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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훤[甄萱:李萱]

호랑이 젖을 먹고 자란 후백제의 창업자

867년(건황 10년) ~ 936년(태조 19)

견훤 대표 이미지

전 견훤 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1 요약 정보

견훤(甄萱)은 통일신라 말기의 혼란을 틈타 후백제(後百濟)를 세운 인물이다. 전라도 지역을 장악하여 세력을 키우고, 연이은 군사적 성공으로 후삼국 시대의 주역이 되었으나 아들의 반란으로 왕위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2 출생과 성장

견훤은 867년 상주(尙州) 가은현(加恩縣)(지금의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에서 아자개(阿慈介)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자개는 원래 농사를 짓던 사람이었으나 후에 가문을 일으켜 장군이 된 인물이다. 견훤의 원래 성은 이(李)씨였는데 후에 견(甄)으로 바꾸었다고 전하지만 분명하지 않다.

견훤의 출생과 관련해 광주(光州)(지금의 광주 광역시) 출생설도 전한다. 광주 북촌에 사는 한 부자의 딸에게는 밤마다 찾아와 관계하는 자줏빛 옷을 입은 남자가 있었다. 그 남자의 옷에 실을 꿴 바늘을 몰래 꽂아 두었더니, 다음 날 담장 아래 바늘이 꽂혀 있는 큰 지렁이가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견훤은 지렁이의 자식인 셈이다.

견훤에 대해서는 또 다른 흥미로운 전승이 있다. 그가 아직 포대기에 있을 무렵 아버지가 들에서 밭을 갈고 있었는데,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밥을 가져다주려고 아이를 수풀 아래에 두었는데 호랑이가 나타나 젖을 먹였다는 이야기이다. 물론 이를 사실로 볼 수는 없으나, 견훤이 호랑이를 연상케 하는 강렬한 무인의 풍모를 지닌 인물이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장성한 견훤은 모습이 웅장하고 기이했으며 기개가 범상치 않았다고 한다. 견훤은 군인이 되어 서남쪽 해변을 지키게 되었는데 창을 베개로 삼아 잘 만큼 철저하게 적을 대비하였고 그 공로로 비장(裨將)이 되었다.

3 난세를 만나 몸을 일으키다

892년(진성여왕 6) 신라 중앙의 집권력이 약화되고 전국적으로 민란이 발생한 상황에서 견훤 역시 무리를 모아 왕경 서남쪽의 주현들을 공격하니 순식간에 5,000명에 달하는 병력이 만들어졌다. 이후 무진주(武珍州)를 점령하고 이 지역을 통할하는 관직을 만들어 자칭하였다. 이때 견훤은 북원(北原)(지금의 강원도 원주시) 지역의 양길(良吉)에게 비장(裨將) 직책을 내리기도 하였는데, 견훤과 양길은 엄연히 독립된 세력이었을 것이나 이러한 모습을 보았을 때 견훤의 세력이 당시 전국적으로 산재한 세력들 중에서도 특히 강성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전라도 지역을 장악한 견훤은 순행을 하다가 완산주(完山州)에 이르러 백성들의 환대를 받았다. 이에 삼국 중 마한(馬韓)이 가장 먼저 일어난 곳임을 언급하고, 완산주를 도읍으로 삼아 백제 의자왕(義慈王)의 울분을 씻겠노라 선언하였다. 견훤은 900년 후백제를 건국하면서 관부를 설치하고 관직을 나누어 국가로서의 체제를 갖추었다.

4 대업을 이루기 위해 싸우다

후백제가 건국된 1년 뒤인 901년에는 북쪽에서 궁예(弓裔)가 후고구려를 건국하며 견훤과 맞설 수 있는 세력으로 자리 잡았다. 양자 사이에서는 912년 덕진포(德津浦)에서 충돌이 발생하여 긴장 관계가 형성되었다. 견훤은 918년 왕건(王建)이 궁예를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이 들리자 사신을 보내 축하하고 선물을 하였으나 이후 고려와 수많은 전쟁을 치르게 되었다.

견훤은 920년 1만 명의 군사로 신라의 대야성(大耶城)을 함락시켰으나 신라 왕의 구원 요청을 받은 왕건의 군대가 출동하자 물러났다. 925년에는 조물성(曹物城)에서 견훤과 왕건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와 대결하였으나 승부를 내지 못하였고, 서로 인질을 교환하며 화친하였다. 하지만 다음해인 926년 고려에 인질로 간 견훤의 사위 진호(眞虎)가 갑자기 죽자 견훤은 고려에서 고의로 인질을 죽였다고 의심하였고, 양자의 관계는 다시 험악해졌다.

927년 견훤은 신라의 근품성(近品城)을 공격해 빼앗은 데 이어 신라 왕도까지 난입하였다. 이때 경애왕(景哀王)을 죽이고 경순왕(敬順王)을 새로운 왕으로 세웠다. 또한 왕실의 사람들과 신라 고관들을 포로로 삼고, 창고를 약탈하여 진귀한 보물과 병장기들을 빼앗았다. 신라의 구원 요청을 받은 왕건은 기병 5,000명을 이끌고 급히 내려왔으나 이미 늦은 것을 알고 공산(公山) 아래에서 기다렸다가 돌아가던 후백제군을 맞아 크게 싸움을 벌였다. 후백제군은 공산 전투(公山戰鬪)에서 고려의 상장(上將)인 김락(金樂)과 신숭겸(申崇謙) 등을 죽이는 등 대승을 거두었고, 왕건 또한 간신히 목숨을 건져 도주하였다. 이로 인해 견훤은 경상도 지역의 상당 부분을 자신의 세력권으로 편입할 수 있었고, 자신감을 얻은 견훤은 ‘평양의 누각에 활을 걸어 놓고 대동강 물가에서 말에게 물을 먹이고 싶다’는 내용을 담은 편지를 왕건에게 보내기도 하였다.

견훤은 계속 공세적인 모습을 이어나가 928년에는 강주(康州)(지금의 경상남도 진주시)를 습격하고 부곡성(缶谷城)을 함락하였으며, 929년에는 5,000명의 군사로 의성부(義城府)(지금의 경상북도 의성군)를 공격해 성주인 홍술(洪術)을 죽이는 등 연이어 큰 전과를 올렸다. 하지만 견훤의 기세는 930년 고창전투(古昌戰鬪)에서 8,000명에 달하는 전사자를 내는 대패를 당하면서 크게 꺾였다. 양국 사이에는 이후에도 계속 공방이 이루어졌으나 후백제는 과거처럼 압도적인 모습을 보이지 못하였고, 지방 세력들도 점차 고려로 귀부하는 이들이 늘어났다.

5 견훤의 몰락과 후백제의 멸망

견훤은 자식이 많아 아들이 10여 명에 달하였는데, 그중 넷째 아들인 금강(金剛)이 몸도 크고 지략이 많아 왕위를 물려주고자 했다. 이에 형인 신검(神劒), 양검(良劒), 용검(龍劒)이 몰래 모의하여 935년 난을 일으켰다. 금강은 살해되었고 견훤은 금산사(金山寺)에 유폐되었다. 일세를 풍미했던 영웅이 너무도 어이없게 몰락한 것이다.

견훤은 절에 유폐된 지 3개월 만에 감시의 소홀을 틈타 도주하여 고려의 영역인 금성(錦城)으로 들어갔다. 이에 왕건이 수로(水路)를 이용해 견훤을 맞이하고, 상보(尙父)라 존칭하며 머물 곳을 마련해 주었다.

견훤은 936년 왕건에게 군대를 일으켜 신검 등을 처벌하기를 청하였다. 이에 왕건은 대군을 이끌고 후백제로 쳐들어가 경상북도 구미시 인동면에 위치한 낙동강 지류로 비정되는 일리천(一利川)을 사이에 두고 후백제군과 맞서 진을 쳤다. 이때 견훤은 왕건과 함께 고려 측에서 열병을 하였는데, 이는 후백제군의 사기에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싸움이 채 시작되기도 전에 백제 장군인 효봉(孝奉), 덕술(德述), 명길(明吉) 등이 항복하였고, 본격적인 고려군의 공세가 시작되자 후백제군은 여지없이 궤멸되었다. 신검은 간신히 달아났으나 일리천전투(一利川戰鬪)로 인해 양국 간 싸움의 승패는 사실상 판가름되었다.

더 이상 승산이 없음을 깨달은 신검은 황산(黃山)(지금의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탄현(炭峴)에서 왕건에게 항복을 하였다. 왕건은 신검이 왕위를 차지한 것은 불충한 신하들의 협박에 의한 것이지 본심이 아니었다고 하여 죄를 용서하였는데, 이를 본 견훤은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번민하다가 등창이 나서 수일 만에 황산의 절에서 사망하였다.

견훤은 타고난 용력과 용병으로 나라를 세우고 후삼국 시대의 주역으로 부상하였다. 하지만 신라의 왕을 살해하고 끊임없이 전쟁을 벌이는 등 지나치게 힘에 의존한 정책을 펼쳐 인심을 잃었고, 결국 아들과 신하들에게 배신을 당한 끝에 자신이 만든 나라를 스스로 무너뜨린 후 쓸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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