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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상호방위조약[韓美相互防衛條約]

‘자유의 최전선’에서 한미 군사동맹을 맺다

1953년

한미상호방위조약 대표 이미지

1953년 10월 1일 워싱턴에서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식 장면

전자사료관(국사편찬위원회)

1 개요

「한미상호방위조약」은 한미관계를 규정하는 가장 기본적 협정으로, 정식명칭은 「대한민국과 미합중국간의 상호방위조약」이다. 1953년 10월 1일 한·미 간에 조인되고 1954년 11월 18일 발효되었으며, 상호방위를 목적으로 체결되었다. 한국이 외국과 맺은 유일한 동맹조약이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은 전문(前文)과 본문 6개 조로 구성되며, 외부로부터의 무력 공격에 대한 공동방위 결의가 전문에 명시되어 있다. 동 조약에 근거하여 미국은 그들의 육·해·공군을 한국 영토와 그 부근에 배치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한미주둔군지위협정(SOFA)과 정부간 또는 군사 당국자 간의 각종 안보 및 군사 관련 후속협정의 기초를 제공하고 있다.

2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되고 발효되기까지 한미교섭과 쟁점

1953년 4월 포로 문제로 중단되었던 정전회담이 재개되자, 한국정부와 이승만 대통령은 더 강하게 정전을 반대하였다. 국회에서는 이승만 대통령의 북진통일을 지지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고, 이승만 대통령은 아이젠하워(Dwight D. Eisenhower) 미 대통령에게, “중국군이 압록강 남쪽에 그대로 남아있게 된다면 한국군 작전지휘권을 위임한 것을 철회하여 필요하다면 단독으로라도 싸울 것”이라고 통보하였다. 전쟁 초기 유엔군의 이름으로 미군이 참전하자 1950년 7월 14일 대전으로 피난했던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군 작전지휘권(command authority)을 맥아더(Douglas MacArthur) 유엔군 사령관에게 넘겨주었다. ‘전쟁 수행의 효율성’을 내세운 미국의 요구에 따른 것으로, ‘전시 하에서만’이라는 단서를 달았지만, 전쟁 수행과정에서 한국 정부나 한국군의 영향력과 자율성은 극히 제약될 수밖에 없었다. 한국군에 대한 통제는 전쟁 시기는 물론 전후까지 가장 중요한 문제이자 한미 간에 민감한 사안이었다.

미국은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철회하는 돌발사태를 대비하여 만든 상비계획(Everready Plan)을 재검토하였다. 1952년 부산정치파동 이후 유엔군사령부가 마련한 상비계획은 유사시 이승만 대통령을 축출하려는 계획이었다. 이때 미국은 대한정책 전반을 검토하면서 상비계획과 상호방위조약 체결을 동시에 고려했다. 이른바 ‘채찍’과 ‘당근’ 중에 어느 것이 더 유용한 가 저울질 한 결과 최종 선택은 당근이었다. 이승만 축출 계획보다는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는 쪽을 선택했지만, 두 가지 전제 조건을 두었다. 첫째는 한국이 유엔군사령부가 제안한 방향의 정전을 수락하고 그 이행에 협력할 것, 둘째는 한국군을 유엔군사령부 지휘하에 둔다는 것이었다.

미국은 한국을 배제하고 일방적으로 정전회담을 진행시키는 한편, 상호방위조약을 한국과의 협상 수단으로 활용했다. 1953년 6월 2일 이승만 대통령은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에게 공개적으로 서한을 보내, 정전이 체결된 후에 공산군이 또다시 침략할 경우 미국이 즉시 개입한다는 내용이 포함된 상호방위조약 체결을 요구했다. 그러나 미국은 “한국이 먼저 정전을 수락해야 상호방위조약에 대해 협상할 수 있다”는 태도를 보였다.

1953년 6월 8일 판문점에서 포로송환 협상이 타결되고 정전협정 체결이 기정사실로 굳어지자 한국 내 휴전 반대 시위가 급증하였다. 미국은 이승만을 회유하기 위해 더 적극적으로 나섰고, 대통령 특사로 로버트슨(Walter S. Robertson) 국무차관보를 파견하기로 약속했다. 그 상황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6월 18일 유엔군사령부와 협의 없이 일방적으로 ‘반공포로석방’을 단행하였다. 클라크(Mark W. Clark) 유엔군 사령관은 한국군을 유엔군 사령관 지휘 하에 둔다는 공약을 위반하였다고 이승만에게 책임을 물었다.

이 때문에 정전협정 체결이 연기되자 결국 미국은 예정대로 미 대통령 특사를 파견하여 이승만 대통령과 2주간에 걸친 교섭을 벌였다. 쟁점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체결 시점, 한국군 규모, 유엔군이 지닌 한국군에 대한 지휘권의 지속 여부, 정전 이후 정치회담의 기한 등이었다. 회담을 마치고 7월 11일 양측은 “이승만이 정전협정 체결에 협조하면 상호방위조약 체결 교섭에 동의한다”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이 교섭 과정에서 이승만은 ‘유엔군이 한국의 이익에 배치되는 행동을 하지 않는 한 한국군을 그 지휘하에 남겨둘 것’을 약속하였고, 7월 9일 상호방위조약 초안을 교환했다.

정전협정 조인 직후인 1953년 8월 5일, 미 국무장관 일행이 방한하여 한미상호방위조약과 정치회담 문제 등을 논의하였다. 회담에서 덜레스(J. F. Dulles) 미 국무장관은 “상호방위조약은 한국이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줄 것이며, 적들에게 우리는 반드시 말한 대로 행동한다는 점을 깨닫게 해 줄 것이며, 조약의 목적은 우리가 서로 단결하여 협조하는 한, 한국이 아시아에서 자유의 최전선이라는 사실을 전 세계에 알리는 것”이라고 발언하였다. 양측은 회담을 마치고 8월 8일 ‘한미상호방위조약’에 가조인하고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 조약은 미 의회의 동의를 거치지 못하고 있다가 1년이 지난 1954년 11월 18일에야 발효되었다. 그 이유는 한국군에 대한 지휘권 문제가 해결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미국은 한국이 단독으로 북진하는 것을 막고자 했는데, 국제적 관례에 근거할 때 한국군을 통제하는 조항을 상호방위조약에 포함시킬 수 없었기 때문에 한미 간에 또 다른 명확한 협약이 필요했다. 이에 이승만이 1954년 7월 26일부터 8월 13일 미국을 방문한 데 이어, 같은 해 11월 17일 한국군 작전통제권을 주한미군사령관이 겸임하는 유엔군 사령관에게 이관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한미합의의사록을 채택하였다. 그리고 그 다음날 한미상호방위조약이 발효될 수 있었다.

3 한미상호방위조약 주요 내용

한미상호방위조약은 1953년 10월 1일 워싱턴에서 한국문과 영문 두 벌로 작성되었다. 한국 대표로 변영태(卞榮泰), 미국 대표로 덜레스가 서명하였다. 한미상호방위조약 전문(前文)에는 “태평양 지역에 있어서의 평화 기구를 공고히 할 것을 희망하고”, “외부로부터의 무력 공격에 대하여 그들 자신을 방위하고자 하는 공동의 결의를 공공연히 또한 공식으로 선언”하며, “태평양 지역에 있어서 더욱 포괄적이고 효과적인 지역적 안전보장 조직이 발달 될 때까지 평화와 안전을 유지하고자 집단적 방위를 위한 노력을 공고히 할 것”을 희망한다고 명시했다. 그에 따라 양측이 동의한 6개 조항은 다음과 같다.

제1조 평화적 수단에 의한 해결, 무력에 의한 위협이나 무력 행사 삼가
제2조 정치적 독립 또는 안전이 외부로부터의 무력 공격에 의하여 위협을 받고 있다고 인정될 때 서로 협의하며, 적절한 조치와 협의를 합의하에 취할 것
제3조 태평양지역에서 무력 공격의 위험에 대처하기 위해 각자 헌법상의 수속에 따라 행동
제4조 상호 합의에 의하여 미국은 육·해·공군을 대한민국 영토 내와 그 부근에 배치하는 권리를 대한민국이 허여하고 미국이 수락함.
제5조 본 조약은 각자의 헌법상 수속에 따라 비준되어야 하며 그 비준서가 양국에 의하여 워싱턴에서 교환되었을 때 효력을 발생한다.
제6조 본 조약은 무기한으로 유효하다.

이 조약으로 한국에 대한 미국의 안보 공약이 확고해졌지만, 전쟁 발발 시 ‘자동 개입’을 보장한 것은 아니었다. 미국은 미군을 한국에 주둔시킬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지만, 한국군의 단독 북진을 막기 위해 한국군에 대한 지휘권을 통제하는 문제가 남아있었다. 조약의 제5조에 따라 추가 협상이 진행되었고, 1954년 11월 17일 한미합의의사록이 서울에서 변영태 외무장관과 브릭스(Ellis O. Briggs) 주한 미 대사 사이에 작성되었고, 같은 날 워싱턴에서는 한미상호방위조약 비준서 교환이 이루어졌다.

한미합의의사록의 정식 명칭은 「한국에 대한 군사 및 경제원조에 관한 대한민국과 미합중국간의 합의의사록」이다.

한미합의의사록은 한국과 미국이 긴밀히 협조하는 것이 공동이익에 유익하며, 자유세계가 공산침략에 대응하는 결의에 중요하다고 보고, 한국과 미국이 각각 이행해야 할 6개 조항의 협조 사항에 합의한 것이다. 한국 측은 북진통일을 포기하고 유엔을 통한 통일 노력에 미국과 협조하며, “유엔군사령부가 대한민국의 방위를 위한 책임을 부담하는 동안 대한민국 국군을 유엔군사령부의 작전통제권(operational control) 하에 두는 것”에 합의했다. 미국은 한국의 실행 조건을 기초로 경제 및 직접적 군사원조를 제공하기로 합의했다. 기존의 포괄적인 ’지휘권‘이 좀 더 제한된 의미의 ’작전통제권‘으로 바뀌었지만, 군사 및 경제 지원의 대가로 주권의 일부를 침해당하는 대가를 치른 셈이었다.

4 의의와 영향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과 그에 따른 한미 동맹은 북한의 도발을 막는 안보의 핵심 기제이자 주한미군 주둔의 근거가 된다. 정전 직후 국제적으로 제네바회담을 통해 정치적 해결방안을 모색하는 같은 시기에 양 진영의 동맹구조가 형성되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되고 주한미군의 주둔이 결정되는 시기에 중국인민지원군의 북한 내 잔류와 중조동맹조약이 이어졌다. 이러한 동맹 대 동맹의 대립구조는 전후 한반도 분단의 원형으로 자리 잡았다.

현실적으로 한국에 미군이 주둔함으로써 한국 방위의 핵심 전력이 되며, 한반도 및 동북아 전쟁을 억지하여 한반도 안정과 평화 유지에 기여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강대국인 미국이 약소국인 한국에 안보를 제공하고 한국은 미국에 정책적 자율성을 일정부분 양보하는 전형적인 비대칭 동맹의 형태라는 점도 무시할 수 없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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