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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의 등장과 주거생활 변화

실외에서 실내로, 땅에서 하늘로

미상

아파트의 등장과 주거생활 변화 대표 이미지

마포아파트 전경(1965년)

국가기록원

1 개요

아파트는 공동주택 양식의 하나로 현재의 한국 도시 주거 형태를 대표하는 것이다. 경제개발과 함께 진행된 산업화·도시화로 많은 인구가 서울을 비롯한 도시로 몰리기 시작하였고, 이는 심각한 주택문제를 불러 일으켰다. 정부는 주택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의 하나로 아파트를 짓기 시작했다. 대한주택공사가 1962년에 서울시에 마포아파트를 건립한 것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아파트가 세워지기 시작했고,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곳곳에 만들어졌다. 한국 아파트의 역사는 도시의 성장과 함께 변화해온 역사라고 할 수 있으며, 아파트는 한국인들의 주거생활 양식이 변화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2 아파트 건립의 역사

‘아파트’는 영어 단어 아파트먼트(apartment)에서 유래한 단어라고 이야기되지만, 현재 한국에서 통용되는 아파트는 영어 단어의 원래 뜻과는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표준국어대사전에 ‘아파트’라는 단어가 등재되어 있다는 것을 볼 때, 아파트는 한국만의 독특한 주거양식을 표현하는 단어라고 할 수 있다. 표준국어대사전의 정의를 빌리자면 아파트는 공동주택 양식의 하나로서 ‘5층 이상의 건물을 층마다 여러 집으로 일정하게 구획하여 각각의 독립된 가구가 생활할 수 있도록 만든 주거형태’를 일컫는다.

식민지 시기인 1925년에 발간되던 잡지에 ‘아파트먼트’에 대한 기사가 게재되면서 한국에서 처음으로 아파트라는 용어가 등장하였고, 1931년 잡지 『삼천리』에 경성의 여성 합숙소가 ‘아파-트’라고 소개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시 아파트는 가족들이 생활하는 집이라기보다는 일시적으로 숙박을 해결하는 장소로 여겨졌으며, 형태 또한 현재 흔히 생각하는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한국에서 지어진 최초의 아파트는 1932년에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에 일본인이 건립한 유림아파트라고 할 수 있다. 그 후 해방과 한국전쟁 등으로 공백기를 거쳐 1956년에 한미재단에서 지은 시범단지의 일부인 행촌아파트가 세워졌고, 1958년에 대한주택공사가 서울 성북구 종암동에 종암아파트를 건립하였다. 이처럼 1960년대 이전에도 우리나라에서 아파트 공급은 있었지만, 본격적인 공급 시작 시기는 1962년의 마포아파트를 기점으로 잡는 것이 일반적이다. 마포아파트가 우리나라에서 단지 형태로 만들어진 최초의 아파트로서, 오늘날 일반화되어 있는 단지 형태 아파트의 효시로 평가되기 때문이다.

1960년대 세워진 아파트들은 영세민과 서민을 대상으로 한 소규모의 아파트가 많았으며 풍전아파트, 회현시범아파트, 효창아파트 등이 이러한 부류에 속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196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서울시 도심 재개발 사업이 추진되면서 도심부의 무허가 건물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상가 아파트 또는 고층 아파트가 건설되기 시작했다. 이들 아파트는 고가의 아파트로 중산층 이상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1960년대 후반 들어 정부는 서민들을 위한 아파트뿐만 아니라 중산층을 위한 주거지 확보가 필요하다는 판단 하에 서울 강남 지역에 대규모 집단 주거지 개발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대한주택공사는 마포아파트 건설 때부터 중산층을 대상으로 한 아파트의 건설을 추진했고, 서울뿐만 아니라 지방으로까지 개발 영역을 확장해 나갔다. 마포아파트 이후 선보인 아파트 단지는 서울의 한강아파트 단지였다. 한강아파트는 동부이촌동의 공무원아파트, 한강외인아파트, 한강민영아파트 등을 포함한 3,220호의 대규모 단지로 조성되었다. 1970년대에 대한주택공사는 강남 개발과 발맞추어 서울 반포아파트를 건립했고, 1974년에는 AID(Agency for International Development, 국제개발처) 차관을 도입하여 도곡, 반포, 영동지구에 아파트 단지를 건설하였다. 또한 서울 잠실아파트 단지, 고덕지구, 둔촌지구를 비롯하여 인천 구월지구, 광주 화정지구 등 대규모 단지 개발에 선도적 역할을 했다.

1970년대 중반까지 대규모 아파트 단지의 개발은 대한주택공사나 서울시 등 공공기관에 의해 이루어졌다. 1973년 영동아파트를 시작으로 서울 강남 지역 대규모 아파트 단지 건설에 민간기업들이 참여하면서 아파트 건설 붐이 일게 되었고, 1970년대 중반 이후의 주택 건설량 급증으로 이어졌다. 여의도 지구에는 1974년부터 삼익주택과 한양주택이 132㎡(40평형) 360가구, 삼부토건이 89.1~132㎡(27~40평형) 870가구를 공급했다. 1976년부터 1979년에 걸쳐 현대건설은 압구정동에 총 7차에 걸쳐 최고 15층 높이의 40개 동 3,000여 가구를 공급했다. 민간기업이 대단지 건설에 참여한 시범사례로 꼽히는 현대건설의 아파트는 중·대형 면적으로만 구성됨으로써 중·상류층을 주요 고객으로 삼은 것이었다. 압구정동 한양아파트, 신반포 지구의 한신아파트와 경남아파트, 방배동 삼호아파트, 논현동 경복아파트 등은 모두 같은 시기에 고층 중·대형으로 지어진 대표적인 민영아파트들이다. 이때부터 아파트 단지가 세워지는 것이 보편적인 한국의 도시계획 관행으로 자리 잡았고, 현재와 같은 도시경관이 만들어지는 데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3 아파트가 세워진 이유와 그로 인한 문제들

1960년대로 접어들면서 한국의 인구 변화는 급속히 진행되었다. 1960년까지는 인구의 숫자 자체가 증가했다면, 1960년대부터는 가구의 수가 급격히 증가한 것이 한국 인구 변화의 특징이다. 이는 경제개발 및 산업화와 맞물려 인구가 도시로 집중되면서 생겨난 현상이다. 도시로 몰려든 사람들은 대부분 핵가족을 구성하면서 급격한 가구 수의 증가를 불러왔던 것이다. 전반적인 도시화의 물결 속에서도 특히 서울로의 인구 집중이 매우 심했는데, 서울 인구는 1960년에서 1970년 사이 245만 명에서 550만 명으로 두 배 넘게 증가하였고, 1970년에서 1990년 사이 다시 배가 늘어 1,060만 명을 기록한다.

도시로 인구가 몰리면서 교통문제, 환경문제, 주택문제 등이 생겨날 수밖에 없었다. 그 중에서도 주택문제는 특히 심각하였다. 급격한 인구의 증가는 주택 부족으로 이어졌다. 특별한 기술이나 직업 없이 무작정 상경한 이들은 도시하층민으로서 남의 집에 세를 들어 살거나, 무허가 판잣집을 짓고 집단으로 거주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는 공영주택을 건설하는 등의 주택 정책을 수립하였고, 아파트의 건립은 서민과 영세민의 주택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 가운데 하나로 떠올랐다. 1962년 당시 대한주택공사의 건설 이사였던 홍사천(洪思天)은 도시의 과밀화 해소와 주택난 부족에 대처하는 방안으로 도시의 입체화와 그에 따른 도심 내 주상복합 아파트를 지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도심 내에는 초고층 아파트가, 그 주변은 6층 정도의 아파트가, 교외에는 3층 정도의 아파트가 적당하다고 이야기하며, 정부가 주도적으로 아파트 건립을 추진하고 민간의 투자도 이끌어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시급한 주택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며 아파트는 급하게 만들어졌다. 1960년대 말에는 자고 나면 아파트가 벌떡벌떡 세워진다고 하여 ‘벌떡 아파트’라는 신조어까지 생겨날 정도였다. 그러나 부족한 물량을 빠르게 채우는 것에만 신경을 쓴 탓에 아파트들은 구조적으로 허술하고 조악한 경우가 많았다. 신문이나 잡지에는 아파트에 대한 불만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파트는 계속해서 빠르게 세워졌고, 결국 1970년 와우아파트 붕괴사고라는 참사로 이어졌다.

아파트 단지가 대규모화 할 뿐 아니라 중산층을 대상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하면서 서민과 영세민은 다시금 갈 곳을 잃게 되었다. 도시하층민이던 이들이 살던 무허가 판자촌을 재개발이라는 이름 하에 철거하였지만, 그 자리에 새롭게 들어설 아파트 단지에 그들이 입주할 수는 없었다. 결국 쫓겨난 철거민들은 도시의 외곽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고, 도시로 유입되는 인구가 늘어나고 아파트 단지가 새롭게 만들어지면서 다시 쫓겨나는 삶을 반복해야만 했다. 도시 재개발로 인한 철거민 문제는 지금도 도시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서울은 인구의 증가와 함께 계속해서 경계를 넓혀나갔는데, 그 과정에서 도시 외곽에 많은 아파트 단지들이 만들어졌다. 다시 말해 아파트의 역사는 서울의 팽창과 구획화의 역사와 함께 한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4 주거생활 양식의 변화

아파트가 한국의 전통 가옥과 다른 점은 모든 공간이 내부로 들어와 압축되어 있다는 것이다. 특히 욕실과 화장실이 실내로 들어온 것이 크게 변화한 부분이다. 전통적인 주택에서는 욕조와 변기는 엄격히 구분되어 있었다. 화장실은 외부에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있었고, 목욕은 주로 물을 끓일 수 있는 부엌 공간을 이용하였다. 전통 가옥에서는 마당이라고 하는 외부의 공간이 함께 어울려 있는 것이기에 동선이 내부로만 이어진 것은 없다. 화장실을 가려거나, 부엌 공간을 가려면 외부를 거쳐야 했다. 변화된 생활을 먼저 향유했던 상류 계층의 개량된 주택에는 욕실과 화장실이 내부로 들어와 있기도 하였지만, 대중화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화장실의 경우 수세식 변기가 설치되어야만 실내로 들일 수 있다는 점도 중요했다. 1962년에 대한주택공사가 지은 마포아파트에서 수세식 변기가 사용되면서 실내로 모든 공간이 들어올 수 있었다. 물론 모든 아파트가 그런 것은 아니어서 여러 세대가 외부의 공동화장실을 사용하는 경우도 존재했다.

아파트는 부엌 생활이 좌식 생활에서 입식 생활로 바뀌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전통 가옥에서는 음식을 만드는 공간과 식사를 하는 공간은 분리되어 있었다. 부엌에서 음식을 만들고 거실이나 방에서 밥상을 편 후 식사를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물론 전통 가옥에서는 부엌이 음식을 조리하는 것에만 그치지 않고, 아궁이를 통해 난방을 하는 기능도 겸하고 있었다. 1970년대부터 아파트 건립이 활성화되면서 본격적으로 입식 생활이 보편화되기 시작했다. 중산층이 아파트에 살기 시작하면서 입식 부엌이 설치되었고, 전용면적이 커지면서 생겨난 여유 공간에 식탁을 들여놓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주방’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부엌이라는 단어가 구식의 이미지를 담고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만들어짐에 따라 다양한 기능을 가진 부속 건물들이 아파트 단지 내로 들어오게 되었다. 아파트 단지 주변에는 상가 건물이 세워져서 주민들의 필요를 충족시켜주었다. 아이를 맡길 수 있는 어린이집이나 유치원 등도 들어섰고, 인구가 집중됨에 따라 학교도 아파트 단지 주변에 함께 세워졌다. 놀이터와 노인정도 아파트 단지 안으로 들어오면서 아파트 단지 내에서 대부분의 일상 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되었다. 아파트가 실외공간에서 실내공간으로의 변화를 가져왔다면, 아파트 단지를 중심으로 새로운 공동체가 형성되는 변화를 가져오기도 했던 것이다.

지금은 수십 층 높이의 아파트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지만, 처음 아파트가 세워질 때만 하더라도 높은 곳에서는 사람이 살 수 없다는 인식이 강했다. 마포아파트가 세워졌을 당시 5층 아파트임에도 불구하고 층고가 높아 전체 높이가 현재 아파트의 7층 정도 되었는데, 그 아파트를 올려다보며 ‘저렇게 높은 곳에서 무서워서 어떻게 잠을 자나’ 하며 수근 댈 정도였다. 초기의 아파트가 불편한 점이 많기도 했지만, 마포아파트 완공 당시 입주자가 전체 세대의 10%정도에 그쳤다는 점은 당시 사람들이 아파트에 대해 좋은 감정만을 가지지는 않았음을 잘 보여준다. 한국의 전통 가옥은 모두 단층 건물 형태로 되어 있었던 점을 생각한다면, 아파트에서 살게 되면서 한국 사람들은 비로소 발을 땅에서 떼고 생활하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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