지원 정책을 펼쳤던 시기다. 한국 정부는 원조 자금, 원조 물자를 배분하는 과정에서 삼백산업을 비롯한 특정 부문에 상당한 특혜를 부여했다. 전후 물자 부족은 심각한 문제였다. 달러가 귀한 시절이었던 만큼 필요한 물자를 무한정 수입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해방 이후 일본인이 남겨두고 간 공장, 설비가 있었지만, 한국전쟁을 거치며 기능을 상실한 경우가 많았다. 이에 한국 정부는 미 원조 물자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당장의 수요에 대응할 수 있는 소비재 산업을 집중적으로 육성하고자 했다.

그뿐만 아니라 한국 정부 삼백산업을 지원한 배경에는 국방 예산 문제가 엮여있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미국은 원조 농산물 판매대금을 한국 정부의 국방 예산으로 사용하도록 했는데, 그 액수는 무려 국방 예산의 절반에 달하는 규모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 정부는 국방에 소요되는 재정을 마련하기 위해서라도 원조받은 밀, 원당, 원면을 원활하게 소화해낼 산업을 지원, 육성할 필요가 있었다.

3 삼백산업에 주어진 특혜와 성장

1950년대 중반, 제분 공업, 제당 공업, 그리고 면방직 공업은 빠르게 성장했다. 당시 이들 삼백산업의 성장을 이해하려면 미국과 한국 정부로부터 받은 지원을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삼백산업은 양측의 전폭적인 지원을 적극 활용함으로써 상당한 초과이윤을 획득하면 호황기를 누릴 수 있었다.

우선 삼백산업은 생산 시설을 갖출 때 커다란 특혜를 입었다. 생산재 공업이 거의 전무하던 시절이었기에, 공장 시설의 대부분은 외국산이었다. 이러한 설비는 사실상 원조 자금이나 정부가 보유한 달러로 도입되었는데, 당시 한국은 해외 결제 수단, 즉 달러 자체를 구하기 어려웠기에 달러를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특혜였다. 그런데 이들은 외국산 시설 도입에 쓰인 달러를 한국 돈으로 결제할 수 있었으며, 환율 면에서도 상당한 특혜를 누렸다. 가령 1955~1958년 무렵 시장 일반에서 1달러는 약 1,000~1,400환으로 거래되었지만, 해당 업계는 1달러당 500환 전후로 계산하여 대금을 지불할 수 있었다. 이 마저도 대부분 저금리 융자를 받아 지불할 수 있었고, 상환 연체도 허용되었다는 점이다.

또한 삼백산업은 원료 조달 면에서도 상당한 혜택을 입었다. 미국과 한국 정부는 제분업자, 면방직업자, 제당업자를 원조 물자의 “실수요자”로 설정하고, 밀, 원면, 원당 등의 원료를 이들에게 먼저 배정했다. 이러한 원조 물자는 앞서 확인한 생산 시설과 마찬가지로 시장 환율 대비 낮은 환율로 환산되어 결제되었다. 즉 원조 물자는 배정 받으면 받을수록 그 자체로 이득인 상황이었다. 그리고 이마저도 외상이 가능하거나, 저금리 융자를 통해 지불 할 수 있었으니 커다란 특혜였다. 실수요자 우선 배정 원칙은 삼백산업 업계로 하여금 원료를 저렴하게, 독점적으로 조달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 이면에 실수요자로 지정받지 못한 장류 제조업, 양조업 등이나 지역의 소규모 업장은 원료 부족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정부는 삼백산업의 독점적 판매도 지원했다. 정부는 특정 제품에 대해 국내 업계가 국가 수요를 감당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게 해당 품목에 대한 수입 관세와 물품세를 크게 인상했다. 예를 들어 밀가루의 경우, 제분업이 국내에 자리 잡아가자 곧장 민간 수입이 금지되었다. 이러한 조치는 업계가 경쟁 없이 손쉽게 시장을 장악할 수 있게 만들었다. 이들은 국제 시세보다 저렴한 가격에 생산 시설과 원료를 조달하면서도 국제 시세를 상회하는 가격으로 상품을 판매했다. 곧 이윤의 극대화로 이어졌다.

1950년대 삼백산업은 미국의 원조와 한국 정부의 특혜에 기대어 호황을 누렸다. 물론 해당 업계가 단순히 원조 물자를 값싸게 획득하여 비싸게 판매하는 방식으로만 성장한 것은 아니었다. 이들 역시 여타 일반적인 산업자본과 마찬가지로 저임금, 장시간 노동을 투입해 생산비 내 노임을 낮추려 했고, 이윤율을 증가시키기 위해 제품의 고급화, 다양화를 시도하거나 중간재 직접 생산을 위한 설비 증설, 혹은 노후 장비 수리, 교체에 나서기도 했다. 업계별로 협회 등을 조직하여 원료 배분이나 가격 형성 사안을 두고 집단적 이익을 실현하려 하거나, 한국 정부나 미 원조 당국을 상대로 요구를 제출하기도 했다. 그러나 생산성 경쟁이나 판매가격 경쟁을 치열하게 할 필요 없는 상황 속에서 삼백산업 업계는 생산성을 향상하는 일보다 ‘더 많이 생산하는 것’에 열중했다.

4 미국의 원조 축소와 삼백산업의 대응

1957년경까지 삼백산업 업계는 너나 할 것 없이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시설 확대에 박차를 가했다. 실제로 제분 업계 전체 시설 능력 추이를 살펴보면 1954년 불과 1,000배럴이었던 규모가 1959년 상반기 45,000배럴까지 늘어났다. 같은 기간 밀가루 소비가 2배 정도 증가한 데 비해 제분 업계 시설 능력은 45배 증가한 것이다.

1950년대 후반으로 접어들 무렵 삼백산업의 시설 규모는 국내 수요를 모두 감당하고 남을 만큼 확장되었다. 그러나 업계는 설비 증설 경쟁을 멈추지 않았다. 왜냐하면 도입된 원료가 실수요자 업체의 설비 용량에 비례하여 배분되었기 때문이다. ‘누가 더 많은 원료를 배정받느냐’하는 문제는 상품 생산량, 즉 획득할 수 있는 판매이윤의 총량으로 이어졌기에, 업체들은 시설 과잉 상태를 인지했음에도 더 많은 원료를 배정받기 위해 설비를 늘려나갔다. 더구나 설비 증설은 저리의 원조 자금을 융통할 수 있는 명목이기도 했다.

물론 과잉, 중복 투자가 곧장 문제를 발생시키지는 않았다. 이 국외로부터 투입되는 원조가 이러한 산업 팽창을 뒷받침하고 있었을뿐더러, 시장 수요 역시 1950년대 초부터 1950년대 중반까지 어느 정도 늘어나는 추세를 보였기 때문이다. 기실 1957, 1958년까지도 새로이 해당 업계에 뛰어드는 업체가 있었다는 점이 이를 방증한다.

그러나 1957년 미국이 무상원조를 급격히 줄이고, 유상원조로 이를 대체하기 시작하면서 삼백산업은 불황을 맞았다. 원조의 축소로 한국 경제가 큰 혼란에 빠졌으며, 특히 원조 물자, 원조 자금에 전적으로 의존해온 삼백산업은 더 큰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1960년대로 접어들면서 시중 환율보다 절반 가까이 저렴하게 달러를 이용하던 특혜도 폐지되었으며, 원료 농산물은 기존에 지정된 “실수요자” 외에 무역상과 여타 제조업체까지 참여하는 공판을 통해 배분되었다. 더구나 1960년 4월 혁명을 계기로 경제적, 경제외적으로 특혜를 받았던 부정 축재자를 상대로 규탄 여론이 일면서 삼백산업 업계는 사회적으로도 어려운 상황을 맞았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과잉 설비 문제였다. 생산성 제고 없이 무리하게 설비만 늘렸던 업체들은 갑작스러운 비용 증가와 매출 정체, 자금 융통의 제한에 설비 투자액을 상환하지 못하고 도산하거나 합병당했다. 1950년대 말 설비는 상당 규모로 늘어났지만, 설탕 외 면직물과 밀가루의 수요는 이미 정체되는 추이를 보이고 있었다. 한국 정부가 보유한 외환을 활용해 삼백산업 지원에 나섰지만, 종전의 미 원조 자금에 비해 규모는 한정적이었다. 원조에 의존한 삼백산업은 미국의 원조 정책이 바뀜에 따라 일대 재편을 면할 수 없게 되었다.

1950년대 말, 1960년대 초를 거치면서 삼백산업은 미국의 원조 자금이 아니라 해외 민간 자본으로부터 자본을 끌어오게 된다. 또한 1950년대 후반 불황을 맞게 된 원인으로 협소한 한국 시장을 강조하며 해외 시장 개척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게 된다. 이는 1960년대 이후 한국 기업들의 외국 자본, 해외 시장에 뛰어드는, 이른바 자본축적 전략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또한 1950년대 삼백산업은 1960년대 식품 가공업, 화학섬유공업으로 확장되며 산업구조 고도화에 기여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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