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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마을운동

새마을을 가꾸세, 우리 힘으로만

1970년

새마을운동 대표 이미지

새마을 정신이라는 깃발에서 작업을 하는 사람들

국가기록원

1 개요

새마을운동은 1970년부터 시작된 범국민적 지역사회 개발운동으로, 근면·자조·협동을 내세워 주민들을 동원한 운동이다. 새마을운동의 성격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낙후되어 있던 농촌지역 개발정책으로 보는 견해, 도시지역까지 포함하는 사회개발의 일환으로 보는 견해, 총체적인 국가발전을 지향하는 범국민운동으로 보는 견해 등이 있다. 분명한 것은 새마을운동은 몇십 년간 지속되면서 수차례 변화를 겪었기 때문에, 그 실체가 고정되어 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정부의 지원 아래 농촌개발사업으로 시작했지만 공장·도시·직장 등 점차 한국사회 전체의 근대화를 지향하는 방향으로 확장되었다가 80년대 이후 정부 지원이 감소하면서 자연스럽게 영향력이 줄어들었다.

2 새마을운동의 배경

1950년대 내내 농민들에게 물가상승의 부담을 전가하는 한국정부의 농업정책과 미국원조를 통한 대규모의 잉여 농산물 도입이 진행된 결과, 이승만 정권 말에 이르러 농가수지는 더욱 악화되고 농촌경제의 몰락이 심각한 문제로 떠올랐다. 그랬기 때문에 5·16 군사정변 직후 등장한 군사정부는 중농(重農) 정책의 기치를 내세우며 농어촌 고리채 정리사업을 추진하였지만, 실효성 있는 성과를 내지는 못하였다. 게다가 2차 산업에 초점을 맞춘 경제개발계획을 본격적으로 추진하면서부터는, 농촌 지역을 소외시킨 불균형 개발이 진행되면서 1960년대 후반으로 갈수록 도농 격차가 커지고 이농(離農) 현상도 심각해졌다.

정권이 추진하던 경제개발 프로젝트에서 농촌이 소외되는 상황은 단순히 지역 불균형 발전의 차원을 넘어선 정치 문제이기도 했다. 이전 자유당 집권 당시부터 뿌리깊은 여촌야도(與村野都) 경향에 힘입어, 이 시기에도 농촌은 집권여당의 전통적 지지 기반이었다. 곧 농촌문제가 대두하는 상황은 정권 차원에서 정치적 불안 요소이기도 했다. 특히 1969년 3선 개헌과 1971년 대선을 앞두고 농촌지역에서 마을을 매개로 한 주민동원 체제를 구축하여 공화당 지지율을 관리해줄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때마침 과잉 생산된 시멘트를 소비할 방법을 찾고 있던 정부는 잉여 시멘트를 활용하여 농촌지역 주거환경을 정비하는 사업에 착수했다.

그리하여 시작된 새마을운동은 시작 단계부터 국가원수의 정치적 의지에 강하게 좌우되었으며, 본격적으로 진행되는 과정에서는 1972년부터 시작된 유신체제와 강하게 연동되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이처럼 새마을운동은 1960년대 후반에서 70년대 초반에 이르는 시기의 정치적 국면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지만, 농촌지역 개발이라는 발상이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193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일제가 조선농촌을 재편성하여 농민들을 황국 신민으로 동원하려고 했던 농촌진흥운동이 있었고, 1950년대에도 여전히 지역사회 개발사업이 산발적으로 시도된 바 있다.

3 새마을운동의 전개과정

1970년 4월, 박정희 대통령은 전국 지방장관회의에서 농촌 자조노력의 진작 방안을 연구하라고 지시하면서 ‘새마을 가꾸기’를 언급했고, 이것이 국가정책 차원의 사업으로 시작되었다. 초기 새마을 가꾸기 운동은 주로 내무부 계통의 관료들이 주도하여 농촌 주민들을 하향적으로 동원하여 농가 지붕개량이나 앰프설치 등 주로 마을 환경미화를 추진하는 방식으로 시행되었다. 전국의 개별적인 자연촌락을 대상으로 사업지침을 하달하는 방식이었고. 이후에 이론적·실제적인 뒷받침을 행하고 공무원들을 훈련시키는 식으로 접근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1970년 10월부터 1971년 6월까지의 겨울철 농한기를 이용하여 전국의 3만 3,267개 마을에 시멘트를 335부대씩 무상으로 지원하고, 각 마을의 주민이 협동하여 환경 개선사업을 추진하도록 하였다. 이들 마을에서는 길을 확장하거나 공동 빨래터 혹은 우물을 설치하는 등 주로 환경미화 사업에 착수하였다. 그 외에도 지붕을 볏짚 대신 슬레이트 또는 함석으로 대체 개량하는 사업, 담장 바로잡기 사업, 마을 안길 정비 사업 등이 주된 사업이었다. 이후 성과가 우수한 16,600개 마을에 시멘트 500포와 철근 1톤을 지급하였다. 1971년에는 본격적으로 근면·자조·협동을 새마을정신으로 내세웠고, 1972년 새마을 가꾸기 사업을 새마을운동이라는 전국민적 운동으로 본격적으로 확장하였다.

그리하여 1972년부터는 새마을운동중앙협의회를 설립하였고, 마을별로 새마을지도자를 위촉하여 교육을 실시하고 중심적 역할을 맡겼다. 그러면서 사업내용도 애당초의 환경개선의 범위를 넘어 농민들의 의식계발, 소득증진 등을 포괄하는 종합적인 범위로 확장했다. 1973년 이후부터는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관(官)과 민(民)을 연결하는 조직을 구성하였다. 내무부 지방국에 새마을지도과를 설치하고, 새마을 담당관 및 계획분석관을 두도록 했다.

농촌에서 성과가 나타나자 1974년부터 공장 새마을운동을, 1976년부터 지역·학교·직장에 거점을 둔 도시 새마을운동을 전개하며 사회 전체의 운동으로 확장시켰다. 특히 도시 새마을운동의 경우 소비절약의 실천, 준법질서의 정착, 시민의식의 계발, 새마을청소의 일상화, 시장 새마을운동의 전개, 도시녹화, 뒷골목 정비, 도시환경 정비, 생활오물 분리수거, 그리고 도시 후진 지역의 개발 등을 중심으로 진행했다. 또한 유신 정권 말기에는 ‘새마음’운동이 시행되었는데, 이는 육영수 사후 영부인 역할을 대행하던 박근혜가 총재가 되어 진행한 일종의 정신운동이었다. 이후 새마을운동은 점점 분화되어 지역 새마을운동, 부녀 새마을운동, 직장 새마을운동, 공장 새마을운동, 새마을 청소년운동, 새마을 체육운동, 새마을금고 운동, 학교 새마을운동, 새마을 유아원운동까지 등장했다.

4 새마을운동의 성격

1970년대 새마을운동은 주거환경 개선, 농가소득 증대, 농촌주민의 의식개혁을 주요 과제로 삼았다. 무엇보다 주거환경 개선을 위해서는 마을 길을 확장하고, 지붕 및 담장 개량을 포함한 주거시설 개량을 추진했다. 뿐만 아니라 상수도 등 마을 내 공동 인프라를 구축하고, 마을회관 등 공동시설을 건립했으며, 보다 실질적으로 소득을 증대하기 위해서 농로를 개보수하고, 농지를 정리하는 한편 하천을 정비하기도 했고, 나아가 종자 개량, 공동작업장 운영, 계 및 품앗이 장려 등의 사업이 실행되었다. 의식개혁을 위해서는 마을 주민들을 대상으로 새마을 교육을 실시하는 한편 절약, 협동, 퇴폐근절 등의 가치를 강조하였다.

사업은 마을 유지집단을 중심으로 주민들을 공동의 목표 아래 통합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고, 주민들의 노동을 무상으로 동원할 뿐 아니라 부지를 마련하기 위해 개인소유의 토지를 일방적으로 상납받기도 했다. 이 과정은 마을마다 자생적으로 존재했던 농촌 운동가들의 성과를 국가적으로 전유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성과를 올린 이들에게는 훈장을 수여하고 해외연수 기회를 부여하는 등 적극적으로 포섭하는 작업이 뒤따랐다. 나아가 경제적인 반대급부가 제공되거나 공화당 정치운동과 밀착하기도 했는데, 마을 이권과 선거운동이 거래되는 식이었다. 물론 이와 같은 정권과의 유착관계에도 불구하고, 새마을지도자 혹은 새마을부녀회와 같은 제도는 그동안 정치에서 배제되어 온 농촌지역 주민들, 특히 여성들이 중앙정치와 연결을 갖는 드문 경험이기도 했다.

새마을운동은 1970년대 초반, 주거환경 정비와 마을 환경미화에는 가시적인 성과를 보였지만, 사업 범위를 확장하고 농가수지 개선과 같은 근본적인 문제에 접근하기 시작하자 성과를 내기 힘들었다. 특히 식량 증산을 목표로 다수확 품종인 통일벼를 강제로 보급하는 과정에서 새마을운동이 가지고 있던 관료주의와 전시행정의 문제점 등이 극명하게 드러났다. 미질(米質)이 좋지 않아 농민들이 재배를 꺼렸음에도 현장의 공무원들은 강압적으로 할당량을 채우기에 급급했다. 게다가 정부 지침을 따르지 않으면 제대로 자라지 못하는 품종이었고, 못자리 만들기부터 거름 주는 시기까지 정부가 지침을 내렸다. 결국 1978년 도열병으로 피해가 극심했던 이후 보급이 쇠퇴했다. 무엇보다 근본적으로는, 정부 정책의 산물인 불균형 성장의 결과를 단순히 농민의 역량 문제로 환원한다는 점에서 새마을운동의 한계는 명백했다.

5 박정희 이후의 새마을운동

1980년대에는 제5공화국 출범과 함께 그동안 관이 주도하던 새마을운동을 민간주도형으로 전환하는 목적 하에 「새마을운동조직육성법」에 의하여 새마을운동중앙본부가 설립되었다. 하지만 외형상으로 민간주도였어도 실제로는 반관반민(半官半民) 체제로 운영되었으며, 정권 유지에 복무하는 관변운동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특히 전두환 정권 시기에 들어 새마을운동에 대한 정부 예산이 축소되자, 운동의 동력이 약화되고 활동이 위축되었다. 결국 새마을운동중앙본부는 방만한 운영과 정권과의 유착관계로 전두환 정권 말기부터 문제로 떠올랐다.

급기야 정권이 종결한 직후인 1988년 열린 5공 청문회에서, 새마을운동중앙본부는 비리의 온상으로 지목되었고, 이른바 ‘5공 비리’의 상징이 되었다. 그리하여 명칭도 ‘새마을운동중앙협의회’로 대체되었고, 기구조직도 대폭 정리·조정되었다. 1989년에는 새마을운동센터를 만들어 도덕성 회복과 의식개혁을 내세웠으며, 1993년에는 제2단계 새마을운동을 선포하기도 했다. 2011년 국회는 「새마을운동조직 육성법」개정을 통해 4월 22일 ‘새마을의 날’을 국가 기념일로 제정하였다. 또한 새마을운동은 저개발국가의 발전모델로 선정되어 2010년까지 아시아, 아프리카 등 103개 나라 5만여 명이 교육을 받기도 하였다.

2000년 이후 한국정부는 국제사회에 새마을운동을 지역사회개발 운동의 성공 사례로 홍보하는데 주력했다. 2000년에는 새마을운동중앙협의회의 명칭을 새마을운동중앙회로 바꾸고, 유엔의 비정부 기구(NGO)로 가입하였다. 2003년부터는 필리핀·콩고·몽골·러시아·중국·베트남·아프가니스탄·우간다·미얀마 등 아프리카·아시아 저개발국에 적극 새마을운동을 보급하였다. 특히 한국정부가 공적개발원조사업(ODA)을 시작한 2009년부터는 개발도상국 농촌에 경제발전 경험을 전수한다는 점을 내세웠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새마을 운동이 산업화 시기 정책적으로 의도된 불균형 발전에 따르는 비용을 농촌에 그대로 전가시킨 채 농민들을 당대의 지배논리 안으로 포섭하려는 과정이었다는 점에서, 다른 개발도상국의 사례에 직접 적용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점에 대체로 동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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