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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가족 만남

긴 기다림, 그러나 짧은 만남

1985년

이산가족 만남 대표 이미지

제1차 남북 이산가족 만남 첫날 상봉 장면

국가기록원

1 개요

이산가족은 현재 남한과 북한에 흩어져서 만날 수 없는 이들을 가리킨다. 이산가족은 한반도 분단이라는 가슴 아픈 역사의 산물로서, 한국전쟁으로 남과 북의 왕래가 끊어지면서 발생했다. 또한 전쟁으로 인한 피난 과정에서 헤어져 소식을 알지 못하는 국내 이산가족 또한 상당히 많았다. 남측의 대한적십자사와 북측의 조선적십자회가 이산가족 교류를 의제로 회담을 진행하면서 이산가족이 만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고, 1985년의 한 차례 고향방문단 교류를 거쳐 2000년 이후부터 정기적인 이산가족 상봉이 이루어졌다.

2 이산가족의 정의

현재 「남북 이산가족 생사확인 및 교류 촉진에 관한 법률」(이하 이산가족법)에서는 남북 이산가족을 ‘이산의 사유와 경위를 불문하고, 현재 군사분계선 이남지역(남한)과 군사분계선 이북지역(북한)으로 흩어져 있는 8촌 이내의 친척·인척 및 배우자 또는 배우자이었던 자’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는 남과 북에 있는 이산가족들만을 지칭하는 협소한 형태의 정의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산의 사유와 경위, 시기를 한정 짓지 않았기 때문에 어떻게 이산가족이 되었는지를 따지지 않는 확장성을 가지는 정의이기도 하다. 남북 이산가족, 나아가 남북이라는 지리적 경계를 넘어선 이산가족에 대해 알기 위해서는 해방 전후의 역사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해방 직후 한반도에는 북위 38도를 경계로 하여 남쪽에는 미국군이, 북쪽에는 소련군이 진주했다. 해방 직후 남북을 왕래하기 위해서는 통행허가증이 필요했고, 우편물 교환 역시 제한적으로 이루어졌다. 불편했지만 왕래가 완전히 차단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한반도에 통일정부를 수립하려던 노력들이 수포로 돌아가고, 남과 북에는 각각의 정부가 수립됐다. 분단이 공식화되면서 고향과 가족이 있는 땅으로 갈 수 없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남과 북에 각각의 정부가 수립되면서 북쪽에 있던 자본가, 지주, 종교인 등은 탄압을 피해 남쪽으로 내려왔고, 남쪽에 있던 공산주의자들은 북쪽으로 올라갔다. 우편물 교환은 1950년 6월 22일 완전히 중단되었고, 이어서 발발한 6·25전쟁은 이산가족을 대거 양산해냈다. 한반도 전역을 휩쓸었던 전쟁의 여파로 고향을 잃은 사람은 부지기수였고, 가족이 뿔뿔이 흩어진 경우도 셀 수 없었다. 전쟁의 위험을 잠시만 피하면 될 거라고 생각하며 헤어졌던 가족들은 서로 소식도 모른 채 수십 년을 살아가야 했다.

휴전 후에도 남과 북은 냉전과 분단 체제하에서 대립을 이어오면서 지속적으로 이산가족을 만들어냈다. 각각의 체제하에서 탄압을 견디지 못했던 이들은 월북이나 월남을 강행했고, 정부 당국에 의한 납치도 있었다. 한국전쟁 당시 포로로 잡혔던 이들의 상당수는 원래 있던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그대로 남겨져 미송환포로 신분으로 남게 되었다. 또한 비전향장기수나 남파, 북파 공작원들과 그 가족도 휴전이 이뤄진 후 생겨난 이산가족이라고 볼 수 있다.

한반도의 남과 북에 헤어진 가족을 두고 있는 경우를 흔히 ‘남북 이산가족’이라고 부르는데, 남한 내에서도 많은 이산가족이 존재했다. 지금은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여 가족끼리 연락이 닿지 않아 헤어진 채 지내는 모습을 상상하기 어렵지만, 예전에는 한번 소식이 끊어지면 그대로 가족의 생사도 모른 채 살아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전쟁 중에 여러 번 피난을 하는 와중에 헤어진 가족들의 경우 같은 대한민국 땅에 있으면서도 소식을 모르는 이산가족으로 지내야 했다. 대한적십자사의 국내 이산가족 찾기 운동이 진행되면서 분단과 전쟁으로 인해 흩어진 가족들이 많다는 점이 널리 알려졌고, 이 문제가 주목받기 시작하면서 국내 이산가족을 찾기 위한 활동들이 더욱 활발히 전개되기 시작했다.

3 남북 이산가족 교류의 역사

남북 이산가족 교류에 대한 논의는 1972년 남한의 대한적십자사와 북한의 조선적십자회 사이의 회담으로 시작되었다. 1971년 8월 12일 남측이 1천만 이산가족 찾기 운동을 위한 인도적 회담의 개최를 제의하고 북측이 이 제의를 수용했다. 여러 차례의 예비회담을 거쳐 1972년 8월 평양에서 제1차 남북적십자회담이 개최되었으며, 1973년 7월까지 7차례 본회담이 서울과 평양에서 번갈아 개최되었다. 그러나 남북 이산가족의 만남까지 이어지지는 못하였고, 1977년 12월 제8차 본회담 개최를 위한 실무접촉 이후 남북의 대화는 단절되었다.

1980년대 초반까지도 남과 북 사이의 대화는 재개되지 못하다가 1984년 남한의 홍수피해에 북측이 수해물자를 제공하겠다고 나서면서 대화의 물꼬가 트이게 됐다. 이후 1985년 5월부터 12월까지 8~10차 남북적십자 본회담이 이어졌다. 이 기간 중에 역사적인 남북 이산가족의 첫 번째 만남이 이루어졌다. 8월 15일을 기념하여 이산가족 고향방문단을 교환할 것을 제8차 회담에서 합의하였고, 9월 20일에 고향방문단의 교환이 진행되어서 남북 이산가족 방문단 100명 가운데 65명이 92명의 가족·친척들과 상봉할 수 있었다. 또한 예술공연단도 교환하여 각각 서울과 평양에서 공연을 펼쳤다.

그러나 기다림은 길었지만 만남은 짧았다. 1986년 들어 남북관계가 다시 악화되면서 남북적십자회담 제11차 본회담 개최 논의도, 제2차 남북 이산가족 고향방문단 또는 노부모 고향방문단 논의도 무산되었다. 이후 남북 이산가족 문제가 다시 본격적으로 제기되는 것은 2000년 남북정상회담 이후이다. 짧은 한 차례의 만남 이후 15년 동안 민간차원에서 이루어진 소수의 상봉 외에 공식적인 이산가족 상봉은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1998년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제3국을 통한 민간차원의 이산가족 교류를 활성화하기 위해 관련 절차를 간소화하였고, 이와 함께 2000년의 남북정상회담은 남북 이산가족 교류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 주었다. 정상회담의 결과로서 남북 이산가족 상봉행사가 개최되었으며, 「6·15 남북 공동선언」 제3항에서 ‘8·15에 즈음하여 흩어진 가족·친척방문단을 교환하며, 비전향장기수 문제를 해결하는 등 인도적 문제를 조속히 풀어나가기로’ 규정함으로써 이산가족 만남을 계속 추진하기로 천명하였다.

이로써 남북 이산가족 교류가 실행되었다. 하지만 이산가족의 상봉은 늘 불안정하기만 했다. 기본적으로 남북 이산가족 문제는 남북관계의 변화에 크게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2001년 제4차 상봉 행사는 미국 9·11테러로 인한 남측의 경계태세 강화를 구실로 상봉을 연기할 수밖에 없다고 북측이 일방적으로 통보함에 따라 이뤄지지 못했다. 2002년부터는 금강산에서 이산가족 상봉이 이뤄지기도 하는 등 정례화 및 제도화가 진행되었다. 2007년 개최된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이산가족 상봉 확대 등이 합의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2008년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이후 남북관계가 얼어붙고, 북한의 도발이 이어지면서 이산가족 교류가 한동안 이루어지지 못했다.

남북관계에 크게 영향을 받으면서도 2000년부터 2020년 현재까지 남북 이산가족 교류가 이어져오고 있다. 이산가족정보통합시스템에서 제공하는 자료에 따르면, 1985년부터 2020년까지 당국차원과 민간차원을 합쳐서 총 24,179명이 헤어진 가족과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는 등록된 이산가족 수를 생각할 때 많지 않은 수이며, 이산가족으로 신청조차 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이들을 따진다면 더욱 적은 숫자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생존해 있는 이산가족 1세대가 고령자임을 생각할 때 남북 이산가족 문제는 시급히 해결해야 할 사안이다.

4 국내 이산가족 찾기 운동

1973년 10월 27일부터 대한적십자사는 KBS라디오의 협조를 받아 이산가족들의 명단을 사연과 함께 방송하기 시작했다. 1974년부터는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라는 제목으로 고정 프로그램화 하여 방송을 개시하였다. 1973년도에 국내 이산가족 찾기를 신청한 526건은 대부분이 해방 후 또는 한국전쟁 기간 중에 헤어진 가족을 찾는 것이었다. 그 외에 일본으로 징용된 혈육을 찾는 경우, 해방 전에 만주나 중국 본토로 건너간 혈육을 찾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한국일보사와 협조하여 164건의 상봉을 주선하기도 하였다.

대한적십자사는 이산가족 찾기 운동을 국민운동 차원으로 끌어올리자는 취지에서 1977년 8월 12일부터 일주일간 신문회관 전시장을 빌려 이산가족 찾기 사진전시회를 개최하였다. 그리고 1978년에는 이산가족의 편지, 수기를 공모해서 입상된 작품들을 엮어 『망향기』라는 제목의 단행본으로 발간하기도 하였다.

국내 이산가족 찾기에 있어 가장 중요하고 획기적인 사건은 역시 1983년 6월 30일 밤 10시 15분부터 KBS 1TV를 통해 특별 생방송 된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라는 프로그램이었다. 원래 이 프로그램은 95분 가량의 분량으로 6월 30일 하루만 방영하도록 기획됐다. 따라서 이산가족을 찾는 출연자의 숫자도 제한해놓은 상황이었다. 이 특별 생방송이 서울을 비롯하여 부산, 대구, 광주 등 지방 방송국에서 전파를 타기 시작하자 그동안 헤어진 가족을 찾지 못해 애태우던 이산가족들이 KBS로 몰려와 엄청난 인파를 이루게 된다. 방송 도중에는 방송사 업무가 마비될 정도로 전화가 폭주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하였다. 결국 KBS 측은 12시에 방송을 마치려던 계획을 수정하여 새벽 2시 30분까지 연장방송을 하게 되었다. 이날 생방송에는 총 850가족이 출연해 36가족이 상봉의 기쁨을 누렸다.

이러한 열기는 당초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이튿날 KBS 본관 앞에는 날이 밝기도 전부터 1만여 명의 이산가족이 몰려들었고, 이에 KBS는 연장방송을 결정했다. KBS는 7월 1일 ‘이산가족찾기추진본부’를 긴급 설치했고 방송 편성도 늘렸다. 7월 3일부터는 뉴스와 드라마도 뺀 채 하루 종일 이산가족 찾기를 방송했다. KBS와 대한적십자사는 매일 이산가족 찾기 명단이 실린 호외를 발행했고, 생방송 3일째부터는 신문들도 이산가족 찾기 열풍을 1면 머리기사로 내보내기 시작했다. 첫 방송이 나간 6월 30일 밤부터 7월 12일까지 접수한 이산가족 신청서는 100,952건이었다.

KBS의 특별 프로그램은 11월 14일 새벽 4시에 방송을 종료하기까지 453시간 45분 동안 방영되었으며, 이 기간에 방송을 통해서 10,957명의 이산가족들이 그동안 헤어져 있던 가족을 만날 수 있었다. 이 특별 프로그램은 국제적으로도 큰 화제가 되었고, 미국의 ABC방송은 인공위성을 통해 이산가족 상봉 장면을 중계하기도 했다. 또한 전 국민의 53.9%가 이 프로그램을 새벽 1시까지 본 적이 있으며 88.8%가 눈물을 흘렸다고 대답할 정도로 방송이 미친 파장은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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