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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덕왕[景德王]

한화정책(漢化政策)을 통해 왕권 강화를 꾀하다

미상 ~ 765년(경덕왕 24)

경덕왕 대표 이미지

성덕대왕신종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경덕왕(景德王, ?~765)은 신라 제35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742년~765년 이다. 그는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직계가 왕위를 계승하면서 강력한 왕권 중심의 정치 형태를 지향한 통일신라 중대(中代)의 마지막 전성기를 구현한 왕으로, 적극적인 한화정책(漢化政策)을 추진하면서 왕권 강화와 관료제 확충을 꾀하였다.

2 생애와 가계

경덕왕의 본명은 김헌영(金憲英)으로 제33대 성덕왕(聖德王)과 점물왕후(占勿王后)로도 불리는 소덕왕후 김씨(炤德王后 金氏)의 셋째 아들이며, 제34대 효성왕(孝成王)의 친동생이다. 739년(효성왕 3) 2월에 신라 17관등 중 네 번째인 파진찬(波珍湌)이 되었고, 바로 이어 5월에 태자(太子)로 책봉되었다. 742년 5월 친형인 효성왕이 사망하자 왕위를 이었다.

그에게는 원래 삼모부인(三毛夫人)이라는 아내가 있었지만 자식이 없다는 이유로 폐하고, 743년(경덕왕 2) 4월에 서불한(舒弗邯) 김의충(金義忠)의 딸 만월부인(滿月夫人)을 새로운 왕후로 맞이하였다. 그가 왕의 동생으로서 태자에 책봉되고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유력한 진골귀족들의 지지를 얻었기 때문으로 여겨지는데, 그의 첫 왕후 삼모부인의 부친인 이찬 김순정(金順貞)이 그 중심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새로운 왕후를 맞아들인 것은 즉위 초 측근 진골귀족들과 결별하며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의도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만월부인과의 사이에서 후에 혜공왕(惠恭王)으로 즉위하는 태자 김건운(金乾運)을 낳았다.

그는 재위 24년만인 765년 6월 사망하여 모지사(毛祗寺) 서쪽 봉우리에 묻혔다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 「왕력(王曆)」에는 경지사(頃只寺)의 서쪽 봉우리에 장사지내고 돌을 다듬어 능을 만들었으나 나중에 양장곡 안에 옮겨 장사지냈다고 보다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현재 사적 제23호로 지정되어 있는 경주 경덕왕릉(慶州 景德王陵)을 그 무덤으로 보고 있다. 한편 중국의 사서인 『구당서(舊唐書)』, 『자치통감(資治通鑑)』 등에는 경덕왕이 737년 사망했다고 되어 있어 우리 측 기록과 차이가 있다.

3 왕권 강화를 위한 관제 정비 추진

경덕왕은 중대(中代)의 마지막 전성기를 구가한 왕으로 평가된다. 중대란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 신라 역사를 세 시기로 구분한 것 중 하나로, 태종무열왕부터 경덕왕의 아들 혜공왕까지의 시기를 의미한다. 이 시기는 진골(眞骨)로서 처음 왕위에 오른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직계 자손이 대대로 왕위를 계승한 시기로 이전 보다 유교적인 이념이 국가 통치에 많이 활용되던 시기이며, 왕권이 진골귀족 세력을 제어하면서 왕이 임명하는 관료들에 의한 국정 운영을 지향하던 시기로 이해되고 있다.

하지만 골품제(骨品制)라는 혈연을 바탕으로 한 폐쇄적인 신분제가 존재했던 신라에서 진골귀족의 힘을 약화시키고 관료제적 국정 운영을 관철시키는 데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에 어린 왕의 즉위와 같이 강력한 왕권 행사가 여의치 않을 경우 다시 진골귀족 세력이 강화되기도 했다. 경덕왕은 전왕의 동생으로 왕위에 올랐는데, 일반적으로 부자관계의 왕위 계승 원칙과 달랐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진골귀족 세력과의 연계를 통해 왕위에 올랐던 것으로 보인다. 즉 진골귀족 세력이 다시 득세하면서 중대 강력한 왕권이 흔들리던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경덕왕이 이러한 정세를 바꾸어 다시 한 번 왕권 강화를 꾀하고 중대의 왕권 중심 정치 형태를 구현하려 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그는 즉위 직후 자신의 첫 부인과 결별하며 유력 진골귀족 세력을 견제하였다. 그리고 651년(진덕여왕 5)에 처음 설치된 이래 중앙 관부들에서 중추적 역할을 수행한 집사부(執事部)의 장관 중시(中侍)를, 재상직의 명칭인 시중(侍中)으로 바꾸어 권위를 높이는 한편 수시로 교체하면서 주도권을 잡으려 하였다.

그리고 시중을 통해 재위기간 동안 지속적으로 관제를 정비하여, 왕권을 보좌하는 관료제의 확충을 꾀하였다. 747년(경덕왕 6) 국학에 여러 과목의 교수관인 박사(博士)와 조교(助敎)직을 설치하여 교육 기능을 강화하고 관료 양성 기능을 강화하였다. 749년에도 천문(天文, 기상 현상 관측 관련 업무)과 누각(漏刻, 시간 측정 관련 업무) 분야에 대한 교육을 담당하는 박사직을 새로이 두어 관련 업무를 담당한 관리 확충이 되도록 하였다. 아울러 748년에는 백관의 비리를 감찰하는 정찰(貞察) 1인을 두어 관료에 대한 감시 기능을 강화하였다. 758년(경덕왕 17)에는 법제의 연구와 교육을 담당하는 율령박사(律令博士) 2인을 두어 통치 제도의 지속적인 정비를 꾀하였다.

또한 745년(경덕왕 4) 7월 태자의 거처인 동궁(東宮)을 수리하고, 752년(경덕왕 11)에 태자가 보는 업무를 주관하는 동궁아관(東宮衙官)을 설치하였다. 문제는 당시 경덕왕에게는 태자가 없었다는 것이다. 경덕왕의 태자는 758년(경덕왕 17)에야 태어났는데, 태자가 없는 시기에 먼저 태자궁을 수리하고 태자 관부를 정비한 것은, 역시 왕위계승권자인 태자의 지위를 공고히 하고 그 권한을 강화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으며, 왕권 강화 정책의 일환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러한 일련의 관제 정비는 유교 이념에 입각한 통치 제도의 정비라 할 수 있으며, 그 궁극적인 목표는 왕이 임명하는 관료에 의해 국정이 주도되는 정치 형태를 구현하여 강력한 왕권 중심의 중앙집권체제를 완성하려 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4 한화정책(漢化政策)과 녹읍(祿邑)의 부활

경덕왕이 지속적으로 추진한 관제 정비는 사실상 한화정책(漢化政策)으로 귀결된다. 한화정책이란 신라 관부와 관직의 이름 및 지방행정지명을 모두 중국식으로 바꾸는 것을 의미한다. 757년(경덕왕 16) 12월에 먼저 지방행정지명을 일괄 개정했으며, 759년(경덕왕 18) 1, 2월에 관부와 관직의 이름을 다수 고쳤다. 다만 관부와 관직 이름의 수정은 747년(경덕왕 6) 1월 집사부 중시를 시중으로 개칭한 것도 확인할 수 있어서, 759년 이전부터 꾸준히 이루어져왔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한화정책, 즉 중국식 관호 개정은 단순히 이름만을 바꾸는 것이 아니다. 이름을 바꿈으로써 관부와 관직의 성격을 중국식 관료제, 곧 강력한 황제권과 황제가 임명하는 관리에 의해 국정 운영이 이루어지는 통치 제도와 유사하게 만들려고 했던 의도가 함께 있었던 것이다. 결국 이 한화정책은 경덕왕이 추구했던 왕권 강화책의 최종 형태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경덕왕의 왕권 강화책은 당연하게도 유력 진골귀족 세력들의 반발과 결집을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행정지명 개정이 있기 바로 전 해인 756년(경덕왕 15) 2월, 진골귀족의 대표라 할 수 있는 상대등(上大等) 김사인(金思仁)이 당시 왕이 추진한 정치에 대해 통렬히 비판하며 바로 잡을 것을 청하였고 왕은 이를 수용했다고 한다. 김사인이 비판한 것은 바로 왕권 강화책이었고, 왕이 이를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경덕왕은 한화정책의 실현을 코앞에 두고 있었지만 유력 진골귀족들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힌 것이다.

결국 경덕왕은 한화정책의 완성을 위해 진골귀족 세력과 타협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중대 정치를 완성한 신문왕(神文王)이 폐지한 녹읍(祿邑)을 다시 부활시킬 수밖에 없었다. 녹읍은 진골귀족들의 경제력을 뒷받침하고 사적 세력으로 활용할 수 있는 기반이었다. 이 녹읍의 폐지는 진골귀족 세력의 큰 힘을 빼앗는 것이었는데, 경덕왕이 한화정책을 관철하기 위해 진골귀족 세력들과 타협책으로 녹읍을 다시 지급하도록 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녹읍의 부활은 진골귀족 세력이 다시 득세할 수 있는 중요한 바탕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화정책이 비록 관철되었지만, 764년(경덕왕 23) 반왕적인 진골귀족 세력으로 볼 수 있는 만종(萬宗)과 김양상(金良相)이 각각 상대등과 시중에 임명되었던 것이다. 이중 김양상은 나중에 경덕왕의 아들 혜공왕을 시해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라 중대를 끝낸 선덕왕(宣德王)이다. 한화정책의 완성을 위해 진골귀족 세력과 타협한 결과, 다시 진골귀족 세력의 힘이 커지게 되었고, 경덕왕 말년에 이르러 쉽게 제어하기 힘든 상황에 이르게 된 것으로 여겨진다.

경덕왕 생존시에는 그래도 왕권과 귀족 세력이 어느 정도 균형을 이루었지만, 그의 사후 혜공왕이 8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르면서 진골귀족으로 급격히 주도권이 넘어간 것으로 보인다. 경덕왕의 한화정책의 최종 결과물, 곧 지명과 관호 개정이 776년(혜공왕 12) 원상복귀 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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