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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로왕[蓋鹵王]

한성의 함락과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지다

미상 ~ 475년(개로왕 21)

개로왕 대표 이미지

풍납토성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개로왕(蓋鹵王)은 백제의 제21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455년~475년이다. 재위 기간 동안 지배체제의 안정과 고구려의 남하정책 저지를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고구려에서 보낸 첩자 도림(道琳)의 꾐에 빠져 실정을 거듭했고, 북위에 대한 외교정책이 실패하면서 이를 틈탄 고구려의 공격을 받았다. 결국 왕도(王都) 한성은 함락되고 개로왕도 목숨을 잃었다. 한성 함락과 함께 백제의 한성시대도 막을 내리게 되었다.

2 개로왕의 즉위와 왕권강화 정책

개로왕은 근개루(近蓋婁) 혹은 근개로왕(近蓋鹵王)이라고도 한다. 이름은 경사(慶司)인데, 『위서(魏書)』와 『송서(宋書)』에는 여경(餘慶)으로 표현되어 있고, 『일본서기』에는 가수리군(加須利君)이라 기록되어 있다. 비유왕(毗有王)의 첫째 아들로, 비유왕이 재위 29년 만에 죽자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개로왕의 즉위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것은 아닌 듯하다. 『삼국사기』에 비유왕 사망기사가 흑룡의 출현과 함께 기록되어 있다는 점, 같은 책에 개로왕 초기 14년간의 기록이 전혀 없다는 점, 그리고 임시로 매장되어 있던 부왕의 뼈를 개로왕 21년에 이르러서야 제대로 장사지냈다는 점 역시 의심스러운 대목이다. 그래서 왕위계승전에서 승리함으로써 개로왕은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었고, 즉위 이후에는 지배체제의 재편을 통한 본격적인 왕권의 강화에 나섰다고 이해할 수 있다.

먼저 개로왕은 지배체제를 왕족 중심으로 재편하고자 했다. 458년(개로왕 4) 개로왕은 송에 표문을 올려 행관군장군(行冠軍將軍) 우현왕(右賢王) 여기(餘紀) 등 11명에게 좌현왕(左賢王), 우현왕, 장군 등의 작위를 내려줄 것을 요청하였다. 11명 중 8명은 여기와 같이 여씨 즉, 부여씨의 성을 가진 왕족이었고, 그 외에 목금(沐衿), 미귀(糜貴), 우서(于西) 등 새로운 귀족들이었다. 개로왕은 왕비를 배출하던 유력 귀족인 해씨와 진씨를 배제함으로써 집권 초부터 새로운 권력 기반을 마련했다. 여기에서 백제 역사상 처음으로 등장하는 좌현왕과 우현왕의 존재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들 관작은 흉노나 돌궐과 같은 북방민족이 왕의 후계자로서 군사권을 장악한 사람에게 부여하던 것이었다. 개로왕은 왕족들을 좌·우현왕에 임명함으로써 귀족들에 대한 군사적 우월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로써 개로왕대의 정치체제는 왕과 왕족들을 중심으로 크게 개편되었는데, 연구자에 따라서는 이것을 강력한 왕권의 행사로 보기도 한다.

중앙정치와 더불어 백성에 대한 통치도 강화하였다. 개로왕은 도림의 말을 듣고 나서야 부왕의 뼈를 장사지낼 정도로 초기에는 대규모 토목공사를 일으키지 않았다. 그리고 국내 정치 문제를 정리하느라 대외 전쟁도 일으키지 않았다. 이러한 조치는 백성들을 역역과 전쟁에 동원하지 않음으로써 민생을 안정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민생의 안정은 도미(都彌) 설화에 등장하는 ‘편호소민(編戶小民)’의 존재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당시 백제의 통치력이 일반 백성을 일일이 호적에 기록하여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강했는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그러나 적어도 ‘편호소민’이라는 표현이 나올 정도로 일반 백성에 대한 통치력이 강화된 것만은 분명하다.

3 개로왕대의 대외 관계

내부적으로 체제의 안정을 도모하는 것과 동시에 개로왕은 밖으로도 눈을 돌려 대외관계의 다변화를 꾀했다. 먼저 신라와의 관계를 살펴보면, 백제와 신라는 433년 나제동맹을 맺은 만큼 고구려의 공격에 공동 대응하는 모습을 보인다. 고구려가 공격해오면 서로 구원군을 보내주거나 고구려를 공격하는 방식이다. 특히 신라는 475년(개로왕 21) 고구려의 대대적인 한성 공격 때 1만의 대규모 구원군을 파견할 정도였다. 이처럼 나제동맹은 개로왕대 내내 군사동맹의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었다.

개로왕은 왜와의 교류도 강화하였다. 461년(개로왕 7)에 동생인 곤지(昆支)를 왜에 보내 양국의 우호를 다졌다. 『일본서기』에는 곤지를 군군(軍君)이라 기록하고 있는데, 당시 좌현왕이었던 곤지가 군사권을 관리하고 있었던 것을 반영하는 표현이다. 개로왕은 백제의 군사권을 쥐고 있던 곤지를 파견함으로써 왜와의 군사적 협력관계를 강화할 수 있었다.

개로왕대의 외교에서 가장 눈에 띄는 점은 북위(北魏)와의 관계이다. 개로왕은 집권 4년 만에 송에 표문을 보내 신하들에 대한 관작의 승인을 요청한 바 있었다. 이때 대고구려 유화정책을 주장하던 해씨세력을 배제시킴으로써 고구려에 대한 강경책으로의 전환을 예고했다. 그리고 20년 이상 중단되었던 북위에 대한 조공을 재개하기에 이른다. 특히 472년(개로왕 18)에는 북위에 표문을 보내 고구려의 잦은 침략을 호소하면서, 국정 혼란과 내분을 틈타 함께 고구려를 공격할 것을 요청하였다. 이 같은 요청은 고구려와 북위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북위와의 군사적 동맹을 통해 고구려를 압박하고자 한 것이었다. 그러나 북위가 이를 거절하고, 백제는 북위에 대한 조공을 중단하기에 이른다.

개로왕이 추진한 대외정책은 고구려를 고립시키기 위한 일종의 연합작전이었다. 신라와 왜, 송과 북위 모두 고구려의 세력 확장을 견제하는 나라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북위에 대한 청병 요구가 실패하고, 송에 이어 북위와의 외교마저 단절함으로써 스스로 고립되는 처지에 이르렀다. 송, 북위와 등거리 외교를 펼치며 대외 안정을 추구하던 고구려는 자신감을 가지고 남진정책을 추진할 수 있게 되었다. 고구려 공격을 주장하던 백제의 외교적 실패가 결과적으로 고구려의 대대적인 공격을 초래한 것이다.

4 한성 함락과 개로왕의 죽음

고구려 공격을 위한 백제의 외교적 노력 속에서 고구려 역시 백제를 의식했지만, 배후에 북위를 두고 남쪽의 백제를 공격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정치적으로 안정을 누리던 백제를 군사력만으로 제압하기도 어려웠다. 이에 고구려는 백제의 내부 분열과 혼란을 도모했는데, 그 방법은 바로 도림(道琳)이라는 첩자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도림은 개로왕이 바둑을 좋아하는 것을 알고 이것을 미끼로 왕에게 접근했다. 그는 개로왕에게 왕의 지위와 위세에 맞도록 성곽과 궁궐을 수리하고, 가매장된 부왕의 무덤을 새로 장사지내며, 백성들의 수해 방지를 위해 한강변에 둑을 쌓을 것을 간언하였다. 이에 개로왕은 대대적인 토목공사를 일으켰고, 이로 말미암아 창고가 텅 비고 백성들의 생활은 더욱 곤궁해져 나라의 위태로움이 가중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개로왕의 대 북위 외교가 실패하자, 고구려는 이러한 국제관계의 틈을 타서 백제를 공격하였다. 장수왕(長壽王)이 직접 3만의 군사를 이끌고 수도인 한성(漢城)까지 공격해 온 것이다. 고구려는 군사를 넷으로 나누어 양쪽에서 백제 왕성을 공격했다. 당시 백제 왕성은 북성인 풍납토성과 남성인 몽촌토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백제군은 7일을 버텼지만 마침내 북성이 함락되고 말았다. 남성에 있던 개로왕은 기병 수십을 거느리고 성문 밖으로 달아났는데, 이를 고구려 장수 재증걸루(再曾桀婁)와 고이만년(古爾萬年) 등이 쫓아가서 사로잡았다. 이 둘은 원래 백제인이었으나 개로왕대의 정치적 개편 과정에서 밀려나 고구려로 망명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개로왕을 아차성 아래로 보내 죽이고, 남녀 8천을 포로로 잡아 돌아갔다. 개로왕의 아들(혹은 동생) 문주가 신라의 구원군과 함께 한성에 도착했으나, 이미 때는 늦은 뒤였다. 백제의 기록을 인용한 『일본서기』에서는 한성 함락의 안타까운 순간을 “마침내 위례(慰禮)를 잃었다.”라고 전하고 있다. 이로써 개로왕은 한성 함락과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백제는 남쪽으로 내려가 웅진(熊津)에서 새로운 시대를 준비해야만 했다.

5 도미 설화와 개로왕대의 백제 사회

『삼국사기』에는 개로왕대의 백제 사회를 보여주는 이야기가 전한다. ‘편호소민’이었던 도미에게는 아름답고 절개 있는 부인이 있었다. 이 소문을 들은 개로왕이 신하를 보내 그 절개를 시험했는데, 도미부인이 여종을 대신 방에 들여보냈다. 개로왕은 왕을 속인 죄를 물어 도미를 처벌하고 부인을 강제로 음행하려 했다. 부인은 겨우 도망가서 남편과 함께 고구려로 넘어가 유리걸식하며 일생을 마쳤다고 한다.

도미설화 속 개로왕의 이야기는 실패한 왕을 폭군으로 상징화한 것이라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즉, 『삼국사기』의 편찬자는 수도를 함락당하고 목숨까지 잃은 개로왕에 대하여 폭군의 대명사로 인식시킴으로써 한성백제 멸망의 필연성과 연결 지으려 한 것이다.

그러나 도미설화는 개로왕 개인의 폭정이 아니라, 5세기 후반 백제 사회의 모습을 보여주는 자료로 읽는 것이 타당하다. 설화 속 ‘편호소민’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개로왕 당시 백제는 백성들을 호적에 등록하여 조세 수취에 활용하고 있었다. 도미의 집에 노비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자영 소농민층의 성장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개로왕 후반기에 대규모 토목공사와 정치적 혼란은 ‘편호소민’인 농민층의 몰락을 촉진시켰다. 도미의 도망과 유리걸식은 이러한 사회상의 반영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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