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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순천 사건

동포의 학살을 거부한다

1948년

여수·순천 사건 대표 이미지

여순사건 당시 진압군의 반란군 색출

개인소장

1 개요

1948년 남한 단독선거에 반대하는 제주 4·3사건이 일어난 이후, 신생 대한민국 정부는 제주도를 적성지역으로 규정하고 10월 17일 이른바 중산간 지역 초토화 작전에 돌입한다. 그러면서 지리적으로 가까운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국방경비대 제14연대를 제주도에 파견하려 했으나, 이들은 정부의 증파 명령을 거부하고 10월 19일 반란을 일으켜 전라남도 동부 6개 군을 점거하였다. 정부는 서둘러 진압군을 파견하여 일주일여 만에 모든 지역의 상황을 정리하였으나, 그 과정에서 대규모의 민간인 학살이 발생하였다. 이를 여수·순천 사건이라 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정부에서는 국가보안법을 제정하고 강력한 숙군(肅軍) 조치를 단행하였다.

2 사건의 발생 배경

이 사건은 군이 자국 정부에 대항해서 반란을 일으킨 사건인 만큼, 당시의 한국군의 집단적 특성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경찰의 경우 미군이 한반도에 주둔하자마자 식민지 경찰기구를 군정 통치에 적극 활용한 반면, 한국군의 경우 정부 수립 전까지 주권국가가 아닌 상황에서, 미국 점령군이 타국의 군을 창설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국방경비대라는 이름으로 창설되었다. 해방 이후에 지역단위로 모집된 국방경비대에는 일본군·관동군·학병 출신, 중국군·광복군 출신 등등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모였고, 자연히 식민지 시기부터 중앙집중적인 조직을 구축한 경찰보다 내부적으로 동질성이나 응집력이 떨어졌다.

이처럼 군은 군정 당국에게 중앙집중적인 경찰보다 활용도가 떨어졌을 뿐 아니라, 대외적으로도 정규군이 아닌 경찰 예비조직으로 취급받았기 때문에 장비나 대우 면에서 경찰보다 낮은 취급을 받았다. 임무 역시 정규군으로 외부 침입을 방어하기보다는 국내 치안유지에 주로 투입되었고, 직업적 자부심을 가지기 힘든 상황에서 탈영도 잦았다. 이후 정부 수립을 전후하여 본격적인 국군으로 확대 재편하는 과정에서 다시 한번 급격한 병력 팽창이 이루어졌고, 이 과정에서 좌익활동 경력자들이 군 내부로 유입될 수 있었다. 현장에서 할당받은 정원을 채우기에 급급한 상황에서 반(反) 이승만 운동을 해온 청년들이 신변의 안전을 위해 입대하는 경우도 있었다.

서로 다른 정체성을 가진 두 무장 집단 사이의 갈등은 정부가 수립되기 전부터 이미 심각한 수준이었다. 1947년부터 48년 사이에는 군·경사이의 충돌이 극심해져 전남 동부 지역인 순천, 영암, 구례 등에서는 ‘영암사건’ 등 총격전까지 벌어졌다. 경찰은 군을 무시하며 ‘경찰 보조인력, 사상적으로 불순, 향토적 오합지졸’이라고 헐뜯었고, 군은 군대로 경찰이 ‘친일 경력에도 불구하고 더 높은 대우를 받는 것’에 분노했다. 내무반에서 ‘지서를 습격하다 왔다’고 말하면 호응을 받았으며, 경찰에게 맞고 들어온 장병의 복수를 하러 출동할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수립된 직후에는 군대 내에서는 한창 내부 남로당 계열 혹은 김구 계열을 포함한 반 이승만 세력을 걸러내는 숙군(肅軍)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여순사건을 촉발한 여수 주둔 14연대 역시 혁명의용군 사건으로 연대장 오동기 소령이 구속된 상황이었고, 내부에서 좌익 경력이 있는 장병들은 극도로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또한 모집과정이 지역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14연대 역시 대부분 여수를 비롯한 인근 전남지역 출신 장병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에게 제주도는 1946년 별도의 도로 승격이 된 이후에도 여전히 전남권으로 간주되었고, 동향 사람들을 초토화시키는 작전에 대한 거부감이 심할 수밖에 없었다.

3 사건의 전개과정

10월 19일, 여수 14연대 중 1개 대대가 제주 4·3 사건 진압을 위해 여수항에 집결했을 때, 남로당 소속 상사 지창수가 병기와 탄약을 장악하고 반대자 3명을 사살하며 부대를 장악했다. 이것이 북한 측 주장처럼 박헌영의 남로당이 주동했으나 실패한 것인지, 아니면 이승만 측 주장처럼 김구가 공산주의자와 결탁한 것인지, 혹은 소련과 북한의 지령인지에 대해 논란이 있다. 최근 학계는 대체로 남로당 중앙은 물론 지부와도 제대로 소통하지 않은 14연대만의 봉기였으나, 남로당이 사후 승인과 지원을 통해 참여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남로당이 조직 역량의 한계로 무장투쟁을 의도하지 않았던 시점일 뿐 아니라, 초기에 남로당 측 장교들 역시 사살되었고, 봉기에 참여한 대부분의 병사들은 목적에 대해 충분히 인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10월 20일 새벽 1시경, 반란군이 여수 읍내로 진격할 당시에는 약 1,200명이 참여하고 있었다. 그날 아침 여수를 장악한 후 순천으로 출발했을 때, 순천에 파견되어 있던 2개 중대가 반란에 합류했다. 이후 순천을 접수하기 위해 전투하는 중에 광주에서 지원 나온 4연대 2중대가 합류하여 인원은 최종 약 2,000명에 이르렀다. 이들은 인민위원회 재결성, 이전의 ‘인민공화국’, 단독정부 반대, 토지개혁 및 친일파 처단 등을 기치로 내세웠다. 그러면서 21일에는 남원·구례·보성을 22일에는 고흥·광양·곡성 지역을 장악하고, 지역 내에서 친일파, 경찰, 우익인사를 처단했다. 지역마다 남로당 조직들이 긴급회의를 거쳐 합류했는데, 조직을 노출한다는 위험에도 불구하고, 반란이 어느정도 대중 지지를 획득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정부 측에서는 10월 21일부터 광주에 반란군 토벌 전투사령부를 설치하고, 미국 측 임시군사고문단과의 협력 아래 진압작전에 돌입했다. 다음날인 22일에는 여수·순천 지구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순천 탈환 작전을 펼쳤다. 특히 간도특설대 출신 김백일, 백선엽 등이 강경 진압을 주장하며 총사령관 송호성을 배제했다. 이처럼 강경한 진압작전 아래 반란군은 기존의 산개·확대 작전에서 입산하여 장기전을 모색하는 방향으로 전환하였으며, 지휘관 역시 중위 김지회로 교체되었다. 23일 정부군은 순천을 점령했고, 여수 탈환 작전을 시작하였다. 우익청년단까지 총동원되어서 진행된 여순사건 진압은 정부수립 이후 최초의 육해공 합동작전으로 여겨졌다. 그리하여 27일 여수 초토화 작전이 시작되었으며, 도주한 반란군을 지리산까지 추적하였다. 이듬해 2월이 되어서야 계엄령이 해제되었으나, 남은 반란군은 한국전쟁 시기까지 지리산에서 유격대 활동을 이어갔다.

4 민간인 학살

진압군은 지역을 점령하면 그동안 반란군 측에 가담했던 부역(附逆)자를 색출하기 위해 주민들을 공터에 소집했다. 불응하거나 이탈하는 경우에는 곧바로 부역자로 간주했다. 그러고는 현지 경찰이나 우익인사들을 시켜 부역자였던 사람을 지목하도록 했다. 지목당하면 법적인 절차 없이 즉석에서 처형되었기 때문에, 이 과정은 ‘손가락 총’이라고 불리었다. 이 과정에서 피해자의 외모, 허위고발, 허위투서, 과장된 소문, 자백 강요 등 자의적인 요소들이 다양하게 개입했다. 특히 여수에서 5연대 장교 김종원은 즉결참수로 악명이 높았다. 여수 만성리굴 부근에서는 1949년 1월 13일 종산 국민학교에서 끌려온 125명이 ‘처형’되기도 했다. 1949년 11월 전남도가 집계한 여순사건 인명 피해는 1만 1,131명이었다.

이처럼 인명피해가 극심했음에도 유가족들은 빨갱이 가족이라는 낙인이 찍혔기 때문에, 마음놓고 애도하지도 못했고, 심지어 시신을 마음대로 수습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정부 측에서 여순사건이 ‘현지 좌익분자들의 계획적 음모’라고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4·19로 이승만 정부가 종결된 뒤에야 1960년 4대 국회에서 ‘양민학살 진상조사 특위’를 구성했지만, 곧이어 일어난 5·16 이후 박정희 정권에 의해 다시 탄압당했다. 이후 피해자와 유족들은 오히려 피해 사실을 숨기고 살아야 했다. 민주화 이후에도 2000년에 관련 특별법이 제정된 4·3 사건과 달리 여순사건은 관련 특별법이 2001년부터 처음 발의된 이후 20여년이나 제정되지 못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피해자들은 2011년부터 당시 군사법원 재판에 대한 재심을 청구했고, 2020년에는 민간인 희생자 1인에 대한 재심에서 처음으로 무죄가 선고되었다. 이후 2021년 6월 ‘여수·순천 10·19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안’(여순사건 특별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5 사건의 영향

여순사건 이후 대대적인 숙군(肅軍)이 진행되어 좌익계열과 광복군계열을 포함하여 이승만 대통령에 반대하는 성향을 가진 군인들이 제거되었다. 이미 제주 11연대장 박진경 대령이 살해되었을 때 조사는 진행되었지만, 여순사건은 군 내부 프락치 색출에 박차를 가하게 했다. 1949년 2월에서 11월 사이에 영관급 6명, 위관급 67명, 하사관 176명 등 352명이 고등군법회의에 회부된 것은 숙군 작업이 얼마나 크게 전개되었는가를 말해준다. 1948, 49년에 파면된 장교는 각각 18명, 224명이고, 불명예 제대한 사병은 각각 1,693명, 2,440명이었다. 육사 2기인 박정희도 남로당 군 프락치였으나 프락치 관계 정보를 제공해 살아남았다.

국가보안법은 1948년 9월에 발의된 내란행위특별조치법이 명칭을 바꾸어 통과한 것이다. 여순사건 이후인 10월 27일 이 법이 다시 거론되어 초안이 작성되었고, 11월 9일 본회의에 제출되었다. 이때 내란행위 특별조치법이라는 명칭이 기존 형법의 내란죄와 중복된다는 이유로 국가보안법이 되었던 것이다. 법안 내용도 내란행위 자체보다 반국가적 정당단체의 활동을 방지하기 위해 내란과 유사한 목적을 가진 결사나 집단의 구성과 가입을 처벌하는 것으로 중심이 바뀌었다. 이것은 행위 이전의 단계를 처벌하는 법으로, 형법의 대원칙과는 상충된다는 점에서 제정 당시부터 논란이 되었다. 이후 이 법은 초헌법적인 효과를 발휘하면서 정치, 사회, 사상, 문화 등 다양한 부문에 걸쳐서 현재까지도 한국인들의 자유로운 활동에 제약이 되는 요인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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