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사 연대기
  • 고대
  • 경문왕

경문왕[景文王]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의 주인공

미상 ~ 875년(헌강왕 1)

경문왕 대표 이미지

삼국유사 사십팔경문대왕조

한국사데이터베이스(국사편찬위원회)

1 개요

경문왕은 신라의 제48대 왕이다. 왕실의 오랜 내분을 수습하고 이들을 통합하기 위해 노력했다. 동시에 자신의 맏아들로 후계구도를 확립하고 이후 그 자손들이 왕위를 이어감으로써 새롭게 ‘경문왕가(景文王家)’를 형성했다. 재위기간 동안 관제를 개편하고, 불교와 유교를 진흥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해 나갔으나, 계속되는 재해로 백성들은 어려움을 겪었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설화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2 경문왕의 가계와 왕위계승

경문왕의 성은 김(金), 이름은 응렴(膺廉) 또는 의렴(疑廉)이고, 시호는 경문(景文)이다. 아버지는 김계명(金啟明)이고, 어머니는 광화부인(光和夫人) 박씨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광화부인이 신무왕(神武王)의 딸이라고 되어 있으나,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조부는 제43대 희강왕(僖康王)이고, 증조부는 김헌정(金憲貞)이다. 동생으로는 김위홍(金魏弘)이 있다. 부인은 영화부인 김씨(寧花夫人 金氏)로, 제47대 헌안왕(憲安王)의 첫째 딸이다. 즉위 이후에는 둘째딸도 왕비로 맞이했다. 자식으로는 김정(金晸, 제49대 헌강왕憲康王)과 김황(金晸, 제50대 정강왕定康王), 김만(金曼, 제51대 진성여왕眞聖女王) 등이 있는데, 경문왕 사후 차례로 왕위를 이었다. 그리고 헌강왕의 아들이자 경문왕의 손자인 김요(金嶢)는 진성여왕의 뒤를 이어 제52대 효공왕(孝恭王)이 되었다.

김응렴은 화랑의 우두머리인 국선(國仙)이었다. 사방을 두루 돌아다니며 심신을 수련하고, 사회상을 살피기도 했다. 860년(헌안왕 4), 헌안왕이 임해전(臨海殿)에서 신하들에게 잔치를 베풀 때, 당시 15세(혹은 20세)였던 김응렴도 이 자리에 참석했다. 헌안왕은 김응렴의 마음을 알아보고자 착한 사람[善人]에 대해 질문했고, 김응렴은 화랑으로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대답했다. 대답을 매우 흡족히 여긴 헌안왕은 그를 사위로 삼기로 결심하고, 두 딸 중 하나를 고르도록 했다. 이 때 흥륜사(興輪寺)의 승려이자 낭도였던 범교(範敎)가 첫째 딸과 혼인할 것을 권유했고, 이에 따라 헌안왕의 맏사위가 되었다.

3개월 후인 861년(헌안왕 5) 1월, 헌안왕은 큰 병이 들어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 때 좌우 신하들에게 김응렴을 왕으로 세울 것을 유언으로 남기고, 그 달 29일에 세상을 떠났다. 헌안왕에게는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유언에 따라 김응렴이 왕위에 올라 경문왕이 되었다.

신라 하대의 왕위계승은 크게 보면 원성왕(元聖王)의 후손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원성왕의 아들인 김인겸(金仁謙)과 김예영(金禮英)의 자손들이 서로 왕위를 다투면서 인겸계와 예영계라는 두 집단이 생겼다. 그리고 예영의 아들인 김헌정(金憲貞)과 김균정(金均貞)의 자손들이 왕위계승 경쟁을 벌이면서, 헌정계와 균정계로 또 다시 분화되었다. 경문왕 즉위 이전, 제45대 신무왕부터 제47대 헌안왕까지는 모두 균정계가 왕위를 계승하고 있었다. 그런데 김헌정의 증손인 경문왕이 즉위함으로써, 신라의 왕통은 균정계에서 헌정계로 넘어간 셈이 되었다. 하지만 이에 그치지 않고, 헌정계 경문왕이 균정계 왕비를 맞음으로써 두 집단 간의 통합이 이루어진 것이기도 했다. 그 결과 경문왕의 자손들은 신라 말 박씨왕의 등장 이전까지 왕위계승을 이어가면서, 새로이 경문왕계라는 가계집단을 형성하게 되었다.

3 경문왕의 왕권 강화 노력

신라에서는 제42대 흥덕왕(興德王, 826~836) 사망 이후 치열한 왕위계승전이 전개되었다. 경문왕이 즉위하기 전, 김균정의 자손들이 연달아 왕위를 계승하며 안정을 찾아가는 모습이 나타났다. 그러나 이전부터 진행된 왕족의 내분과 이로 인한 정치적 모순들은 여전했다. 이런 상황에서 즉위한 경문왕의 최대 과제는 분열된 왕족들 간 화합을 도모하고, 실추된 왕의 권위를 회복하는 것이었다.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경문왕의 정책은 다방면에서 나타난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특징은 관제개혁을 통한 권력 집중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의 금석문 자료를 보면, 국왕의 근시기구(近侍機構)와 문한기구(文翰機構)가 확장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경문왕은 이 자리에 측근세력을 등용함으로써 자신에게 권력을 집중시키고자 했다. 또한 신라 고유의 관등제 뿐만 아니라 중국식 문산계(文散階, 문신들에게 내리던 관등)도 확인된다. 당의 제도를 모방하여 새롭게 통치기구를 정비했던 것이다. 경문왕의 이러한 정책은 경덕왕(景德王) 한화정책과 마찬가지로 왕권의 강화를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때문에 경문왕대의 통치체제 개편을 일컬어 경덕왕대에 이은 ‘제2차 관제개혁(官制改革)’이라 부르기도 한다.

경문왕의 왕권 강화 정책에는 불교의 진흥도 있었다. 경문왕은 헌안왕의 딸과 혼인할 때부터 흥륜사 승려의 조언을 얻을 정도로 친불교적 성향을 갖고 있었다. 이것은 그의 재위 동안에도 그대로 드러난다. 경문왕은 864년(경문왕 4) 직접 감은사(感恩寺)에 가서 제사를 지냈다. 그리고 866년(경문왕 6)에는 황룡사(皇龍寺) 연등행사에 참석하여 백관을 위한 연회를 열기도 했다. 또한 황룡사탑이 벼락으로 파손되자 2년에 걸쳐 보수작업을 진행했다. 이 작업을 주도한 것은 동생인 김위홍이었다. 황룡사는 신라 중고기 최대의 왕실사찰이자 왕권의 상징이다. 그러므로 경문왕이 황룡사에 직접 행차하고, 탑을 수리한 것은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자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경문왕은 직접 불사(佛事)를 일으키기도 했다. 그는 원성왕을 추복하기 위해 곡사(鵠寺)를 중창했는데, 그 때 꿈에서 원성왕을 만났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원성왕은 신라 하대의 실질적인 개창자이다. 경문왕은 원성왕을 추복함으로써 같은 원성왕의 후손인 균정계와 헌정계를 아우르고, 나아가 원성왕의 아들인 인겸계와 예영계의 화합을 도모한 것이다. 분열된 왕족의 혼란을 수습하고자 한 경문왕의 노력을 엿볼 수 있다. 또한 경문왕은 곡성 태안사(泰安寺)에 혜철선사(惠哲禪師)를 기리는 비를 세우고, 장흥 보림사(寶林寺)에는 석탑을 건립하기도 했다. 이 작업 역시 김위홍이 중심이 되었는데, 당시 서남해안 일대에 세를 떨치고 있던 박씨 세력을 포섭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로써 경문왕은 김위홍을 중심으로 왕족과 지지세력들을 결집하여, 정국 운영의 동력으로 삼았다.

경문왕은 불교 외에 유교에도 관심을 가졌다. 863년(경문왕 3) 직접 국학(國學)에 행차해서 박사 이하에게 경전의 뜻을 강론하도록 하고, 이들에게 차등 있게 물품을 하사한 것이다. 이것은 충효와 같은 유교의 이념을 정치에 반영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준 것으로, 왕권 강화 정책을 사상적으로 정당화한 것이었다. 그 외에 임해전(臨海殿)과 조원전(朝元殿), 월상루(月上樓), 월정당(月正堂) 등 궁궐을 대대적으로 중수함으로써 왕실의 권위를 높였다.

4 경문왕대의 정치 사회적 불안

헌정계 출신의 경문왕은 균정계 왕비를 맞이함으로써 왕족 간 통합을 이루고, 왕권을 확립하고자 했다. 그는 자신의 아들로 후계구도를 확립하고, 근친 왕족들을 중심으로 집권체제를 확립해 나갔다. 그러자 이에 대한 불만이 곳곳에서 폭발했고, 그 결과는 3차례의 반란으로 나타났다.

최초의 반란은 866년(경문왕 6) 10월, 이찬(伊湌) 윤흥(允興)과 그 동생 숙흥(叔興)·계흥(季興)에 의해 일어났다. 윤흥 등은 반역을 모의하던 단계에서 일이 발각되어 대산군(岱山郡)으로 도망갔는데, 이들을 붙잡아 일족과 함께 처형했다. 이 모역사건에 앞서 같은 해 정월, 경문왕이 아들 김정을 왕태자로 삼았는데, 이에 대한 반발로 반역을 도모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2년 뒤인 868년(경문왕 8)에는 이찬 김예(金銳)·김현(金鉉) 등이 반란을 일으켰다. 김예는 문성왕(文聖王)의 사촌동생으로, 경문왕과는 달리 균정계였다. 마지막으로 874년(경문왕 14)에는 근종(近宗)이 반란을 일으켜 궁궐까지 침입했는데, 경문왕이 금군(禁軍)을 동원해 진압했다. 그리고 그 무리들을 수레에 묶어 찢어 죽이는 거열형(車裂刑)에 처했다. 근종 역시 근친 왕족으로 추정되는 인물이다. 이처럼 경문왕의 통합 노력에도 불구하고 왕족간의 경쟁이나 갈등은 여전히 존재했다. 그러나 이러한 반발과 갈등을 진압함으로써, 경문왕의 왕권강화 정책은 어느 정도 효과를 거두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경문왕대의 사회는 불안이 계속되고 있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사를 분석해보면, 재이기사는 8~9세기에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9세기 중후반에 걸쳐 있는 경문왕대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경문왕대에는 총 17차례의 재이가 기록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 다수를 차지하는 것은 역시 자연재해이다. 863년(경문왕 3) 이상고온 현상으로 겨울에도 날씨가 포근해 음력 10월에 복숭아꽃과 오얏꽃이 피고, 11월에도 눈이 내리지 않았다. 이후에도 이상기온 현상이 나타났고, 수차례 지진이 발생했다. 또한 홍수와 메뚜기떼 때문에 농작물이 제대로 익지 않았고, 여러 차례 전염병이 창궐하기도 했다. 백성들의 생활은 피폐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에 대한 왕실의 대처는 매우 미흡했다. 기록상으로는 867년(경문왕 7)과 873년(경문왕 13)에 사자를 보내 백성들을 위문하거나 진휼한 것이 전부이다. 이 조치가 얼마나 효과를 거두었는지는 미지수이다. 그러나 874년에 반란을 일으킨 근종이 궁궐까지 침입한 것을 보면, 자연재해로 인한 민심의 이반이 반란의 분위기를 뒷받침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왕실의 진휼은 별 효과가 없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왕실의 소극적인 진휼정책으로, 경문왕대 백성들은 더 큰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5 경문왕의 죽음과 평가

경문왕은 왕실의 혼란을 수습하고, 차기 왕위계승자를 확립하는 등 어느 정도 정국의 안정을 이룩했다. 그러나 민생 문제를 적극 해결하려는 의지는 부족해서 사회적으로는 민심의 불안이 계속되었다. 이런 가운데 경문왕이 세상을 떠났다. 875년(경문왕 15) 7월 8일이었다. 『삼국사기』에는 다른 왕과는 달리, 경문왕의 능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때문에 현재로서는 경문왕릉의 위치를 추정하기 어렵다. 이후 태자였던 김정이 왕위에 올라 제49대 헌강왕이 되었다.

한편 『삼국유사』에는 경문왕과 관련된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경문왕은 생전에 잠을 잘 때마다 뱀들이 혀를 내밀고 온 가슴을 덮어주어야 편안히 잠을 잘 수 있었다고 한다. 또 다른 이야기도 있다. 경문왕은 즉위 후에 갑자기 귀가 길어져 당나귀 귀가 되었는데, 오직 복두장이만이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평생 비밀로 하다가 죽기 직전 도림(道林寺) 대나무숲에 들어가 “우리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다!” 하고 외쳤는데, 그 후 바람이 불면 대숲에서 같은 소리가 났다고 한다. 경문왕이 대나무를 베고 산수유를 심었더니, 그 후에는 “우리 임금님 귀는 길다”라는 소리만 났다고 한다. 이 두 설화는 귀족들의 반발을 무마해가면서 왕권 강화를 추진하던 경문왕의 정치적 부담과, 불안한 민심이라는 혼란한 사회상을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경문왕은 헌안왕의 사위로서 왕위에 올랐다. 헌정계인 그가 균정계의 왕비를 맞음으로써 왕족 간 통합의 상징적인 인물이 되었다. 이후 경문왕의 자손들이 헌강왕-정강왕-진성여왕-효공왕 4대에 걸쳐 왕위에 오름으로써 새로이 ‘경문왕가’를 형성하기도 했다. 그러나 경문왕의 왕위계승은 후에 예기치 못하게 왕위계승의 전례가 되기도 했다. 효공왕이 자식이 없이 사망한 상황에서, 아버지 헌강왕의 사위였던 박경휘(朴景暉)가 왕위를 계승해 신덕왕(神德王)이 된 것이다. 이처럼 경문왕의 즉위는 신라 하대의 이른바 ‘박씨왕 시대’를 여는 단초가 되기도 했다.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