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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자치제도의 시행

민주주의와 참여를 향한 긴 여정

미상

지방자치제도의 시행 대표 이미지

1952년 4월 25일 부산 근교의 동해 마을 투표소의 모습

국가기록원

1 개요 : 지방자치제란?

지방자치제도란 지역에서 살아가는 주민들과 자치단체가 자신들의 입장에서 지역공동체의 과제 및 공공행정을 다루는 정치제도다. 주민 스스로가 자치단체장을 선출하여 공공행정을 담당하게 하고, 역시 주민들이 선출하고 구성한 지방의회를 통하여 지방행정을 감시, 견제해 민주주의를 실현해 나가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나아가 지방자치제는 지역 사회 내에서 발생하는 여러 문제들을 고민하고 대처하고자 주민의 자율적 참여에 기초한 지방자치조직을 운영하는 것을 포함한다.

해방과 함께 제헌헌법 에 지방자치제에 관한 내용이 포함된 이후 1949년 7월 4일 「지방자치법」이 공포되어 운영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주민의 의사에 기초하여 직선제 선거를 통해 단체장을 선출하고 운영하려는 노력은 한국현대사 내내 기나긴 시련을 겪어야만 했다. 이승만 정권 후반기를 비롯하여, 박정희 정권부터 노태우 정권 시기까지 지방자치제도는 실현되지 못하였다. 30여 년이 경과한 1991년 3월 26일에 이르러서야 시·군·자치구의회(기초의회) 의원선거를 실시하였고, 1995년 6월 27일에는 광역 및 기초단체장과 광역 및 기초의회 의원선거를 실시하였다. 이처럼 한국현대사에서 지방자치제는 절차적, 제도적 측면에서 지역 주민의 의사를 반영하는 방향으로 변화하였으나, 민주주의와 참여를 보장하기 위한 내용적, 질적 측면에서 해결해야 할 과제가 남았다.

2 해방 직후 지방자치제 구상과 제헌헌법

해방 직후 여운형을 주축으로 조직한 건국준비위원회는 140여개 지부를 설립하였고, 이후 인민위원회로 개편되었다. 인민위원회는 면·리·동 단위까지 조직되었는데, 연구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당시 134개 군 가운데 126개 군에 인민위원회가 설치되었고 이 중 절반가량이 지역행정을 담당하였다. 이렇게 인민위원회는 지역의 유력자를 비롯하여 자발적이고 자주적인 자치조직으로 건설되었으나 미군의 진주 및 미군정 실시와 함께 해체되거나 성격이 변화하였다. 주민들의 의사와 달리, 미군의 현상유지정책에 의거하여 식민지 지배에 협력하였던 경찰과 관리, 유력자들이 미군정에 의해 유임되거나 등용되었기 때문이었다.

나아가 1946년 11월 15일 미군정은 군정법령 126호 「도급기타(道及其他)지방의 관공리, 회의원(會議員)의 선거」를 제정, 공포하였다. 이 법령은 “도 급 기타 지방의 중요 관공리와 각 회의원을 조선인 대다수의 자유로운 선거에 의하야 선출할 규정을 제정하야 민주주의적 지방 자치의 원칙하에 국가 발전을 촉진”한다는 목적을 내세웠다. 또한 직선제에 기초하여 도지사, 부윤, 군수 등과 도·부·읍·면의 회의원에 관한 선거방법과 임기, 급여, 관공리의 임무 및 직능, 자격 등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하지만 미군정은 구체적인 실시 계획이나 방법 등에 관하여 논의를 이어가지 않았다.

이에 대하여 좌익 정치세력이었던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에서는 도지사와 도협의기관을 축으로 하는 지방행정제도 대신 인민위원회제도 채택을 요구하였다. 또한 민전은 중앙선거관리위원회 및 각급선거관리위원회 구성에 민전이 50% 이상 차지할 것과 투옥·검거된 자의 즉시 석방, 경찰의 간섭 및 탄압 배제, 토지 몰수 및 무상분배 등을 요구하였다. 민전의 이러한 요구는 미군정과 우익세력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마련된 것이었다. 이처럼 미군정과 우익, 좌익 세력들은 민주주의의 보급 및 실현을 위하여 지방자치제의 필요성에 공감하였으나, 해방 직후 신국가건설을 위한 입장차와 정치적 갈등 속에서 지방자치제 문제를 다루었다.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에 따라 한반도의 신탁통치와 임시정부 수립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미소공동위원회가 설치되었다. 하지만 두 차례의 미소공동위원회가 결국 부결되고 UN 총회에서 남한 지역만의 총선거를 실시하기로 결의함에 따라 남북 분단이 가시화되었다. 제헌헌법의 제8장 〈지방자치〉 제96조, 제97조에 지방자치에 관한 내용이 포함되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8장 지방자치
제96조
지방자치단체는 법령의 범위내에서 그 자치에 관한 행정사무와 국가가 위임한 행정사무를 처리하며 재산을 관리한다.
지방자치단체는 법령의 범위내에서 자치에 관한 규정을 제정할 수 있다.
제97조
지방자치단체의 조직과 운영에 관한 사항은 법률로써 정한다.
지방자치단체에는 각각 의회를 둔다.
지방의회의 조직, 권한과 의원의 선거는 법률로써 정한다.

3 지방자치제의 정치적 굴절과 시련

제헌헌법에 따라 대한민국 정부수립 직후인 1949년 7월 4일 지방자치법이 공포되었다. 이 법에는 서울시장과 도지사는 임명하되 시·읍·면장은 지방의회에서 선출하도록 규정하였다. 지방의회가 단체장 불신임 결의권을, 단체장이 의회 해산권을 가지게 되어 내각책임제적 특성이 포함되었다. 지방자치법 공포 이후에도 이승만 정권은 행정체제 미비와 치안 불안정을 이유로 한동안 지방자치제도를 실시하지 않다가, 1952년 4월 25일 임시수도 부산에서 지방선거 실시를 전격 선언하였다. 이승만 정권과 자유당의 지지기반을 전국화하기 위한 목적에서였다.

지방선거 실시 및 사사오입 개헌 등을 활용하여 이승만 대통령은 지지 세력을 공고화하고 장기집권을 모색하였다. 이후 지방선거와 정·부통령 선거 등에서 야당이 강세를 나타내자 이승만 정권은 1958년 12월 24일 지방자치법을 개정하였다. 시·읍·면장에 대한 선출제를 폐지하고 임명제로 바꾸는 것이 핵심이었다. 시·읍·면장을 여당에 친화적인 인물로 임명하여 1960년 정·부통령 선거에서 이겨 독재를 지속하려 한 이승만 정권은 3·15 부정선거에 항거하였던 4월 혁명에 의하여 무너졌다.

제2공화국 등장 이후 1960년 11월 1일에는 지방자치법이 개정되었고 12월에는 지방자치선거가 실시되었다. 하지만 이듬해 5.16 쿠데타가 발생하였고 군사혁명위원회는 포고 제4호로 전국의 지방의회를 해산시켰다. 또한 국가재건최고회의령 제42호(국가재건비상조치법 제20조), 지방자치에 관한 임시조치법(1961. 9. 1)을 공포하여 서울특별시장, 도지사를 비롯한 자치단체장에 관한 임명제를 다시 실시하였고, 기존의 읍·면 자치에서 군(郡) 자치제로 전환하였다.

제3공화국 헌법에서는 지방자치제 실시를 위한 지방의회 구성 시기를 법률로 정한다고만 해두었고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유신헌법 부칙 제10조에는 “조국통일이 이루어질 때까지” 지방의회를 구성하지 않는다고 명시하였다. 이후 한국의 지방자치제는 1990년대 초 재개될 때까지 중앙집권적인 지배구조 속에서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한국의 지방자치제는 중앙정부의 명령과 위임사무를 충실하게 수행하는 ‘지방행정’의 역할을 담당하였을 뿐, 주민의 자율적인 요구와 참여에 기반을 둔 ‘자치’를 사실상 외면하고 있었다.

이에 반발하여 지방자치제 실시를 촉구하는 목소리가 정치세력과 사회, 학계 일각에서 제기되기도 하였다. 이미 1960년대 초반, 지방자치가 없으면 민주주의가 아니라는 주장이 학계에서 강력하게 제기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쿠데타세력과 지배엘리트들은 근대화와 경제성장을 위한 효율성을 강조하면서 지방자치제 실시를 반대하였다. 즉, 행정의 민주적 운영이 초래하는 사회적 비용이 상당하기 때문에 국가 차원에서 경제적 낭비나 비효율화가 발생할 수 있고, 한국인들의 민주주의 이해 수준이 낮고 자치의식이 희박하여 지방자치제를 실시하기에는 시기상조라는 이유에서였다. 사회적 비용과 경제적 낭비, 자치의식 미비 등을 이유로 지방자치제 실시에 반대한 흐름은 1970~80년대에도 계속되었다. 단적으로 제5공화국 헌법은 부칙을 통해 지방자치의 시행 시기에 관하여 언급하였는데, 지방자치단체의 재정자립도를 감안한다는 것이었다.

4 30여 년만의 지방자치제 실시, 이후의 과제

1987년 6월 항쟁과 직선제 개헌을 통하여 출범한 제6공화국에서는 지방자치제가 실시되리라 기대를 모았다. 하지만 당시 노태우 대통령은 야3당이 합의하고 통과시킨 지방선거 실시 법안에 대하여 거부권을 행사하였다. 이후 여야 합의에 따라 지방선거 실시에 합의하였다가 3당 합당 이후에 거듭 연기하는 등 정치적 갈등을 거친 후에야 지방자치 선거를 실시하기로 여야 간에 최종 합의하였다. 결국 1991년 3월 26일 기초단체인 시·군·구 의회 의원을 선출하였고, 단체장 선출을 포함한 지방자치 선거는 1995년 6월 27일에서야 이루어졌다.

지방자치제의 본격적 실시를 통하여 제도적, 형식적 개선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지방자치제의 목적과 의의를 실현하기 위한 내용적, 질적 개선의 과제도 여전하다. 중앙정부와 국가권력의 과도한 지배로부터 정치적, 경제적으로 벗어나 자율과 참여에 의한 자치를 구현해야 하지만, 중앙으로부터의 권한을 일부 이양하거나 배분한 것에 불과할 뿐 중앙종속적인 양상이 여전하다. 각 지역이 처한 조건이나 현실과는 무관하게 중앙정부와 국회가 정한 제도적, 법적 기준이 일률적으로 적용되는 것도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주민의 요구와 참여에 기초하여 지방자치를 모색하기보다는 중앙정치의 실력자들과 관계된 지역 인사들 혹은 중앙정치의 대리인이 단체장과 기초의원으로 선출되어 자치 본연의 의의를 퇴색시키기도 한다. 이러한 과제는 해방 이후 한국의 지방자치제 경험 속에서 거듭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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