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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한공사와 적산처리

한국 경제체제 형성의 ‘첫 단추’

1948년

신한공사와 적산처리 대표 이미지

군정장관 딘(William F. Dean) 소장이 귀속농지 처리에 관한 법령에 서명하는 모습(1948년 3월 22일)

전자사료관(국사편찬위원회)

1 개요

미군정은 해방 당시 국내에 있던 적산 즉 일본 국공유‧사유 재산을 미군정에 귀속되도록 하였다. 자주관리운동을 제압하고 사회주의 세력의 영향을 차단하며 자본주의 체제 확립의 기초를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이 재산 즉 귀속재산은 크게 농지와 사업체 등으로 분류할 수 있는데, 추정가치 규모는 약 3,053억 원으로 1948년 세출예산 351억 원의 9배에 달했다. 이 중 미군정기에 처리된 가장 주요한 부분은 신한공사가 관리하던 귀속농지였다. 신한공사는 귀속농지 대부분을 관리하는 군정청 산하 법인이었고, 소작료 징수와 식량공출로 군정당국의 식량행정을 뒷받침하였다. 미군정은 한국 정부 수립이 임박한 1948년 3월 신한공사를 중앙토지행정처로 재편하고 귀속농지를 소작인들에게 매각하였다. 유상매각 방식의 이러한 적산처리는 해방 후 대두되었던 무상분배나 국유화 주장을 제압하고 남한 경제체제를 형성하는 ‘첫 단추’가 되었다. 미군정기에 처리되지 않은 사업체 등 귀속재산은 정부 수립 이후 한국 정부에 이관되어 1950년대에 대부분 매각되었다.

2 해방 후 적산처리 문제와 미군정의 대응

적산(敵産, Enemy’s Property)이란 ‘적국의 재산’을 말하는 것으로, 해방 당시 국내에 있던 국공유 및 사유 일본인 재산을 이와 같이 불렀다. 1945년 9월 8일 남한에 들어온 미군은 25일 패전국 재산의 동결 및 이전제한을 규정한 법령 제2호를 공포하였다. 일본 국공유 재산은 미군정이 접수하여 관리하고 민간인 재산은 사유재산권을 인정한다는 내용이었다. 단 일본인 사유재산 매매는 보고하되 60일 이내에 금지 명령이 없을 때 성립되도록 하며, 그 거래대금은 조선은행에 보관하게 하여 매도자의 생활자금에 한하여 인출을 허가하였다. 적산이라도 사유재산권은 존중되어야 한다는 국제법상의 규정과 적산을 몰수하여 연합국 전쟁배상에 사용하려는 미국의 입장이 투영된 것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미군정의 방침은 얼마 가지 않아 바뀌었다. 12월 6일 미군정은 한국 내 일본인 재산권 취득에 관하여 법령 제33호를 공포하였고, 이로써 국공유와 사유를 막론하고 국내에 있던 일본인 재산 전부는 미군정에 귀속되었다.

이 조치의 배경에는 내외 정세 변화와 미국의 전략적 대응이 있었다. 적산은 한국인의 피와 땀으로 이루어진 것이므로 한국인의 소유라는 것이 당시 한국인들의 일반적인 생각이었다. 이를 연합국 전쟁배상에 사용하거나 일본인 사유재산권을 인정하는 것은 한국인 소유를 부정하는 것이었고, 따라서 법령 제2호는 여론의 반발에 부딪혔다. 한편 해방 직후부터 남한에서는 한국인들이 일본인 농지와 기업체 등을 접수‧관리하는 자주관리운동을 전개하였고, 북한 지역에서는 소련군정이 일본 정부‧민간인 재산을 몰수하여 무상분배 내지는 국유화하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국내의 일본 국공유‧사유 재산을 미군정에 귀속시킨 법령 제33호는 이런 상황에서 나온 조치였다. 자주관리운동을 제압하고 사회주의 세력의 영향을 차단하는 동시에 향후 자본주의 체제를 확립하는 방식으로 적산을 한국인들에게 이전할 수 있도록 기초를 마련한 것이었다. 이렇게 미군정에 귀속된 재산을 귀속재산(歸屬財産, Vested Property)이라고 한다.

3 신한공사의 성립‧운영과 귀속농지 처리

귀속재산은 크게 농지와 사업체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이 중 미군정기에 처리된 가장 주요한 부분은 귀속농지였다. 귀속농지는 논 20만 정보, 밭 6만 정보, 기타 5만 5천 정보 수준으로 남한 전체 농지의 15.3%를 차지했다. 이 귀속농지를 관리한 조직이 신한공사(新韓公社, The New Korea Company)였다.

신한공사는 식민지 개척 사업에 종사하던 일제의 국책회사인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殖株式會社, 이하 동척)의 후신으로 설립되었다. 미군정은 1945년 10월 동척을 접수하여 신한공사로 이름을 바꾸고 운영을 장악하였다. 12월 19일에는 관재령 제3호를 공포하여 미군 및 군정청에 접수된 농지 외의 모든 귀속농지를 신한공사가 관리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1946년 들어 2월 21일에 법령 제52호를, 5월 7일에 이를 개정한 법령 제80호를 공포하여 신한공사를 공식적으로 창립하였다. 그해 하반기에는 신한공사에 성업사(成業社) 등 구 일본 농업회사 농지를 편입하는 한편 신한공사의 공업시설과 광산 등 비농업자산을 군정청으로 이관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이로써 신한공사는 기존의 동척 소유 농지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귀속농지를 관리하는 군정청 산하 법인으로 재편되었고, 이관과 접수 등을 통해 신한공사가 관할하는 귀속농지는 이후에도 꾸준히 늘어났다.

신한공사는 본사와 6개의 주요 지점(서울, 대구, 대전, 목포, 이리, 부산), 212개소의 농장사무소를 가진 조직이었다. 2,862명의 직원과 3,359명의 농감(農監: 지주를 대신하여 소작인을 지도감독하고 소작료를 징수하는 사람)이 여기에 속해 있었고, 본사와 6개 지점에 있는 10여 명의 미국인 관리자가 6,000명이 넘는 한국인 종사자들을 통제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신한공사는 귀속농지를 조사‧접수하였고, 농민들과 소작계약을 체결하였으며, 소작료를 징수하는 한편 미군정의 식량공출을 대행하였다. 신한공사는 미군정 식량수집계획의 거의 1/3을 떠맡아 수행함으로써 군정당국의 식량행정을 뒷받침하였다.

미군정은 1946년 3월 귀속농지 매각 계획을 발표한 이래 농지개혁의 첫 단계로 이를 준비하였다. 1947년 과도입법의원에서 귀속농지와 한국인 소유 농지를 포괄한 토지개혁 입법 논의가 있었으나 무위로 돌아갔고, 그 이후 미군정은 귀속농지만을 대상으로 하는 계획을 추진하였다. 1948년 3월 22일 법령 제173호와 제174호를 공포하여 신한공사를 중앙토지행정처로 재편하고 귀속농지를 매각한 것이다. 해당 농지의 소작인을 우선적인 대상으로 하고 매각 귀속농지의 대가를 연간 주생산물 생산량의 300%로 하며 20%씩 15년간 현물로 상환하는 방식이었다. 중앙토지행정처의 귀속농지 매각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8월까지 신한공사 소작인 587,974호 중에서 약 85%가 매입계약을 체결하였다.

4 의미와 영향

미군정기의 귀속재산 처리는 해방 후 대두되었던 무상분배나 국유화 주장을 제압하고 불하(拂下: 국가나 공공단체의 재산을 민간에 팔아넘기는 일)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귀속농지 대부분이 해당 농지의 소작인을 우선으로 하여 분할상환 방식으로 매각되어 정부 수립 후 이루어질 농지개혁의 선행사례로 작용하였다. 귀속사업체 중 일부도 그 관리인이나 임차인을 우선으로 하여 분할상환 방식으로 매각되어 정부 수립 후 귀속재산 처리의 선례가 되었다. 미군정기 적산처리가 남한 경제체제를 형성하는 ‘첫 단추’가 되었던 것이다. 미군정기에 처리되지 않은 귀속재산은 1948년 9월 11일 체결된 한미 재정 및 재산에 관한 협정에 의해 한국 정부로 이관되었다. 이승만정부는 1949년 12월 귀속재산처리법을 제정하였고, 1951년부터 본격적인 불하를 시작하여 1950년대 말까지 주요 귀속재산의 대부분을 처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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