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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 건설 붐

산유국(産油國)의 경기 호황과 한국 건설업의 중동 진출

1973년 ~ 1982년

중동 건설 붐 대표 이미지

1976년 이란 가친지구 조선소 건설현장에 파견된 한국인 건설 노동자들

동아일보

1 개요

국내 기업의 해외 건설 수주는 외화를 획득하여 한국경제의 국제수지 개선에 기여한다. 1965년 현대건설이 태국 파타니와 나라티왓을 잇는 고속도로를 최초로 수주하면서 해외 건설 공사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1973년 4차 중동전쟁 과정에서 중동 산유국(産油國)들은 석유자원의 무기화를 결의했고, 이에 따라 국제유가의 급격한 상승을 낳은 이른바 1차 석유파동이 발생했다. 중동 산유국의 10년에 걸친 장기호황이 시작되었고, 이들은 막대한 오일머니를 기반으로 도로, 항만 등 사회간접자본을 건설하였다. 1973년 삼환기업이 사우디아라비아의 알울라와 카이바를 잇는 고속도로 공사를 수주하면서 ‘중동진출 기업 1호’라는 타이틀을 얻었고, 이후 동아건설 리비아 대수로 공사, 현대건설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 산업항 공사, 대우건설 파키스탄 고속도로 건설 등 1985년까지 7백억 달러의 공사를 수주하였다. 이는 1981년부터 1984년까지 석유 수입 대금의 36%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한국 기업과 함께 한국 건설 노동자들도 중동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1973년부터 증가한 중동 건설 노동자는 1982년 정점을 찍고 점차 감소하였다.

2 1960년대 한국 노동자는 해외로, 한국 건설사는 건설 현장으로

공업화가 본격화되지 않았던 1960년대 한국 사회에서 실업은 일상적인 문제였다. 또한 6·25전쟁 이후 태어난 베이비붐 세대의 등장과 피폐해진 농촌 상황은 인구문제를 심각한 사회문제로 부상시켰다. 정부는 산아제한(産兒制限)을 기본으로 하는 강력한 가족계획과 함께 1962년 ‘해외이주법’을 제정했다. 이 법은 ‘국민의 해외진출을 장려함으로써 인구정책의 적정과 국민경제의 안정을 기함과 동시에 국위를 선양함을 목적’으로 하였다. 지금처럼 여권 발급과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못한 시대였지만 인구조절, 외화 획득을 목적으로 노동이주를 권하는 사회가 된 것이다. 1963년부터 광부를 서독으로 보내기 시작했고, 1966년부터는 간호사를 서독으로 보냈다.

한편 한국 건설 회사들은 1950년대 전후 복구, 1960년대 공업화를 맞이하며 건설 경험을 축적하며 성장하였다. 특히 1960년대 중반까지 건설업계는 주한미군 군납 공사에 많은 부분을 의존하였다. 1960년대 초반 국내 전체 건설 수주의 10% 가량이 주한미군 관련 공사였다. 미군 군납공사에서 건설 경험을 축적한 한국 기업들은 해외 건설에 나섰다. 1963년 삼환기업이 처음 베트남에서 공사를 시작했지만, 1965년 현대건설이 처음으로 해외 수주를 달성했다. 해외건설협회는 이 날짜를 기리며 현재까지 2년마다 ‘해외건설·플랜트의 날’ 행사를 진행한다. 한국 건설사들은 베트남전쟁 복구사업에도 참여하여 해외 건설 경험을 축적했다. 현대 건설의 캄란만 준설공사, 대림산업의 라치기아 항만공사, 삼환기업의 주베트남 한국군 사령부 신축공사 등이 대표적이다.

3 1970년대 오일머니, 한국 노동력을 흡수하다

1973년 걸프만 인근의 산유국들은 석유를 무기화하면서 원유 생산 가격을 높이기 시작했다. 이는 1차 석유파동을 전세계에 일으켜 한국 경제에도 큰 위협이 되었다. 정부는 1974년 1월 긴급하게 물가 안정, 세금 감면, 부당노동행위 처벌 강화 등을 포함하는 긴급조치 제3호를 시행해야 했다. 반대로 1차 석유파동은 산유국의 경제 호황을 의미하였다. 바레인, 쿠웨이트, 오만, 카타르, 아랍에미리트, 사우디아라비아 등은 막대한 오일머니를 기반으로 부족했던 도로, 항만 같은 사회간접자본을 건설하는 계획을 수립했다. 빠른 건설 계획은 부족한 노동력을 해외로부터 급격하게 흡수하는 계기가 되었다. 중동 산유국의 외국인 노동자 수는 1975년 37%에서 1985년 65%로 10년 만에 두 배 가까이 증가하였다. 특히, 건설업에 종사할 단순노무직 노동자 및 기능공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한국은 1973년부터 중동 인력 진출이 빠르게 증가하였다. 1975년에는 해외진출 한국인의 30%가 중동으로 파견되었는데, 1980년에는 그 비중이 80%까지 증가했다. 정부는 중동 건설 붐이 일어나자 1976년 1월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중동경제협력위원회’를 구성했고, 그 산하에 경제기획원(현 기획재정부) 차관을 위원장으로 하는 ‘중동경제협력실무위원회’를 두었다. 다시 실무위원회는 산하에 경제기획원 경제협력차관보를 반장으로 하는 ‘중동경제협력 종합전담반’을 두었다. 전담반은 정부 15개 부처에 관련 업무를 보게 하였고, 특히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에는 현지 공관 전담반을 구성하기도 하였다. 1978년 노동청(현 고용노동부)은 증가하는 해외 노동인력을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위해서 해외근로국을 설치했다.

중동 특수는 아라비아반도와 걸프만을 넘어 세계 곳곳에 한국인을 진출시켰다. 1970년대 초부터 정부는 유럽 및 미국 시장으로 한국 기업의 진출을 독려했는데, 해외 지사를 설립하는 기업에 지원금을 제공하였고, 3백만 달러 이상 수출하는 회사는 의무적으로 해외 지사를 설치해야 했다. 당시 영국 런던은 유럽의 금융 중심지로 한국의 종합무역상사, 건설사들이 공사 수주 및 자재 공급을 위해 해외 지사를 설립하기에 좋은 입지였다.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 항만공사를 담당했던 현대건설, 산유국 수주 상담을 진행했던 아세아건업, 해외 건설을 이끌었던 삼환기업 등이 런던에 중동 건설 지원을 위한 해외 지사를 설립했다.

1976년 11월 3일 해외건설 면허를 취득한 토건업체 52개사와 용역업체 10개사로 구성된 ‘해외건설협회’가 사단법인으로 설립되었다. 재무부 장관을 역임했던 홍승희가 초대회장으로, 건설부 기획관리실장을 역임했던 정재덕이 상근부회장으로 취임했다. ‘해외건설촉진법’에 의거하여 협회장은 건설부 장관의 승인을 얻어야 했다. 협회는 회원사의 중동 진출 지원을 목적으로 자료 제작, 정부 협의 등을 수행하고, 해외 건설 노동자를 대상으로 한 월간지 『밀물』을 발행하기도 했다. 이 잡지에는 해외 건설 노동자 및 가족들의 편지, 수기 등이 실렸다.

해외건설협회는 해외에 취업한 건설 노동자 수를 통계로 작성했는데, 1978년 8만 4천여 명부터 시작하여 1982년에는 17만 1천여 명까지 증가하였다. 매년 해외 취업 건설 노동자 가운데 93~98%가 중동 건설 붐의 일부로 파견되었다. 중동에 진출했던 한국인 노동자는 기능공이라도 1년 단위로 계약하는 비정규직 노동자였다. ‘이역만리’, ‘열사의 땅’에서 큰 고생을 한다고 알려졌지만 가난으로부터 탈출을 꿈꾸는 젊은 남성들이 중동 파견에 지원했다. 1975년 기준으로 국내 건설 취업자와 해외 건설 취업자의 급여는 무려 3.65배나 차이가 났기 때문이다. 약 1년간 중동에서 고생을 하고 돌아오면 점포 마련, 채무 청산, 결혼자금 마련 등을 할 수 있었다. 대부분 기능공에게 연차휴가, 퇴직금은 없었고, 현지에서 직무와 관계없는 일을 맡기도 했지만 단기간 고액을 벌기 위해 감내해야 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오히려 1년의 단기계약은 장시간의 고된 노동을 높은 임금으로 보상받으려는 심리로 이어졌다. 해외 건설 취업자들은 시간외 근무라는 일명 ‘오버타임’이 있는 곳으로, 오버타임이 적다면 많은 곳으로 이동하고자 했다. 나아가 이들은 높은 임금 단가만큼이나 노동 강도가 강한 현장을 찾았다.

4 1977년 현대건설, 주베일 산업항 공사장에서 발생한 3·13 폭동

높은 임금에 대한 기대는 이것이 무너질 경우에 더 큰 불만으로 나타날 수 있었다. 현대건설은 20세기 최대의 공사로 평가받는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 산업항 공사를 수주하였다. 정주영 회장은 ‘내 머릿 속에서 ‘공기 단축’이라는 네 글자 외에는 아무 생각도 없었다’라고 말할 정도로 공사를 밀어 붙였고, 실제로 공기를 10개월이나 앞당겨 1979년 2월 완공되었다.

하지만 주베일 산업항 공사는 1977년 3·13 폭동이라 불리는 거대한 저항을 겪었다. 당시 현대건설 기능공들은 자신들의 임금이 인근 동아건설 기능공 임금의 1/3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여기에 강압적 노무관리, 즉 사원과 기능공의 차별대우, 비인격적 대우는 노동자들의 불만을 누적시키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관리자인 중기계부장이 트럭을 느리게 운행했던 기능공의 안면을 구타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분노한 노동자들은 쇠뭉치, 나무방망이 등을 들고 모여들어 관리 직원을 구타하고, 기물을 파괴하였다. 소식은 주변 현장에도 퍼져 해상육상기지 확장공사 노동자들까지 합세하여 3,000여 명의 노동자들이 항의 농성을 벌였다. 이들은 자체 수습위원회를 구성하여 대통령에게 보내는 메시지, 16개 요구조건을 담은 결의문을 채택하였다.

집회의 자유가 없던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비밀경찰은 기관총에 실탄을 장전하고 노동자들을 포위했다. 사우디 비밀경찰 간부는 노동자들을 즉결 처분하겠다는 의사까지 밝혔다. 긴급한 상황 속에서 주사우디아라비아 대사관은 노무관, 건설관, 중앙정보부 파견관 등을 비상 소집했고, 사우디아라비아 소재 22개 공사장에 이 소식이 전파되지 않도록 조치를 취했다. 소식을 접한 정부는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정주영 회장을 불러 진상과 책임을 물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중동 방문을 계획하던 시기라 조심스러우면서도 발 빠르게 대응했다. 3,000여 명의 노동자들은 대표를 뽑아 정부와 협상 테이블에 앉게 되었는데, 협의 결과 21명의 주모자는 조기 출국되어 처벌을 받았고, 노동자들이 주요하게 요구했던 보너스 600% 지급, 인간적 대우 등은 사건이 종결되고 15일 이내에 수용되었다.

이 사건은 1970년대 한진 노동자 KAL 빌딩 방화 사건, 현대조선소 노동자 투쟁과 마찬가지로 강압적인 노무관리, 노동자간 차별 대우를 계기로 발생한 우발적 사건이었다. 그럼에도 1970년대 국가, 민족, 경제성장 등의 수사(修辭)를 받아들였던 노동자들도 ‘폭동’과 같은 집단행동에 나설 수 있는 존재임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했다.

5 1980년대 중동 건설 붐의 퇴조

경제성장의 시기, 중동 건설 노동자들은 한국 사회에서 ‘산업전사’, ‘열사의 땅에서 흘린 땀방울’, ‘외화획득의 첨병’ 등으로 재현되었다. 1975년 김종필 국무총리, 1980년 최규하 대통령은 사우디아라비아를 방문하였고, 이들이 건설 노동자들을 격려했다는 소식이 「대한뉴스」로 제작되었다. 중동 파견은 노동자 입장에서 가난을 벗어나기 위한 고된 노동과 보상으로, 정부 입장에서 외화 획득과 안정적 노사관계의 선전이라는 공통의 이해관계 속에서 ‘성공 신화’로 만들어졌다. 부(富)를 향한 강한 열망은 근면주의·국가주의와 맞물려 작동하면서도 ‘경제성’이 사라진다면 언제든 무너질 수 있는 취약한 구조 위에 놓여 있었다.

1970년대 중반부터 증가한 중동 건설 인력은 1982년 17만여 명을 정점으로 줄어들었다. 그 이유로는 첫째 국내 임금 여건이 개선되면서 국내와 해외 인건비의 차이가 줄었다. 1975년 국내외 건설 취업자 급여 격차는 3.65배였지만 1982년에는 1.53배까지 줄어들어 해외 취업의 이점이 사라졌다. 둘째 중동에서 고용하는 외국인 노동자 숫자가 늘어나면서 노동시장에서 경쟁은 치열해졌고, 그 틈새로 터키, 파키스탄 등의 저임금 노동자들이 유입되었다. 반대로 한국인 노동자 임금은 상승하는 추세였다. 셋째 중동 현지 건설업 상황이 나빠졌다. 중동 산유국은 점차 자국 수주 비중을 늘려나갔다. 전체 공사비용을 기준으로 1975년 자국 수주 비중은 2.3%에 불과했는데 1980년대에는 30% 이상을 의무화하였다. 공사대금 지급 기간도 1982년을 기준으로 이전 2~3개월, 이후에는 3~6개월로 늦어졌다. 선수급 지급 비율도 15~20%에서 5% 내외로 감소하였다. 한국인의 해외 건설 인력은 급감했고, 중동에 남은 한국인들은 중동 내 외국계 회사로 취업했으며, 남은 한국 건설사는 저임금 외국인을 고용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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