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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벼 개발과 녹색 혁명

유신체제와 함께 피고 진 식량자급의 꿈

1971년 ~ 1980년

통일벼 개발과 녹색 혁명 대표 이미지

1970년대 경상북도 고령군 쌍림면 월막동의 공동 모내기 작업

전자사료관(국사편찬위원회)

1 개요

안정적인 식량 생산과 보급은 사람들의 생존 문제일 뿐 아니라 국가의 정치·경제·사회의 안정을 의미했다. 특히 한국은 급속한 공업화 및 인구팽창 문제에 직면하여 식량의 대량 생산 및 낮은 곡가(穀價)를 필요로 했다. 빠른 공업화와 수출을 중추로 발전하는 경제체제에서 식량증산(食糧增産)은 일종의 시대정신으로 여겨졌다. 통일벼는 농촌진흥청 주도로 1971년 개발되었고, 이후 정부 행정력에 기초하여 전국 농촌에 보급되었다. 통일벼가 보급되자 1977년 쌀 총 수확량은 1960년대 말에 비하여 30% 이상 급증했다. 일시적이지만 농촌 가구당 명목소득이 도시를 앞지르기도 했다. 증산에 힘입어 정부는 1977년 ‘녹색 혁명 성취’를 선언했다.

2 고질적인 식량부족 문제와 미국의 녹색 혁명 전략

한국 농업은 전통적으로 다수의 영세농(零細農)이 담당하였고, 해마다 농촌실태조사에서 보릿고개, 춘궁기(春窮期), 절량농가(絶糧農家) 문제가 등장하였다. 정부 입장에서 식량 부족은 사회 불안정의 요소이자 공업화 진전을 가로막는 장애물이었다. 1953년 조사에 따르면 전체 농가의 절반에 해당하는 약 110만호가 절량농가로 추정되었는데, 이와 같은 상황은 1960년대에도 크게 변화하지 않았다.

쌀 생산량의 부족은 곧 한국인의 주곡(主穀)인 쌀을 절약하자는 캠페인으로 나타났다. 절미운동(節米運動)은 이전 시기에도 있었지만 1960년대 들어 본격화되었다. 1962년 정부는 쌀 부족, 원조 밀가루의 충분한 보급 속에서 혼분식(混粉食) 장려운동을 개시했다. 1963년에는 식당, 여관, 호텔 등에서 점심에 한하여 쌀 원료 식사 제공을 금지하는 양곡소비제한조치까지 발표되었다. 정부는 1967~1976년까지 매년 혼분식 행정명령을 시달했고, 다음과 같은 ‘혼분식의 노래’가 학교에서 울려 퍼졌다.

“꼬꼬댁 꼬꼬 먼동이 튼다. 복남이네 집에서 아침을 먹네. 옹기종기 모여앉아 꽁당보리밥. 꿀보다도 더 맛좋은 꽁당보리밥. 보리밥 먹은 사람 신체 건강해”
- 혼분식의 노래 중

한편, 쌀은 냉전과 분단의 시대에서 대결 도구이기도 했다. 북한은 1960년 4․19로 장면 내각이 집권하자 전력공급 및 교역을 제안했는데, 한국 정부는 이를 ‘남한의 민심을 교란시키려는’ 것으로 여기고 ‘물품이 북한 동포 손에 직접 들어갈 것을 보장만 한다면’ 쌀을 보낼 수 있다고 역제안했다. 남북 대결구도 속에서 북한 평양방송, 한국 문화공보부는 서로의 악화된 식량 사정이나 1인당 쌀 소비량 비교 등을 국내에 전파하며 체제 대결의 신경전에 활용했다.

식량 증산을 둘러싼 체제 대결은 한반도 문제에 국한되지 않았다. 1968년 미국국제개발처(United States Agency for International Development, USAID) 윌리엄 가우드(William Steen Gaud) 처장은 아시아에서 눈부신 농업 생산으로 ‘소비에트식의 붉은 혁명과는 다른’ 녹색 혁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녹색 혁명은 아시아에서 공산주의의 파도를 막아낼 방파제이자 선제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또 하나의 혁명으로 그려졌다. 필리핀 소재 국제미작연구소(International Rice Research Institute, IRRI)는 녹색 혁명 수행의 주요 기관이었다. 연구소는 1962년 미국 포드와 록펠러 재단의 지원으로 설립되었는데, ‘제3세계 국가들이 공산주의 진영으로 편입되는 것을 방지’하는 것을 주요 목표로 설정했다.

3 ‘기적의 볍씨’, 통일벼 개발 과정

1962~84년 사이에 3,700여 명의 다국적 연구자들이 국제미작연구소의 다양한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80% 연구자는 아시아 출신이었고, 한국인도 항상 서너명씩 있었다고 한다. 그 가운데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허문회 박사도 1964년부터 2년간 특별연구원으로 연구소에 머물며 벼 품종개량 관련 연구를 수행했다. 연구소에서 개발되는 품종은 IR 계열로 불렸다.

한국 정부는 원래 농촌진흥청을 중심으로 IR 계열이 아닌 신품종 개발을 시도했었다. 1964년 중앙정보부는 열대성 자포니카 품종인 ‘나다(Nahda)’를 이집트에서 들여왔고, 서울대 농과대학 이태현 교수는 이를 개량하여 ‘희농(熙農)1호’를 개발했다. 농촌진흥청장에 취임한 이태현은 희농1호 상용화를 추진했지만 보급에 실패하며 1968년 물러나야했다. 이후 취임한 김인환 청장은 IR 계통에 관심을 가지며 국제미작연구소에 방문했고, 기술협약을 정식으로 체결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재가를 얻어 연구 인력을 총동원했고, 허문회 박사팀은 2년간 시험 끝에 다수확 품종인 IR-667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IR-667은 허문회 박사가 국제미작연구소에서 개발한 키작은 다수확 인디카 품종(IR-8)과 북방계 자포니카 품종을 교배한 후, 다시 인디카 품종과 교배하는 방법으로 만들어졌다. 이 볍씨는 키가 작아서 태풍과 병충해에 강했고, 무엇보다 생산량이 기존 볍씨 대비 30% 이상 많았다. 일장감응성(日長感應性)이 낮아 충분한 생육기간을 필요로 했고, 빠른 시기에 모내기를 하는 것이 중요했다. 기존 벼농사 대비 못자리 설치, 모내기 시기가 앞당겨져야 했다.

사실 IR-667은 한국인에게 익숙한 밥맛이 아니었다. 자포니카 계열보다 찰기 없는 동남아시아 인디카 품종에 가까웠다. 1971년 박정희 대통령을 포함해 정부 각료가 참여한 통일쌀 시식회에서 참석자의 28%인 11명만이 밥맛이 ‘좋다’고 무기명 투표했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은 투표 용지에 자신의 이름을 적고 ‘좋다’고 표기했다. IR-667은 익숙한 밥맛이 아니었지만 대통령의 증산의지를 담은 ‘기적의 볍씨’라 불렸다. 농촌진흥청은 이름짓기 현상모집에 돌입했다. 최종 후보는 만석꾼, 통일, 농진, 새나라였는데 그 중에 통일이 선택되었다. 당시 기록에는 ‘경제로서 부흥하면 북한을 압도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고 한다. 이처럼 통일벼는 첨예한 남북 대결 구도를 상징하는 이름이었다.

4 통일벼 보급과 녹색 혁명 선언

정부는 도시 공업단지에 값싼 노동력을 무제한적으로 공급하기 위해서 낮은 곡물 가격을 유지해야 했다. 정부는 신품종 통일벼를 보급하기 위해 농촌진흥청에 ‘식량증산 작전상황실’을 설치했다. ‘쌀 3천만 석 돌파 7단계 작전(영농준비 작전, 못자리 작전, 모내기 작전, 병충해박멸 작전, 풀베기 작전, 벼베기 작전)’ 명칭에서 보이듯 전쟁을 수행하는 태도로 증산운동, 통일벼 보급을 추진했다. 통일벼 보급을 위한 농촌지도사도 충원하였다. 1972년 양곡증산 임시 지도원 1,870명을 공개 시험으로 채용하고, 이들을 일주일간 훈련시켜 일선에 배치했다. 기존 일반 지도사에 더하면 각 읍면마다 약 3명씩 농촌 지도사를 파견한 셈이었다. 전국 농촌지도소도 1973년 649개에서 1975년 1,473개로 2년 만에 2배 이상 증가하였다.

정부는 통일벼 보급을 강조했지만 농민 입장에서 통일벼는 낯선 품종이었고 생김새부터 파종, 모내기, 시비, 농약도포, 추수 등 모든 생산과정에서 기존의 경험적 지식을 활용할 수 없었다. 농민 입장에서는 일년 농사, 연간 소득과 직결되는 중요한 문제였다. 정부는 라디오, 텔레비전, 겨울 농한기 영농교육, 특별기술교육, 각종 중간평가회 및 농민회합, 영농기술 교재 등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통일벼 영농기술을 전파하고자 했다. 1970~77년 사이 9천여 건의 농업기술 프로그램이 라디오와 텔레비전으로 송출되었는데, 대부분은 통일벼 재배 기술과 관련된 것이었다. 정부는 신품종에 대한 지식 보급과 재배기술 표준화를 통하여 쌀 생산량 증가뿐 아니라 생산과정부터 효율적인 중앙통제를 이룩하고자 했다.

통일벼 보급은 지식의 유통만으로 해결되지 않았다. 유신체제의 촘촘한 행정계통을 동원해야 했다. 시군읍면 행정직원은 설정된 지역 할당량을 채워야했고, ‘농가 방문 열 번 하기’ 등의 슬로건이 만들어졌다. 농민들은 통일벼 재배 실패를 정부에서 보상해주느냐 물을 만큼 신품종에 대한 거부감, 불안을 나타냈기 때문이다. 1978년 일부 공무원들이 실적을 허위 보고했다가 자체 감사에서 발각되었고, 다른 지역에서는 통일벼 재배 실적이 낮자 공무원들이 일반 묘판을 폐기 조치하고, 미재배 농가 명단을 농협에 통보하여 영농자금 지원 중단을 압박했다.

정부의 통일벼 보급운동은 1970년대 새마을운동과 함께 농촌 마을로 확산되었다. 1975년 쌀 생산량은 426만 7,000톤을 달성하여 쌀 자급률 100%를 최초 돌파했다. 1977년에는 통일벼 재배면적이 기존 자포니카 재배면적을 넘어섰고, 농가 평균 쌀 수확량은 헥타아르(㏊)당 4.94톤으로 총 600만 6,000톤을 기록했다. 세계 최고 수량성(收量性)까지 달성하자 박정희 대통령은 ‘녹색 혁명 성취’를 선언하고 관련자에게 훈장 및 포상금을 수여했다. 14년 만에 쌀 막걸리 제조, 3년 만에 쌀엿과 쌀떡 제조가 허용되었다. 인도네시아에 쌀 48만 6,000석을 현물 차관으로 공여하며 ‘드디어 쌀이 남아 수출하게 되었다’고 홍보했다. 1978년에는 통일벼 단일 품종이 전체 쌀 생산량, 재배 면적의 70%를 돌파했고, 수원 농촌진흥청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로 ‘녹색 혁명 성취의 탑’이 세워졌다.

5 유신체제의 종언과 함께 사라진 통일벼

1970년대 중반 통일벼는 획기적으로 쌀 생산량을 늘렸다. 반대로 밀, 옥수수, 콩 등 다른 식량 작물의 생산기반이 약화되었다. 쌀 자급률은 높아졌지만 반대로 전체 식량 자급률이 하락하여 1962년 94.6%에서 1980년 69.9%로 저하되었다. 풍부한 쌀 생산량이 소비자의 입맛까지 바꿀 수도 없었다. 소비자들은 찰기 없는 통일미보다 기존 일반미를 선호했고, 중산층 이상은 화학비료가 많이 사용되는 통일미보다 ‘청정미’를 찾는 경향이 생겨났다. 1978년부터 1980년 사이에 발생한 도열병과 냉해는 통일벼의 한 갈래인 ‘노풍’을 모두 쭉정이로 만들었다. 일반벼와 통일벼 사이에 생산성 차이는 1977년 1헥타아르(㏊)당 1,300킬로그램이었는데, 1978년에는 500킬로그램으로 감소했다. ‘노풍’의 실패는 농민들이 통일벼 생산을 중단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한편 1970년대 중화학공업 육성에 맞춰진 정책자금 방출과 1978년 2차 석유파동으로 인한 중화학공업 채산성 약화는 정부의 농정 기조마저 바꿨다. 정부는 재정적자를 이유로 고미가 정책 폐기, 농산물 수입개방 증대를 예고했고, 신품종 재배에 대한 재정적 지원을 중단했다. 1980년대 등장한 신군부가 통일벼 확대보급을 중단하고, 시장에서까지 외면받자 통일벼는 빠르게 자취를 감췄다. 일부 지역에서 정부 추곡수매용으로만 명맥을 유지하다가 1990년대 초반 추곡수매 중단과 함께 사라졌다.

1970년대 통일벼는 유신체제의 행정력으로 보급되었기 때문에 유신체제와 운명을 같이했다. 농촌 사회에서 강제적인 농정에 반대하는 농업 민주화 요구가 등장했고, 정부는 다시 행정력 강화로 대응했다. 따라서 유신체제의 종언은 곧 통일벼 외면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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