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사 연대기
  • 현대
  • 신탁통치 반대운동

신탁통치 반대운동[信託統治 反對運動]

해방정국의 정치지형을 가르는 분수령

1945년

신탁통치 반대운동 대표 이미지

신탁통치 반대 집회

전자사료관(국사편찬위원회)

1 개요

1945년 12월 말,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한국 문제 해결 방안을 명시한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이 국내에 전해지며 해당 결정에 반대하는 신탁통치 반대운동이 각계각층에서 광범위하게 전개되었다. 모스크바 결정이 국내에 전해지는 과정에서 우익 언론사들의 보도를 중심으로 해당 내용의 왜곡이 발생했고, 이에 따라 신탁통치 반대운동은 주로 우익 세력이 주도하는 반소반공(反蘇反共)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한편 초기에는 신탁통치 반대를 주장했던 좌익 세력은 곧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 지지로 입장을 선회했고, 이후 한국 정치의 좌우대립이 본격화되었다.

2 신탁통치 반대운동의 배경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전후 질서를 기획하는 과정에서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 실시를 구상하고 있었다. 신탁통치안은 미국의 전후 기획 속에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구(舊)식민모국들과의 이해관계를 조정해내고, 종속국 인민들의 민족운동을 완화시켜 이 지역에서 미국경제의 요구를 우선적으로 보장하는 방안으로서 전세계 모든 식민지, 종속지역에 광범위하게 적용하기 위해 고안되었다. 이에 따라 미국은 일본의 식민지였던 한국에도 신탁통치 실시를 계획했으며, 신탁통치 하에 제한된 범위의 자치정부 시기를 거친 이후 한국이 독립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질서를 논의하기 위해 열린 강대국 회의인 카이로회담, 얄타회담, 포츠담회담 등에서 한반도 신탁통치 실시안을 관철시키고자 했다. 이에 따라 카이로회담에서는 ‘적당한 절차를 거쳐’(in due course) 한국을 자주독립시킬 것이 결의되었고 얄타회담에서는 루즈벨트와 스탈린 간에 한반도 신탁통치에 대한 구두합의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한국에 신탁통치를 실시한다는 합의 외에 강대국 회담에서 전후 한국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신탁통치 실시를 비롯해 전후 한국 문제 해결을 위한 보다 구체적인 논의가 이루어진 것은 일본의 항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종전되고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를 분할점령하고 난 이후 개최된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였다. 1945년 12월 6일부터 25일까지 열린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결과, 12월 28일 첫째 한국에 민주임시정부 수립, 둘째 미소공동위원회 조직, 셋째 최대 5년 동안 4개국(미·소·영·중)의 신탁통치, 넷째 2주 내 미소양군 사령부 대표 간의 회의 소집 등의 내용을 골자로 하는 모스크바 결정서가 발표되었다. 이 삼상회의 결정은 신탁통치 실시를 한반도 정책으로서 구상해왔던 미국과 신탁통치보다는 ‘독립적이고 우호적인’ 한국정부의 수립을 통해 자국의 이해관계가 더욱 용이하게 실현될 것이라고 본 소련 간의 협의 결과 도출된 것으로 본래 미국이 의도했던 신탁통치안과는 상당한 차이를 가졌다. 먼저 신탁통치 실시 이전에 한국에 민주임시정부를 수립하도록 하고 4개국 신탁통치의 협정도 이러한 임시정부와의 협의를 통해 제출되어야 한다고 규정하여 한국에 수립될 임시정부의 역할이 중시되었다. 또한 신탁통치 관련 언급이 3항의 후반에 배치됨으로써 그 비중이 약화되었으며 실시 기한도 미국이 기존에 고려했던 10년보다 축소된 5년 이내로 명시되었다. 결과적으로 미소가 합의한 모스크바 결정의 신탁통치 조항은 애매모호해져 구체적인 신탁통치의 내용은 향후 수립될 임시정부의 활동이나 능력에 따라 달라질 수 있었다.

그러나 실제 모스크바 결정서가 발표되기 하루 전날인 12월 27일, 동아일보는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소련의 구실은 삼팔선 분할점령, 미국은 즉시독립 주장’의 내용을 골자로 하는 모스크바 결정에 대한 기사를 보도했다. 모스크바 결정이 공식적으로 발표되기 전에 나온 관측보도로 그 내용 또한 모스크바 결정 내용 중 신탁통치만을 부각시키고, 신탁통치 결정의 책임을 전적으로 소련에게 돌리는 등 오류와 왜곡을 담은 오보 기사였다. 그러나 이 기사가 실제 모스크바 결정의 내용인 것처럼 우익 언론을 중심으로 남한 사회에 널리 퍼졌으며, 특히 36년 간의 일제 식민통치에서 벗어나 즉시 독립을 희망하는 한국인들의 민족감정을 자극했기 때문에 이후 반탁(反託)과 반소(反蘇)를 내세운 대대적인 신탁통치 반대운동이 펼쳐지게 되었다.

3 신탁통치 반대운동의 전개

동아일보 보도 이후, 반소(反蘇)적인 분위기가 만들어지며 우익을 중심으로 신탁통치 반대운동이 치열하게 벌어져 1946년 초까지 계속되었다. 그 중에서도 신탁통치 반대운동에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이를 주도한 것은 김구를 중심으로 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계열이었다. 임시정부는 12월 28일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를 설치하고 임시정부 국무위원회의 지시 하에 민족적 불합작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하였고, 12월 29일에는 각 정당 사회단체 대표들에게 주권을 위임받고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임정법통론(臨政法統論)에 근거한 임시정부 추대운동으로 발전시켰다. 이러한 임시정부의 주도에 따라 각 정치세력 대표들은 전국 군정청 관공리의 총사직, 일체 정당 즉시 해체, 전국민 총파업을 요구하고 ‘신탁통치 배격운동에 협력치 않은 자는 민족반역자로 규정함’이라고 선언하였다.

당시 임시정부가 주도한 신탁통치 반대운동은 한국인들의 민족감정을 자극하여 일반 대중들의 큰 호응을 불러일으켰다. 임시정부의 요구에 따라 군정청 한국인 직원들과 서울시청 직원들이 탁치반대를 위한 총사직을 결의하고 시위행진을 벌였으며 서울시내 경찰서장, 법조계, 조선금융단, 서울변호사회, 서울의사회, 경성대학교 직원, 학술문화단체 등도 신탁통치 반대를 결의하였다. 이러한 신탁통치 반대운동의 열기는 폭력 사태를 유발하기도 하였다. 12월 29일 좌익계의 대변지인 조선인민보사에는 폭력단 약 20명이 침입하여 인쇄공장을 파괴하는 등 테러를 가하였고, 12월 30일에는 미군 상륙 후 정치훈련, 즉 훈정(訓政)이 필요하다고 주장한 한국민주당의 수석총무 송진우가 암살되었다. 이처럼 신탁통치 반대운동은 해방정국의 한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정치적 테러가 시작되는 시발점이기도 했다.

12월 31일, 신탁통치 반대운동은 최고조에 달하여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가 주관한 수만 명이 모인 반탁시위대회가 열렸다. 이 시위에서는 임시정부를 한국의 정부로서 세계에 선포한다는 결의문이 채택되었고 전국총파업이 결의되었다. 또한 임시정부 내무부장 신익희는 ‘현재 전국 행정청 소속의 경찰 기구 및 한인 직원은 전부 본정부 지휘 하에 예속케 함’ 등의 내용을 담은 국자(國字) 제1호와 제2호 ‘포고문’을 발표하였다.

신탁통치 반대운동은 점차 격화되어 임시정부 추대운동으로 발전하고 점차 미군정에 반대하는 운동으로 커져가고 있었다. 이에 미군정은 임시정부 추대운동을 쿠데타로 규정하고 단호한 태도로 저지했다. 미군정의 압력을 받은 임시정부 측은 라디오 방송을 통해 국민들에게 파업을 중지하고 일터로 돌아갈 것을 요청하며 정권접수 시도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후에도 우익 세력을 중심으로 신탁통치 반대운동은 계속되었으며, 미군정은 대체로 신탁통치 반대운동이 미군정에 대한 반대운동으로 발전하지 않는 한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묵인하는 태도를 보였다.

한편, 동아일보 보도 직후에는 우익 세력과 마찬가지로 신탁통치 반대 의사를 보였던 좌익 세력은 1월 3일 발표된 조선공산당의 삼상회의 결정 지지 담화문을 기점으로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 지지로 입장을 선회하였다. 이후 좌익 세력은 신탁통치가 왜 필요한가를 설득하는 작업에 나섰고 이러한 좌익 측의 움직임은 우익 측의 신탁통치 반대운동과 지속적으로 충돌하였다.

4 신탁통치 반대운동의 영향

1945년 12월부터 1946년 초까지 지속된 신탁통치 반대운동은 해방정국의 정치지형을 가르는 분수령이었다.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이 국내에 유입되는 과정에서 신탁통치 결정이 소련에 의한 것으로 왜곡되면서 신탁통치 반대운동은 반소반공(反蘇反共)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이는 당시까지만 해도 좌익에 비해 열세를 면치 못하고 있던 우익세력에게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임시정부를 비롯한 우익세력은 민족감정에 호소력이 컸던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주도함으로써 정국을 주도하고 일반 대중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할 수 있었다. 반면 삼상결정 절대 지지를 내세운 좌익세력은 신탁통치 정국을 거치며 대중적 영향력이 약화되었고 ‘신탁통치 배격운동에 협력치 않은 자는 민족반역자로 규정’한다는 구호 아래 민족반역자로까지 몰리게 되었다.

신탁통치 반대운동은 한국의 정치지형뿐 아니라 정치적 대립구도 또한 변화시켰다. 신탁통치 파동 이전까지만 해도 한국인들 사이에서는 좌우갈등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으나 ‘민족 대 반민족’이라는 정치적 대립구도가 보다 주요한 기준이었고, 민족통일전선에 대한 대중적 요구를 거부할 수 없었기에 좌우 어느 세력도 모두 표면적으로는 연합과 단결을 내걸었다. 그러나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계기로 한국 정치세력 간의 대립구도는 ‘민족 대 반민족’에서 좌우대립으로 변화하였다. 우익 측에서는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계기로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비상국민회의라는 우익연합조직을 결성, 이를 기반으로 미군정의 자문행정기구적 성격을 갖는 남조선대표민주의원을 조직하였다. 반면 좌익 측에서는 이에 대항해 좌익연합조직인 민주주의민족전선을 결성함으로써 한국 정치의 좌우 구분이 정착되었다. 결국 본격화된 좌우대립은 신탁통치 반대운동 도중 벌어진 테러 사건들에 잘 나타나듯이 그야말로 골육상쟁(骨肉相爭)의 격렬한 양상을 띠게 되었다.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