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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헌헌법

대한민국 최초의 헌법

1948년

제헌헌법 대표 이미지

헌법(초안, 헌법기초위원회 3독회 심의안, 1948.6.18)

한국사데이터베이스(국사편찬위원회)

1 개요

1948년 5월 10일 남한 지역에서 총선거가 시행되어 총 198명의 국회의원이 선출되었고, 이들로 제헌국회가 구성되었다.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간 제헌국회의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과제는 새로운 국가를 수립하는 데 필요한 헌법을 제정하는 것이었다. 제헌국회는 헌법기초위원 30명과 실무 작업을 맡을 전문위원 10명을 위촉해 빠른 속도로 헌법을 작성해나갔다. 1948년 7월 17일 제헌국회에서 공포된 제헌헌법은 전문(前文), 10장, 전체 103개조로 구성되었다.

2 배경

1948년 5월 10일 남한 지역에서 제헌국회를 구성하기 위한 총선거가 시행되었다. 이 선거에서는 남한 의석 200석 가운데 치안 문제가 있던 제주도 2개구를 제외한 198개 선거구에서 198명의 국회의원이 선출되었다. 5월 31일 첫 제헌국회가 열려 최고령자로 임시 의장이 된 이승만의 사회로 의장 및 부의장 선거가 진행되었다. 의장에는 압도적인 득표로 이승만이 선출되었고, 부의장은 재선거를 거쳐 신익희와 김동원이 선출되었다.

3 헌법 제정 과정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간 제헌국회의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과제는 새로운 국가를 수립하는 데 필요한 헌법의 제정이었다. 이에 6월 1일에 소집된 제2차 국회 본회의에서 헌법기초위원을 선출하기로 하고, 전형위원으로 각 도별 1명씩 10명을 선출했다. 이 전형위원들은 국회의원 중 30명의 헌법기초위원을 선출했다. 그러나 이들은 국회의원들로 모두가 헌법 제정에 전문지식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실무 작업을 도와줄 10명의 전문위원을 별도로 선임했다. 전문위원은 유진오·권승렬·노용호·윤길중·고병국·한근조·차윤홍·임문환·노진설·김용근 등으로, 이들은 법조계 전문가, 법학 전공자, 법전기초위원회 분과위원 등의 인사들로서 먼저 헌법 초안의 작성을 담당했다.

헌법기초위원회는 6월 3일부터 22일까지 모두 16회에 걸친 회의를 통해 헌법의 가장 기본적인 내용 즉, 헌법의 원칙, 국호, 정부 형태, 국회의 구성 방법(단원제, 양원제) 등에 대한 격렬한 토론을 진행했다. 헌법기초위원회는 유진오와 행정연구위원회가 작성한 헌법초안(‘공동안’)을 심의 원안으로 하고 법전편찬위원회 헌법기초분과위원회안(일명 ‘권승렬안’)을 참고안으로 하여, 각 초안을 한 조문씩 읽고 첨삭‧토의하는 독회 방식으로 헌법안을 작성했다. 국호는 제2독회 첫 날인 6월 7일 제4차 헌법기초위원회에서 대한민국, 고려공화국, 조선공화국, 한국 등 여러 의견이 나온 가운데 표결 결과 대한민국으로 결정되었다. 이로써 헌법 초안이 작성되었고, 이는 6월 23일 제17차 국회 본회의에 상정되었다.

본회의에서 조헌영 위원이 헌법안을 낭독하고 헌법기초위원회 위원장 서상일 의원이 헌법의 유래와 논쟁이 되었던 사항에 대해 설명했으며, 전문위원 유진오는 헌법의 기본정신에 대해 설명했다. 헌법안 심의는 통상의 회의 방식대로 3독회로 진행되었으며 6월 23일에 시작해 7월 12일에 마무리 되었다. 제1독회에서는 국호, 인민과 국민의 차이, 정부형태, 국회 구성 문제 등에 대한 토론이 진행되었다. 이를 통해 국호는 대한민국으로, 정부형태는 대통령제로, 국회 구성은 단원제로 확정되었다. 제2독회에서는 헌법 전문의 수정, 신체의 자유 조항, 교육 관련 조항, 근로자의 이익균점권과 경영참가권, 국회 구성, 대통령 선출방식, 국무총리 임명 시 국회 동의, 대법원장 및 대법관 임명 시 국회 동의, 농지와 산림분배, 반민족행위자 처벌, 적산 처리 문제 등이 논의되었다. 7월 12일 진행된 제3독회에서는 헌법 제103조까지 모두 낭독한 뒤, 전원일치로 헌법 통과가 선포되었다. 최종적으로 7월 17일 국회의장 이승만이 헌법안에 서명‧공포했다.

4 주요 내용

1948년 7월 17일 공포된 제헌헌법은 전문(前文), 10장과 전체 103개조로 구성되었다. 제헌헌법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국민은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함에 있어서 정의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며 모든 사회적 폐습을 타파하고 민주주의 제제도(諸制度)를 수립하여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各人)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케 하며 각인의 책임과 의무를 완수케 하여 안으로는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기(期)하고 밖으로는 항구적(恒久的)인 국제평화의 유지에 노력하여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할 것을 결의하고 우리들의 정상 또는 자유로히 선거된 대표로서 구성된 국회에서 단기 4281년 7월 12일 이 헌법을 제정한다.

전문에서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했다고 명시해 대한민국의 건립과 헌법의 제정이 3‧1운동의 정신에 힘입고 있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제헌헌법의 주요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하고 민주공화국임을 명시했다. 둘째, 국민의 기본권을 광범위하게 규정했다. 정신적‧신체적‧경제적 자유권이 체계적으로 정리되었고 근로자의 이익균점권이 인정되었으며, 생활무능력자에 대한 보호, 혼인과 가족의 건강보호 등 사회적 기본권이 규정되었다. 셋째, 국회는 임기 4년제의 단원제로 채택했다. 국회는 입법권 외에 예산안 심의결정, 조약의 비준과 선전포고에 대한 동의권, 국정감사권 등의 권한이 부여되었다. 대통령·부통령·국무총리·국무위원 등의 직무수행에 관하여 헌법 또는 법률에 위배한 때에는 국회는 탄핵의 소추를 결의할 수 있도록 하며, 탄핵사건을 심판하기 위하여 탄핵재판소를 설치했다. 넷째, 정부형태는 대통령 중심제로 하되 내각책임제적 요소를 가미했다. 대통령과 부통령을 국회에서 선출하도록 하고, 대통령과 부통령의 임기는 4년, 한 차례 중임을 허용했다. 다섯째, 대법원장인 법관은 대통령이 임명하고 국회의 승인을 얻도록 했다. 여섯째, 경제 질서는 ‘사회정의의 실현’과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발전을 기함’을 기본으로 삼았다.

5 쟁점 사항

헌법 초안 작성 시 쟁점이 되었던 것은 통치구조와 정부형태를 둘러싼 국회의 내각책임제안과 이승만의 대통령중심제안의 대립이었다. 1948년 6월 20일, 헌법 초안을 국회에 상정하기 3일 전까지도 제헌국회 헌법기초위원들은 내각책임제를 고수하고 있었다. 이는 대통령에게 상징적인 권력만 부여하고 내각 특히 국무총리에게 실제적인 정치권력을 부여하며, 그 권력은 국회에 의해 통제되는 형태였다. 헌법기초위원들은 내각책임제가 국회와 정부의 대립을 제도적으로 해결할 수 있고, 대통령의 독재를 막을 수 있기 때문에 대통령중심제보다 정국 안정을 달성하는 데 용이하다고 주장했다. 또한 한민당의 입장에서, 이승만에 필적하는 대중적 정치 지도자는 부재하지만 내각제를 집단 운영할 수 있는 유능한 인재들이 많다는 판단 하에 한민당 출신 헌법기초위원들이 내각책임제를 관철시키고자 했다.

그런데 6월 21일 헌법기초위원회에 출석한 이승만은 만일 국회가 내각책임제를 채택하면 정부 수립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강압적인 태도를 드러냈다. 이승만은 대통령의 임기를 보장하는 제도가 정부의 안정을 가능하게 한다고 생각했다. 결국 한민당은 내부 진통 끝에 내각책임제적 요소가 상당히 가미된 절충식 대통령중심제의 헌법으로 수정하는 데에 합의했다. 따라서 기존 내각책임제의 헌법 초안은 국무총리를 두는 절충식 대통령 중심제로 하룻밤 사이에 변경되었다.

이러한 결과로 만들어진 제헌헌법은 대통령중심제를 채택하면서도 이질적인 의원내각제도 하의 국무원제도를 두게 되었다. 즉 국무총리 및 각부장관 이외에 합의제의 행정기관인 국무원이 행정 조직의 일부분을 이루게 되었다. 대통령은 형식상으로 보면 국무회의 의장에 지나지 않는, 4년의 임기 보장을 받는 것 외에 매우 모호한 권력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이는 실제로 현실 정치에서 대통령과 국회 간의 상당한 권력 충돌을 유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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