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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올림픽

손에 손 잡고, 벽을 넘어서

1988년

서울올림픽 대표 이미지

제24회 하계 올림픽(서울올림픽, 1988) 개막식

국가기록원

1 개요

제24회 서울올림픽은 1988년 9월 17일부터 10월 2일까지 16일간 개최되었다. 1981년 독일 바덴바덴에서 개최 도시로 선정된 이후 서울시를 넘어 전 국가적인 차원에서 서울올림픽의 준비가 진행될 만큼 한국 현대사에 있어 중요한 사건으로 기록된 행사이다. 서울올림픽은 비단 한국의 입장에서만 중요한 사건이었던 것이 아니라, 당시 소련과 미국이라는 양극의 대립으로 유지되던 냉전체제의 해소 시기와 맞물리면서 냉전 해체의 상징적 사건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서울올림픽에서 한국은 금메달 12개, 은메달 10개, 동메달 11개를 획득하여 종합순위 4위를 기록하였다.

2 서울올림픽 유치 및 준비과정

올림픽을 서울에 유치하자는 아이디어는 1979년부터 등장했다. 처음 올림픽 서울 유치 아이디어를 낸 것이 누구인지는 관계자마다 기억하는 바가 조금씩 다르지만, 1979년 9월 25일 박정희 대통령의 재가를 거쳐 정부·여당 연석회의를 통해 올림픽 유치 안건이 최종 통과되었다. 그리고 정상천 서울시장이 10월 8일 세종문화회관 대회의실에서 국내외 기자회견을 열고 제24회 올림픽대회의 서울 유치 계획을 정식으로 공표하면서 세간에 알려지게 된다. 올림픽을 유치하겠다는 아이디어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은 경제발전을 통해 국가의 여력이 생겨났고, 1978년 제42회 세계 사격 선수권대회, 1979년 세계 여자농구 선수권대회 등 국제스포츠행사를 치른 경험이 축적되면서 만들어진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0·26 사태, 12·12 사태, 5·18 광주민주화운동 등으로 한국의 정치적·사회적 상황이 급변함에 따라 올림픽 유치에 대한 회의적인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1980년 취임한 조상호 대한올림픽위원회(KOC) 위원장은 올림픽 유치에 따른 타당성을 재검토하였고, 올림픽 개최를 통해 국가의 대외 이미지를 개선하고 공산국 대상의 외교에 결정적 계기를 마련하게 될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며 국제올림픽위원회(IOC)에 유치 신청서를 제출하기로 결정하고 문교부의 동의도 얻었다. 그러나 서울시는 1988년까지 필요한 제반 시설을 구비할 수 없을 것으로 판단하여 유치 불가 통보를 전달하였다. 당시 국무총리이던 남덕우도 ‘올림픽 망국론’을 주장할 정도로 정부 부처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하였다.

하지만 전임 대통령이 공표한 일을 별다른 이유 없이 변경할 수 없다는 것을 근거로 전두환 대통령이 유치 결의 의사를 밝힘에 따라 올림픽 서울 유치는 다시 추진됐다. 결국 서울과 일본의 나고야가 올림픽 유치를 신청하였고, 두 도시 간의 유치 경쟁이 본격화하였다. 올림픽 개최도시 발표는 독일의 바덴바덴(Baden-Baden)에서 이뤄질 예정이었고, 한국 측에서는 박영수 서울시장을 단장으로 하는 대표단이 파견되었다. 바덴바덴에 도착한 대표단은 제안연설 준비와 함께 IOC 위원들을 대상으로 유치활동을 전개하였다. 1981년 9월 30일 진행된 투표 결과 유효표 79표 중 52표를 획득한 서울이 개최 도시로 확정되었다. 이는 많은 이들의 예상을 뒤엎은 결과였는데, 대표단의 유치활동 외에도 개발도상국들이 비슷한 처지에 있던 한국에 지지를 표명한 것이 큰 역할을 했다고 평가받고 있다.

개최도시로 서울이 결정된 후, 올림픽 운영을 위해 설립된 서울올림픽대회 조직위원회(SLOOC)를 중심으로 올림픽의 준비가 진행되었다. 원칙적으로 올림픽은 개최 도시가 주체가 되어서 예산을 편성하고 준비해야 하지만, 국가적인 행사로 인식되는 측면이 컸고, 정부 또한 집중적으로 지원을 했던 만큼 서울을 넘어 대한민국 전체가 움직이며 올림픽을 준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미 공사가 진행 중이었던 서울올림픽주경기장(잠실주경기장)을 비롯하여 각종 경기장을 마련하는 것은 물론, 올림픽에 참가하는 선수단의 숙소로 사용될 선수촌 건설, 올림픽 기간에 급증할 관광객을 대비한 숙박 및 교통시설 정비 등의 준비가 필요했다. 이외에도 서울과 주변의 여러 부문에서 대규모 환경 정비가 추진되었다. 올림픽공원과 아시아공원 같은 대규모 행사를 상징하는 공간도 조성되었다.

올림픽의 주요 공간인 잠실지역의 정비와 함께 한강종합개발이 추진되었다. 한강 및 그 연안에 대한 개발사업은 1960년대 후반부터 시작되었지만 서울올림픽 유치를 계기로 본격화된 것이다. 이는 무엇보다도 한강 연안의 경관을 통해 한국의 경제발전과 도시화를 재현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저수로 정비, 분류하수관로 설치, 시민공원 조성, 올림픽대로 정비 등이 한강종합개발사업의 골자였다. 1986년 아시안게임 이전에 공사를 완료하고자 했지만, 실제 공사는 1987년 말까지 계속되었으며, 이마저도 매우 급하게 진행된 것이었다.

한국 정부와 서울시가 올림픽을 준비한다는 명목으로 대규모 재개발을 강력하게 추진함에 따라 많은 이들의 삶의 터전을 잃게 되기도 하였다. 대표적으로 언급되는 사례가 노원구 상계동에서 있었던 철거민들의 투쟁이다. 이 일대는 1960년대 중반부터 서울시가 추진한 ‘불량주거지 정비사업’에 따라 밀려난 철거민들과 도시빈민들이 거주하는 지역이었다. 1985년에 지하철 4호선이 놓이면서 재개발이 진행되었고, 철거를 둘러싼 갈등은 점차 고조되었다. 강제철거는 조금씩 진행되었고, 1987년 4월 14일 서울시의 행정대집행으로 세입자들이 설치한 천막까지 완전히 철거되었다. 소위 ‘불량주거지’라 불리던 지역에 대한 재개발은 꾸준히 강행되던 일이었지만 국가적 행사인 서울올림픽을 위한다는 명목하에 여론을 등에 업고 더욱 강력하게 추진될 수 있었다. 서울을 방문할 외국인들에게 깨끗하고 발전된 모습만을 보여줘야 한다는 논리가 힘을 얻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서울올림픽은 서울의 도시 경관을 바꾸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 물리적인 변화뿐만 아니라 사회질서를 어지럽히는 행동이라고 여겨진 것들에 대한 단속도 폭넓게 이뤄졌다. 이로 인해 한국인들의 생활방식에도 많은 변화가 생기게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보인 정부의 강압적인 모습들은 서울올림픽이 가진 어두운 측면이라고 할 수 있다.

3 서울올림픽 진행과 결과

1988년 8월 23일 그리스에서 채화된 성화는 8월 27일 오전 11시 제주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올림픽 성화는 22일 동안 1,467명의 주자를 거쳐 4,167.8km를 달려 9월 16일 서울 시청 앞 광장에 안치되었다. 이튿날인 9월 17일 아침 성화는 서울올림픽주경기장으로 봉송되었다. 또한 서울올림픽 개막 전날인 9월 16일에는 여의도 한강시민공원 특설무대에서 경축 전야 대축전인 ‘손에 손잡고’가 KBS 주최로 펼쳐졌다. 3부로 진행된 전야제에는 10만 명이 넘는 관중이 모여들어 국내 공연 사상 최대 규모의 공연을 보여주었다.

제24회 서울올림픽은 1988년 9월 17일부터 10월 2일까지 16일간 개최되었다. 서울올림픽에는 당시 IOC 회원 167개국 중 북한 등 일부 회원국을 제외한 160개국이 참가했다. 이는 당시 유엔 회원국보다 1개국이 더 많은 숫자였으며, 올림픽 역사상 가장 많은 국가가 참여한 올림픽으로 기록되었다. 참여한 선수 및 임원 숫자 역시 사상 최대 규모를 기록한 13,304명이었다.

서울올림픽에서는 23개 정식종목과 3개 시범종목, 2개 전시종목의 경기가 치러져서 금메달 241개, 은메달 234개, 동메달 264개가 수여되었다. 한국은 서울올림픽에서 금메달 12개, 은메달 10개, 동메달 11개로 소련, 동독, 미국에 이어 종합순위 4위를 차지했다. 과거 참가했던 올림픽에서 1~2개의 금메달에 그쳤던 것에 비추어보면 엄청난 성과였다. 당시 전두환 정권과 노태우 정권에 비판적이었던 인물들조차도 이 놀라운 결과에 대해서는 찬사를 아끼지 않을 정도였다.

서울올림픽은 33개의 세계 신기록, 5개의 세계 타이기록, 227개의 올림픽 신기록, 42개의 올림픽 타이기록이 쏟아져 나올 만큼 스포츠 행사로서도 큰 성과를 거두었다. 참가자들의 숫자가 최대 규모를 기록했던 것도 한 가지 요인이었겠지만, 사전 준비가 충실했던 것 역시 중요한 요인이었다. 그리고 이는 대회 진행을 준비하고 실행했던 관계자들과 수많은 자원봉사자들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서울올림픽은 대회 자체도 성공을 거두었으며, 올림픽을 개최한 서울과 한국으로서도 국제적인 위상을 제고할 수 있었던 좋은 기회로 작용하였다.

4 서울올림픽이 갖는 의미

서울올림픽에 160개국의 회원국이 참가를 했다는 것은 당시 시대적 배경에서 커다란 의미를 갖는 사건이었다. 앞선 1980년 모스크바올림픽과 1984년 로스엔젤리스올림픽이 흔히 말하는 반쪽짜리 올림픽으로 치러졌기 때문이다. 1980년대 초반은 신냉전이라고 표현될 정도로 미국과 소련으로 대표되는 양극의 갈등이 심했다. 이를 촉발한 것은 1979년 12월에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사건이었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미국은 소련에 대한 곡물과 하이테크 상품 수출 금지, 문화과학교류 단축, 군사비 증액과 군사적 대응 준비,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이슬람 반군 지원이라는 강경책을 내놓았다. 그리고 1980년에 열릴 예정이었던 모스크바올림픽 보이콧을 선언했다. 미국의 강경정책은 계속 이어졌고, 1984년 로스엔젤리스올림픽에는 소련을 비롯한 공산권 국가들이 참가를 거부하기에 이르렀다. 소련과 미국의 대립이 소련과 미국의 도시에서 열리는 올림픽에도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소련에서는 고르바초프(Mikhail Sergeyevich Gorbachev)라고 하는 새로운 지도자가 등장하면서 여러 개혁 정책을 펼쳐나가기 시작했고, 외교에서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1980년대 중반부터 한국이 공산권 국가를 대상으로 경제교류를 키워가고 외교적 접촉을 넓혀가는 것도 영향을 미치면서, 서울올림픽은 이전의 두 올림픽과는 다른 분위기를 띠게 된다. 소련이 서울올림픽의 참석을 결정하고, 중국 또한 서울올림픽의 성공을 은근히 지원하면서 공산권 국가의 대대적인 참가가 이뤄지게 되었으나, 북한은 공산권 국가의 보이콧을 주장하며 서울올림픽에 불참하였다.

이처럼 서울올림픽은 1980년대 초반의 신냉전을 지나 1980년대 후반 이후의 탈냉전으로 넘어가는 전환기에 있었던 하나의 상징적 사건이었다. 서울올림픽대회 조직위원회에서도 서울올림픽의 주요 정신으로 ‘평화’를 강조했고, 이는 ‘손에 손잡고’라는 올림픽 주제가에서도 잘 드러난다. ‘손에 손잡고 벽을 넘어서’로 대표되는 주제가의 후렴구처럼 서울올림픽은 동서의 벽, 냉전의 벽, 이념의 벽, 인종의 벽, 남녀의 벽, 빈부의 벽 등을 넘어 세계가 하나 되는 모습을 그려내고자 했다. 서울올림픽 이후 소련이 해체되고 독일이 통일되면서 오랜 시간 유지되던 냉전체제는 해소되었다. 한국 정부의 공산권 국가 및 미수교 국가를 대상으로 한 외교활동도 더욱 활발히 이루어졌다. 이런 측면에서 서울올림픽이 냉전의 해체에 간접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할 수 있다.

서울올림픽은 패럴림픽(장애인올림픽)의 역사에서도 하나의 전환점이 되는 대회였다. 패럴림픽은 하계 및 동계올림픽과 같은 해에 다른 개최지에서 열렸는데, 서울올림픽 때부터 올림픽이 끝난 후 올림픽이 개최된 도시에서 올림픽 때 사용한 시설을 이어받아 개최하는 방식으로 바뀌어서 정착되었다. 서울올림픽 이후 1992년 바르셀로나, 1996년 애틀랜타도 같은 방식으로 진행되었고, 최종적으로 2001년 IOC와 국제장애인올림픽위원회(IPC)는 올림픽과 패럴림픽을 나란히 열기로 합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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