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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전협정의 체결

전투 중지, 전쟁 재발 방지를 위한 설전(舌戰)의 결과물

1953년

정전협정의 체결 대표 이미지

판문점 정전협정 체결 모습

전자사료관(국사편찬위원회)

1 개요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에 판문점에서 정전협정이 체결되었다. 한국전쟁을 일시적으로 중지시키는 데 교전 양측이 합의한 것으로, “한국정전협정(Korean Armistice Agreement)”의 정식명칭은 “유엔군총사령관을 일방(一方)으로 하고 조선인민군최고사령관 및 중국인민지원군사령원을 다른 일방으로 하는 한국군사정전(韓國軍事停戰)에 관한 협정”이다. 정전협정문은 한국문, 영문, 중국문으로 작성하며, 각 협정은 동등한 효력을 가진다. 유엔군총사령관 미육군대장 클라크(Mark. W. Clark),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원수 최고인민군최고사령관 김일성(金日成)·중국인민지원군사령원 팽덕회(彭德懷, 펑떠화이)가 서명하였고, 유엔군대표단 수석대표 미육군대장 해리슨 2세(William K. Harrison, JR)와 조선인민군 및 중국인민지원군대표단 수석대표 조선인민군대장 남일(南日)이 참석자로 서명하였다. 그로부터 12시간 후인 1953년 7월 27일 22시를 기해 발효되었으며, 한반도 정전체제의 기본적 규범으로 남아있다.

2 정전회담 지휘체계와 대표단 구성

1951년 6월 전선이 38도선 부근에서 고착화되자 유엔군·공산군 양측은 정전을 모색하였다. 1951년 5월 17일 NSC 48/5 보고서를 채택한 미국은 다양한 경로를 통해 소련과 중국에 정전에 관한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시도하였다. 미국의 정전 의사를 확인한 북한과 중국, 소련 공산 3국 간에도 정전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졌다. 미국과 북한, 중국, 소련이 모두 정전 방침을 결정한 이 시점에 한국정부만이 정전을 적극 반대하였다. 미국은 이승만(李承晩) 대통령과 한국정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일방적으로 정전을 추진하기로 결정하였다. 막후 협상을 거쳐 1951년 6월 23일 소련의 유엔 수석대표 말리크(Yakov A. Malik)의 정전 제안을 미국이 공식 수락하면서 본격적인 정전 교섭이 시작되었다.

회담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양측은 신속하게 협상전략과 지휘체계를 수립하였고, 회담 대표단을 구성하였다. 유엔군의 이름으로 미군이 참전하고, 이후 중국이 참전하면서 한국전쟁을 실질적으로 주도한 것은 미국과 중국이었다. 미국과 중국은 협상의 지휘계통을 자신들이 주도할 수 있는 구조로 만들고, 실무적인 차원에서 회담 대표단을 구성하였다. 유엔군 측에서 협상의 지휘계통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미국은 유엔은 물론 한국까지도 배제하고 워싱턴과 직접 연결되는 구조로 회담을 진행하고자 했다. 그에 따라 미국 주도의 협상 지휘체계와 회담 대표단이 구성되었으며, 한국이 반발했지만 무시하고 진행했다. 협상의 지휘계통상 한국과 북한의 결정권은 미약했거나 거의 없었다. 이러한 구조는 한국을 협상장 밖으로 몰아내는 결과를 초래했고, 한국의 정전반대시위를 격화시킨 한 요인이었다. 공산군 측의 정전협상은 스탈린(Joseph Stalin)-마오쩌뚱(毛澤東)-리커농(李克農)으로 이어지는 지휘계통과 북한군 장성을 수석대표로 하는 회담 대표단으로 구성되었다.

협상 개시 당시 대표단 구성은, 유엔군 측은 수석대표가 미군 해군제독, 나머지 3명의 대표는 미국의 육·해·공군소장으로 안배했고, 유엔군사령관이 임명한 한국군 대표를 한 명 포함시켰다. 대표단 내에서 한국군 대표는 한국 정부를 대표하는 대표성이나 발언권을 보장받지 못했고, 결정권이 없었던 ‘옵저버’ 수준이었다. 협상과정과 결과에 대해 한국 정부나 언론이 가진 정보는 미국의 통보에 전적으로 의존했기 때문에 불확실한 경우가 많았다. 반면에 공산군 측 대표단은 북한군 대장을 수석대표로 내세우고 중국군 대표가 두 명 포함되어 표면적으로 북한이 주도하는 인상을 주었다. 실질적으로는 공산군 측 회담을 중국군 대표가 주도했지만, 회담장 내에서 북한은 발언권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분과위원회나 각급 회의에 참가했고 협상과정을 직접 경험했다는 점에서 남한과 비교되었다. 이러한 회담 구조는 전후 군사정전위원회까지도 이어진다.

정전회담은 몇 개의 수준이 다른 협상계통으로 진행되었다. 본회담 대표회의(Conference on Armistice Proposal), 분과위원회 회의(Sub-Delꠓegation Meeting), 연락장교회의(Liaison Officers Meeting), 참모장교회의(Staff Officers Meeting)가 그것이다. 정전회담의 기본은 본회담으로, 쌍방 5명의 대표들이 참석했으며, 의제 합의와 최종 결정, 이를 공식화하는 대표회의였다. 1951년 7월 10일부터 8월 16일까지는 개성에서 본회담이 열렸으며, 1951년 10월 25일부터 1953년 7월 19일까지는 판문점에서 열렸다. 본회담은 총 159회 열렸으며, 회의 의제 채택을 위한 제1의제 10회, 제2의제(군사분계선 협상) 17회, 제3의제(정전 감시 방법과 기구 협상) 8회, 제4의제(포로송환 협상) 79회, 제5의제(관계 제국 정부에 대한 건의사항 협상) 8회, 기타(1953. 4. 26 ~ 7. 27) 37회 개최되었다.

3 정전회담 의제와 쟁점

정전회담은 의제 선정부터 양측 입장이 첨예하게 대립하였다. 주요 의제는 전쟁의 전개과정, 관련 각국의 협상정책, 한국의 정전 반대 요인과 맞물려 복잡한 협상 과정을 거쳐 타협점을 찾아 나갔다. 협상 시작 전에 양측은 회담을 “순수하게 군사적 문제에 국한”하기로 합의하고 회담을 개시했지만 어디까지가 군사적 문제인가에 대해 판단은 서로 달랐다. 회담 개시 후 의제 선정 과정에서 양측은 38도선을 군사분계선으로 하는 것과 외국군 철군 문제를 두고 대립했다. 공산군 측은 외국군 철군 문제는 정전을 보장하는 필요조건이자 군사문제라고 주장했고, 미국은 이것은 정치문제라고 판단했다. 회담이 시작되고 17일 만에야 양측은 군사분계선 및 비무장지대 설정, 정화(停火) 및 정전(停戰) 감시기구 및 권한, 포로송환, 정치회담 건의 등 네 개 항목을 의제로 설정하기로 합의했다.

첫 번째 의제인 군사분계선 문제는 정전회담에서 가장 핵심적 사안이었다. 공산군 측은 38도선을 군사분계선으로 삼자고 주장했다. 유엔군 측은 우월한 해·공군력을 반영한 보상을 요구했고, 점차 이것을 포기하는 대신 전선의 조정을 통한 지역흥정을 통해 개성지역을 확보하고자 하다가, 최종적으로 실제 지상접촉선을 군사분계선으로 할 것에 동의했다. 협상이 시작된 후 양측의 군사적 목표는 서로가 유리한 조건에서 정전을 이루려는 것이었다 유엔군은 회담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 항공작전을 강화했으며, 공산군 측은 병력과 장비를 증강하면서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어느 한 편의 군사적 압력은 상대편의 더 큰 군사적 반격을 불러왔다. 1951년 11월 27일 양측은 잠정군사분계선 설정에 합의했지만, 한 달 내에 나머지 의제 합의가 되지 못하면서 회담과 전쟁은 장기전으로 들어갔다.

두 번째 의제인 정전 감시기구와 권한 문제에서 핵심 사안은 유엔군 측이 제기한 군사력 증강 금지와 감시권한 문제였다. 공산군 측은 이를 외국군 철수와 결부시켰다. 모든 외국군 철수가 실현되면 군사력 증강문제는 자연적으로 해결될 것이며, 따라서 감시 문제는 논의할 필요조차 없다고 주장했다. 제공권을 장악한 유엔군 측은 북한지역 비행장 건설 또는 복구를 제한하려고 했고, 이에 맞서 공산군 측은 소련을 정전 감시기구의 중립국으로 내세웠다. 결국 유엔군 측이 북한지역 비행장 복구 금지 주장을 철회하고, 공산군 측이 중립국 감독위원회에서 소련을 빼는 것으로 합의되었다. 이 회담에서 군사정전위원회와 중립국 감독위원회 구성, 외부로부터의 병력 및 무기 도입 금지, 군사분계선 이북 도서(서해 5도 제외)에서 철군하는 문제 등이 합의되었다.

세 번째 의제인 포로송환 문제는 쉽게 처리될 수 있을 것으로 여겼으나, 실제로 정전협상을 파행으로 이끈 주요인이 되었다. 거의 열 배나 되는 양측 포로 숫자의 엄청난 차이와 포로 성분의 복잡성이 문제의 발단이었지만, 표면적으로는 미국이 주장한 자원송환원칙을 두고 대립했다. 미국은 인도주의를 내세워 포로에게 송환 여부를 선택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포로협상에서 양측의 주요 관심사는 위신이 손상되지 않는 적절한 선에서 ‘송환포로 숫자’를 맞추는 것이었다. 중국은 중국군 포로가 전원 송환된다면 북한군 포로에 대해서는 자원송환을 적용해도 무방하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포로 심사 결과 중국군 포로의 송환 선택 비율이 상대적으로 낮았기 때문에 중국은 이를 문제 삼아 강경책을 선택했으며, 이로 인해 정전회담은 무기한 결렬되고 전쟁은 일년 이상 더 지속되었다. 폭격 피해가 컸던 북한은 즉각적인 정전을 원했지만 결정권이 없었고 중국의 결정에 따라야만 했다. 남한은 포로협상에서 납북자 송환 문제가 다뤄지기를 원했지만, 미국은 포로협상이 더 복잡해질 것을 우려해서 이 문제를 제외시켰다. 양측은 납치문제의 논란을 피해 실향사민 귀향에 합의하는 방식으로 타협했다. 포로협상이 타결되는 시점에 이승만 대통령의 일방적인 반공포로석방으로 회담이 일시적으로 중단되었으나, 정전협정 체결을 막지는 못했다.

마지막 의제인 정치회담 문제는, 회담의 군사적 성격을 넘어서 한반도 문제의 정치적 해결을 위한 방안이었다. 양측은 이 조항에 비교적 쉽게 합의했는데, 협정 조문이 구속력이 약한 ‘건의한다’는 정도로 마무리되었기 때문이었다.

4 정전협정 체결의 의미

1953년 체결된 정전협정은 군사분계선(MDL)과 비무장지대(DMZ), 정화(停火) 및 정전(停戰)의 구체적 조치, 전쟁포로에 관한 조치, 쌍방 관계정부들에 보내는 건의, 부칙 등 모두 5개 조 63개 항으로 구성되어 있고, 별도로 부록과 임시적 보충협정이 함께 체결되었다.

정전협정 전문(前文)에는 “쌍방이 막대한 고통과 유혈을 초래한 한국 충돌(衝突, conflict)을 정지(停止)시키기 위하여, 최후적인 평화적 해결이 달성될 때까지 한국에서의 적대행위와 일체 무력행위의 완전한 정지를 보장하는 정전(停戰)을 확립할 목적으로” 상호 합의하였다고 명시되어 있다. 이것은 정전협정이 ‘평화적 해결이 달성될 때까지’ 한시적 성격을 띤다는 의미이며, 전후에 평화적 해결을 위한 노력이 필요한 과도적 성격의 협정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정전협정 체결로 전투는 ‘중지’되었지만, 한반도 문제의 완전한 해결은 여전히 과제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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