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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회담 반대운동

군부독재에 반대하는 한국 민주화운동의 출발점

1963년

한일회담 반대운동 대표 이미지

한일회담 중지를 외치는 정치인들

동아일보

1 개요

1964~65년간 거세게 전개되었던 일련의 한일회담 반대투쟁을 가리킨다. 1964년 계엄령을 초래한 이른바 6·3항쟁이 널리 알려져 있지만 큰 틀에서는 한일회담 타결 이후 1965년 조인·비준 반대운동까지 포괄하는 거대한 사건이다. 반대운동은 한일협정 체결을 막지 못했다는 점에서 직접적으로는 실패했다. 그렇지만 한일회담이란 단일 사안을 넘어 5·16 또는 박정희 정권의 정당성을 문제 제기했고, 1970~80년대로 이어지는 민주화운동의 전형을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크다.

2 미국의 동아시아 지역통합전략

1945년 8월 해방으로 분리-단절된 한일 양국관계를 재개하기 위한 한일회담은 1951년 10월 도쿄에서 당시 이승만 정부 및 연합국 점령 하 일본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내각 하에 처음 시작되었다. 미국의 권유와 주선으로 연합군총사령부(GHQ/SCAP)에서 회의가 열린 데서도 알 수 있듯, 한일회담은 처음부터 지역통합전략을 축으로 하는 미국의 동아시아정책과 긴밀히 연결되었다.

즉 제2차 세계대전 전후처리 과정에서 미국의 애초 대일정책 기조는 일본을 해체 및 약화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미소 대결 양상이 뚜렷해지고, 중국 대륙에서 국민당에 대한 공산당의 우위가 선명해지는 등 냉전의 구도가 나타나면서 기존의 대일정책은 수정되었다. 동아시아 반공의 보루이자 자국의 핵심 파트너로서 일본을 동아시아 지역통합의 거점으로 지원하는 이른바 역코스(Reverse Course)가 그것이었다. 이 같은 전략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일본 경제 부흥의 중요한 배후지이자 반공전선의 전초기지로서 한국과 일본의 우호적인 관계 수립이 필요했다.

더욱이 한일 간에는 청구권, 재일동포 법적지위, 문화재 등 식민지와 피식민지 관계에서 비롯한 여러 해결되지 못한 문제가 산적했다. 이는 어떤 식으로든 해결해야 할 양국의 중요한 과제였다. 단 한국은 제2차 세계대전의 연합국 지위를 얻지 못하고 샌프란시스코 대일강화조약에 참여하지 못했기 때문에 양자회담을 통해 이들 현안의 해결과 관계 재개를 모색할 수밖에 없었다.

3 1960년대 한일회담의 진전

1951년부터 한일회담이 시작되었지만 막상 1950년대에는 4차에 걸쳐 대립과 결렬을 반복했을 뿐 별다른 진전은 없었다. 양국은 거의 모든 의제에서 팽팽히 대립했는데 특히 기본조약, 청구권, 평화선(어업)에서 현격한 인식의 차이를 보였다. 기본조약의 경우 식민지 관계를 어떻게 규정하고 청산할 것인지에 관한 것으로 기실 모든 현안을 관통하는 근본적인 대립 지점이었다. 청구권의 경우 식민지 지배에 대한 피해보상을 요구할 수 있는지에 더해 일본이 이른바 대한(對韓) 역(逆)청구권을 제기하며 문제가 더욱 복잡해졌다. 평화선은 1952년 1월 한국정부가 어업규제 및 방위선으로 선포한 것으로 특히 월경하는 일본 어선을 나포해 일본의 강한 반발을 샀다.

그러나 이 같은 대립구도에도 불구하고 1960년대에는 협력’의 논리를 바탕으로 점차 타결의 기운이 커져갔다. 타협을 가능케 한 가장 근저의 동인은 1961년에 집권한 미국 민주당 정부의 달라진 대외정책이었다. 즉 로스토우 등 일군의 근대화론자들의 영향을 받은 케네디(John Fitzgerald Kennedy) 및 다음 존슨(Lyndon Baines Johnson) 정부는 아시아 저개발국의 경제개발을 강조했고 이와 관련해 일본의 적극적인 역할을 주문했다. 마침 소득배증 전략을 내건 일본의 이케다 하야토(池田勇人) 내각과 경제제일주의를 표방한 4월혁명 이후 한국의 신(新) 정부들도 한일회담 타결을 받아들일 이유가 있었다. 1962년 11월 김종필과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가 청구권 문제의 대강에 합의하면서 회담은 타결의 문턱에 한 걸음 더 다가섰다.

4 1964년 6·3항쟁

미국이 1963년 말 이후 베트남전에 본격적으로 발을 들이면서 한일회담 타결은 한층 더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미국은 1964년 1월, 국무부장관 딘 러스크(David Dean Rusk)와 법무부장관 로버트 케네디(Robert Francis Kennedy)가 각각 한일 양국을 방문해 한일회담의 조속한 타결을 종용하는 등 압박수위를 높였다. 이에 양국이 ‘3월 타결, 4월 조인, 5월 비준’을 계획하고 있다는 설이 광범위하게 퍼졌다.

야당과 대학생을 중심으로 한 한국사회는 한일회담에 임하는 박정희 정부의 태도를 ‘굴욕적’이자 ‘저자세’로 간주했다. 청구권의 경우 유·무상 5억 달러라는 금액에 더해 ‘청구권 및 경제협력’이라는 애매한 명목이 문제시되었고, 생명선으로 간주되었던 평화선을 철폐하려는 징후는 국토를 팔아먹는 행위로 여겨졌다. 3월 9일 야당과 재야 세력을 중심으로 ‘대일굴욕외교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이하 범국민투위)가 결성되었고, 3월 24일에는 서울대 문리대·고려대·연세대 학생들이 중심이 된 5·16 후 최초의 대규모 가두시위가 벌어졌다. 학생들은 평화선 흥정 반대, 일본자본 침투 규탄, 일본에 체재 중이던 김종필 소환, 한일회담 중지 등을 요구했다.

김종필이 소환된 후 일단 소강 상태에 접어들었던 학생시위는 사직공원 부근 국유지 부정불하사건과 학원사찰 문제가 불거지며 다시 불붙었다. 4월 19일에는 각 대학에서 4월혁명 4주년 기념식과 시위를 벌였고, 5월 20일에는 서울대 문리대 교정에서 그 유명한 ‘황소식(式)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민족적 민주주의는 1963년 대통령선거에서 정권이 그들 스스로의 정체성으로 내세웠던 것으로, 그것을 비판한 것은 곧 시위의 성격이 한일회담 반대운동을 넘어 정권에 대한 비판 차원으로 확대되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어 일련의 시위와 각종 궐기대회를 거치며 투쟁이 점차 고조되었다. 각 대학 학생회가 결성한 ‘난국타개 학생대책위원회’가 최후통첩 시한으로 통고한 5월 30일 이후 각 대학에서 가두시위가 고조되면서 마침내 6월 3일 학생들은 정권 타도를 목표로 한 전면적인 항쟁에 돌입했다. 수원에 있던 서울대 농대생들의 상경 투쟁으로 시작된 6·3항쟁 당일, 비가 내리는 날씨에도 불구하고 서울에서만 약 12,000~15,000명의 학생들이 거리로 나왔다. 특히 중앙청이 있던 세종로 일대에서는 격렬한 시위가 벌어졌다. 5·16 이후 최대의 저항이었던 6·3항쟁에서 학생들은 ① 박 정권 하야 ② 악덕재벌 처단 ③ 학원사찰 중지 ④ 여야 정객의 반성 촉구 ⑤ 민생고 시급 해결 ⑥ 부정부패 원흉 처단 등을 요구했다. 박정희 정부는 미국과 협의를 거쳐 밤 9시 50분, 8시로 소급해 서울시 일원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이후 학원 및 언론 통제조치가 이어졌다.

5 1965년 한일협정 조인·비준 반대운동

계엄령 선포 후 무기 연기되었던 제7차 한일회담이 1964년 12월 재개되었다. 이번에야말로 회담을 타결시킨다는 의지가 강했던 박정희 정부와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 내각 하에서 양국은 1965년 2월 20일 기본조약을 가조인했고, 4월 3일에는 청구권과 어업, 재일동포 법적지위 등 3개 현안마저 가조인하는 데 성공했다. 14년간 단속적으로 이어졌던 회담이 마침내 사실상 타결된 것이다.

1965년의 반대운동은 일본 시이나 에쓰사부로(椎名悦三郎) 외상이 기본조약 가조인 차 방한한 것을 계기로 재개되었다. 범국민투위는 2월 19일 서울 시청 앞에서 15,0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6·3항쟁 이후 최초의 대규모 성토대회를 열었고, 이후에도 서울은 물론 부산·목포·춘천 등 전국 각지에서 성토대회를 이어갔다. 학생들의 경우 3월 31일 전남대생들이 가두시위를 재개했고, 서울의 경우 4월 10일 서울대 법대생 200여 명이 가두시위를 벌였다. 4월 16일 정부는 각 대학생들의 시위를 막기 위해 4월 말까지 휴교령을 내렸다.

박정희 대통령이 5월 중순 미국을 방문해 미국의 군사·경제 원조를 보장받고, 6월 한일협정 정식 조인이 임박해오면서 협정 체결을 저지하려는 범국민투위와 학생들의 마지막 운동이 전개되었다. 6월 14일부터 서울대 법대생 80여 명이 벌인 단식농성은 각 대학가로 확산되었고, 조인을 하루 앞둔 6월 21일에도 서울시 학생 1만여 명의 가두시위가 있었다. 협정이 조인된 이후 학생들은 ‘한일협정비준반대 각대학연합체’(이하 한비연)를 결성해 반대운동을 이어갔고, 분열 상태에 있던 야당은 윤보선의 민정당과 박순천의 민주당이 합당하여 민중당을 결성해 조인 무효를 주장했다. 그 외에도 사회 각계각층이 광범위한 반대 의사를 밝혔지만 결국 정부와 여당은 8월 11일 임시국회에서 한일협정비준동의안을 날치기로 통과시켰다. 학생들의 시위에는 8월 26일 위수령 선포 와 대대적 검거 등 탄압으로 대응했다. 결국 한일협정은 12월 18일 도쿄에서 양국의 비준서 교환으로 정식 발효되었다.

6 운동의 역사적 성격과 의의

한일회담 반대운동의 역사적 성격은 민족주의의 고양과 민주화운동의 성장, 크게 두 차원에서 조명할 수 있다. 먼저 반대운동의 배경에는 4월혁명 이후 고양된 민족주의가 있었고, 그것은 운동의 진행과정에서 더욱 고조되었다. 반대운동의 중심 이념은 반봉건·반외세·반매판(買辦)의 민족주의 또는 민족혁명이었다.

또한 반대운동은 박정희 정부의 총체적 실정(失政)과 비민주성을 지적하고 이를 바로잡고자 했던 5·16 이후 최초의 대규모 민주화운동이었다. 진행과정에서 일본 정치자금 유입설 및 부정부패 스캔들, 학원사찰 및 침탈, 언론탄압 등 정치적 민주주의 차원의 문제 및 민생고, 부패한 독점자본의 횡포 등 경제적 민주주의 차원의 문제가 제기되었다. 한편 집단 단식농성, 대학 연합시위, 화형식·장례식·마당극 등의 퍼포먼스, 투쟁가 등 대학가의 새로운 운동문화가 만들어진 것도 특기할 점이다. 이는 곧 운동주체의 역량 강화를 의미했고, 민족·민주 이념과 박정희 정부 반대를 공유하는 방향으로 수렴 및 발전했다.

요컨대 한일회담 반대운동은 비록 회담 반대라는 일차적 목표를 달성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민주주의와 민족주의의 결합, 군부독재에 대한 학생들의 저항이라는 한국 민주화운동의 전형(典型)을 만들어냈다는 점에서는 중요한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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