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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 사건

제주도는 어떻게 적성지역이 되었나

1947년

제주 4·3 사건 대표 이미지

제주도 4·3 당시 피난 나온 마을 주민들

전자사료관(국사편찬위원회)

1 개요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경찰·서북청년회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남한의 단독선거·단독정부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를 시작했다. 그 이후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는 무장대와 토벌대간의 무력충돌이 발생했으며, 특히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을 4·3 사건이라고 부른다.

2 사건 발생의 배경

제주도는 전근대 시기부터 본토와의 지리적 거리에 기반한 독자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해방 직후부터 외지에 나가 있던 6만여 명의 제주 주민들이 일시에 귀환하여 급격한 인구 변동을 겪었다. 도내 실업률이 높아지고 생필품은 부족해졌으며, 극심한 흉년과 미곡정책의 실패에 따른 식량난에 콜레라 유행까지 겹쳐 민심은 극히 악화되었다. 거기에 일제에 부역한 경찰들이 미군정과의 유착 아래 군정 경찰로 변신하여 주민들을 억압한데다, 외지에서 들어온 우익청년단들이 이에 가담하여 폭력을 휘두르는 상황은 주민들의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이런 상황에서 1947년 3월 발생한 ‘3·1절 발포사건’은 주민들의 억눌린 분노에 불을 지피는 도화선이 되었다.

1947년 3월 1일, 3·1절 28주년을 맞아 좌파 진영의 제주지역 민주주의민족전선(이하 민전)이 도내의 곳곳에서 기념 집회를 주최하였다. 제주 북국민학교에서 기념식이 끝난 후 시가행진이 이어졌는데, 관덕정 앞 광장에서 이를 구경하던 어린아이가 기마 경찰이 탄 말에 차여 다치는 사고가 발생하였다. 기마 경찰이 그대로 가려고 하자 일부 군중이 경찰을 공격했고, 이에 경찰이 군중에게 총을 발포하여 6명이 사망하고 6명이 중상을 입었다. 당시 조직이 노출되어 수세에 몰려 있던 남로당 제주도위원회는 3·1사건 대책 투쟁위원회를 결성하고 반(反) 경찰 활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하였다. 3월 10일에는 3·1사건에 항의하는 민·관 총파업에 돌입하였는데, 제주도 내 95%에 달하는 166개 기관 및 단체에서 파업에 동참하였다. 총파업 사태는 3월 말에 진정 국면에 접어들었으나, 경찰당국의 대량 검속이 진행되어 4·3 발발 직전까지 약 1년 동안 2,500명이 구금되었다.

3·1사건 이후 지역 주민과 경찰이 자주 충돌하면서 미군정 역시 경찰에 대한 주민들의 반감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오로지 좌익세력에만 모든 책임을 돌리는 태도로 일관하여 민심을 악화시켰다. 여기에 더해, 같은 해 연말 미국이 소련과의 협상을 포기하고 한반도 문제를 유엔에 이관하자 남한만의 단독선거가 가시화되었고, 이는 남한 내에서 분단에 대한 광범위한 반대를 촉발했다. 특히 남로당은 단독선거를 저지하기 위한 투쟁의 일환으로 1948년 2월 7일을 기하여 전국에서 총파업을 일으켰고, 제주도당에서도 강경파와 온건파의 논쟁 끝에 최종적으로 무장투쟁 방침을 채택했다.

3 사건의 초기 전개과정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제주도에 있는 300여 개의 오름에 일제히 봉홧불이 오르며 도내 남로당 김달삼 등 350여 명이 무장을 하고 24개 경찰지서 중에 12개 지서를 급습했다. 이 공격에는 경찰은 물론 서북청년회 숙소, 독립촉성국민회와 대동청년단 등 우익단체 요인의 집이 포함되었다. 이로 인하여 경찰 4명과 민간인 8명, 무장대 2명이 사망하였다. 무장대는 경찰과 우익청년단의 탄압에 대한 저항, 남한 단독선거 및 단독정부 수립 반대와 조국의 통일 독립, 반미 구국투쟁을 무장봉기의 기치로 내세웠다.

무장봉기 초기에 미군정은 이 사태를 경찰이 담당할 치안 문제로 파악하였다. 미군정은 4월 5일 전남 경찰 약 100명을 응원대로 급파하고 제주경찰감찰청 내에 제주비상경비사령부를 설치하였으며, 제주도 도령(道令)을 공포하여 제주의 해상교통을 차단하고 미군 함정을 동원하여 해안을 봉쇄하였다. 4월 8일에는 제주비상경비사령관이 무장대에 대한 소탕전을 전개한다는 포고문을 발표하였고, 4월 10일에는 국립경찰전문학교의 간부후보생 100명을 제주에 파견하여 경찰력을 강화하였다.

그러나 경찰과 우익청년단의 힘으로 저항을 봉쇄한다는 방침은 주민들의 반발을 불러왔고 사태를 악화시켰다. 4월 17일 경찰력만으로 사태를 해결하는 데 한계를 느낀 미군정은 경비대 제9연대를 투입했고, 다음날 본격적인 진압작전에 앞서 무장대 지도자와 교섭하도록 지시하였다. 4월 28일에 경비대 제9연대장 김익렬 중령과 무장대 총책 김달삼이 평화협상을 진행하여 72시간 안에 전투를 완전히 중지할 것 등을 합의하였으나, 5월 1일 ‘오라리 방화사건’으로 협상이 파기되었다. 김익렬 연대장은 현장 조사를 벌인 끝에 방화가 우익청년들의 소행임을 밝혀냈지만, 미군정은 이를 무시하고 「제주도의 메이데이(May Day on Cheju-do)」라는 기록영화를 만들어 사건을 무장대의 소행으로 조작했다. 사건 이틀 후인 5월 3일 미군정은 경비대에 무장대를 총공격하도록 명령하였고, 이에 따라 경찰 중심의 진압작전은 경비대로 넘어가게 되었다.

이처럼 주한미군 사령관 하지(John Reed Hodge) 중장은 총선거를 앞둔 상황에서 제주도 사태를 조기에 진압하는 데 주력하여 강경진압도 불사하였으나, 1948년 5월 10일의 남한 단독선거에서 제주도는 투표수 과반 미달로 무효처리되었다. 미군정은 브라운(Rothwell Brown) 대령을 제주지구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강경 진압을 계속하면서 6월 23일에 재선거를 실시하려고 하였으나 이마저도 무산되었다. 이 과정에서 5월 20일 경비대원 41명이 탈영하여 무장대에 가담하였으며, 6월 18일에는 온건파 김익렬의 후임으로 경비대 연대장으로 와 있던 강경파 박진경 대령이 부하 대원에게 암살당했다.

4 민간인 학살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 신생 정부가 그 해 10월 11일 제주도경비사령부를 설치하면서, 소강 상태이던 충돌은 극적인 변화를 맞이하였다. 10월 17일 송요찬 제9연대장은 제주 해안선으로부터 5㎞ 이외의 지점 및 산악지대의 무허가 통행을 금지하고 이를 어기면 폭도배로 인정하여 총살에 처할 것이라는 포고문을 발표하였다. 금지된 지역은 해변을 제외한 중산간마을 전부를 포함했다. 곧이어 10월 18일에는 제주 해안이 봉쇄되었고, 11월 17일에는 제주도 전역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진압 군경은 무장대의 은신처를 제거하기 위해 중산간마을 주민들을 해안으로 강제 소개(疏開)하는 한편, 가옥을 파괴하고 방화하였다. 이 시기부터 이듬해 봄 3월에 이르는 약 5개월 동안 이른바 ‘중산간지역 초토화작전’으로 집중적인 집단 살상이 발생했다. 95%의 마을이 불에 타 없어지고, 소개령을 전달받지 못해 마을에 남은 마을의 노약자들까지 살해되었다. 이전까지 1,000여명 미만이던 사망자 수가 이 시기에 급증하여, 인구에 10%에 달하는 2만 5천에서 3만여명에 이르렀다. 진압 군경과 서북청년단 등 우익단체원들은 재판 절차도 없이 주민들을 집단으로 사살했으며, 소개지에서도 가족 구성원이 모두 집결하지 않은 경우 ‘도피자 가족’이라 하여 부모와 형제자매를 대신 죽이는 이른바 ‘대살(代殺)’을 자행하기도 했다.

12월 말 진압부대가 9연대에서 2연대로 교체된 후에도 강경 진압은 지속되었고, 1949년 1월 서청 단원으로 편성한 2연대 3대대가 조천면 북촌리에서 주민 400여명을 한꺼번에 총살한 이른바 ‘북촌사건’은 가장 많은 인명피해를 낸 대표적인 민간인 학살 사례였다. 주민들이 진압 군경을 피해 산으로 들어가 무장대의 일원이 되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에, 강경한 소개작전이 오히려 사태가 장기화된 원인이기도 하였다.

5 사태 종결 이후 국가기념일 지정까지

1948년 12월 31일 계엄령이 해제되었고, 1949년 3월 제주도지구 전투사령부가 설치되었다. 그러면서 진압과 함께 주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선전활동인 선무(宣撫) 작전을 병행하였고, 이에 많은 주민들이 하산하였다. 1949년 5월 10일 재선거가 치러진 데 이어 6월에는 무장대 총책인 이덕구가 사살되면서 무장대는 사실상 궤멸되었다. 이듬해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전쟁 초기 전국적인 예비검속, 즉 인민군에 협력할 ‘개연성’이 있는 사람을 사전에 통제하려는 국면에서 약 3,000여명에 이르는 4·3 사건 관련자들도 즉결처분 되었다. 당시 한라산에 잔존한 무장대는 60여 명이었으나 1952년 10월 말에서 1953년 11월 말까지의 진압작전으로 잔여 인원은 지속적으로 줄어들었다. 전쟁이 끝난 1954년 9월 21일 한라산의 금족(禁足) 지역이 전면 개방됨에 따라 4·3 사건은 발발 이후 7년 7개월 만에 사실상 종결되었다. 마지막 무장대원은 1957년 4월 2일에 생포되었다.

사건이 종결된 이후에도 희생자들과 유족들은 ‘빨갱이’라는 낙인 때문에 피해사실을 드러내지 못하였다. 군사정권이 종결되고 한국사회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비로소 이들의 진상규명 요구가 이어졌고, 2000년 1월 12일 마침내 ‘제주4·3사건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을위한특별법’이 제정, 공포되었다. 이에 따라 그해 8월 28일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가 발족하여 진상조사에 착수하였다. 그리하여 2003년 10월 31일 진상조사위원회의 의견에 따라 노무현 대통령이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와 토벌대의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국가권력에 의한 대규모 희생이 이루어졌음을 인정하고, 유족과 제주도민에게 공식 사과문을 발표하였다. 또한 제주 4·3 사건에 대한 공동체적 보상의 일환으로 4·3평화공원조성사업이 진행되었고, 2008년 3월 28일 제주시 봉개동에서 4·3평화공원이 개관하였다. 2014년에는 ‘4·3희생자추념일’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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