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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순왕[敬順王]

신라 천년 역사의 막이 내리다

미상 ~ 979년(경종 3)

경순왕 대표 이미지

경순왕 영정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경순왕은 신라의 제56대이자 마지막 왕이다. 견훤(甄萱)에 의해 왕위에 올랐지만, 시종일관 반백제 친고려 입장을 취했다. 후삼국의 쟁탈전이 고려 쪽으로 기울자, 나라를 들어 왕건(王建)에게 바쳤다. 이로써 천년 신라의 역사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2 경순왕의 가계

경순왕의 성은 김(金), 이름은 부(傅)이다. 시호는 경순(敬順)인데,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이름을 따서 김부대왕(金傅大王)이라 되어 있다. 제46대 문성왕(文聖王)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후에 신흥대왕(神興大王)으로 추봉된 김효종(金孝宗)이다. 어머니는 계아태후(桂娥太后)로, 제49대 헌강왕(憲康王)의 딸이다. 김효종과 계아태후의 혼인에 관해서는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이야기가 전한다. 효종은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부잣집의 종이 된 효녀 지은(知恩)을 보고 감동을 받았다. 그리하여 집안의 곡식으로 주인에게 보상을 해주고, 지은을 양인으로 만들어주었다. 효종의 낭도(郎徒)들도 곡식 한 섬씩을 내어 다 같이 지은을 도와주었다. 이 소식을 들은 정강왕(定康王)은 효종을 대견하게 여겨 형인 헌강왕의 딸을 아내로 삼게 했다고 한다.

왕비에 대해서 『삼국사기』에는 기록이 없으나, 『고려사(高麗史)』에는 죽방부인(竹房夫人)이라고 되어 있다. 경순왕은 고려에 항복한 후, 왕건의 장녀 낙랑공주(樂浪公主)와 혼인했고, 이어 아홉 번째 딸인 왕씨도 아내로 맞았다. 자식으로는 마의태자(麻衣太子)와 범공(梵空) 등이 있었다. 마의태자는 경순왕의 고려 귀부를 반대하다가, 금강산으로 들어가 삼베옷을 입고 풀을 먹다가 생애를 마쳤다. 막내아들은 화엄종 승려가 되어 법명을 범공이라 하였다. 후에 법수사(法水寺)와 해인사(海印寺)에 있었다고 한다. 또한 고려의 제5대 경종(景宗)의 왕비인 헌숙왕후(獻肅王后) 김씨도 경순왕과 낙랑공주의 소생일 가능성이 높다.

3 경순왕의 왕위계승

신라 사회의 분열과 혼란은 제51대 진성여왕(眞聖女王) 때부터 돌이킬 수 없는 지경이 되고 말았다. 889년(진성여왕 3) 상주에서 일어난 원종(元宗)과 애노(哀奴)의 난을 시작으로, 각지에서 지방 세력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궁예(弓裔)와 견훤(甄萱)도 이 시기에는 여러 반란세력 중의 하나였으나, 900년(효공왕 4)과 901년에 각각 후백제(900)와 후고구려(901)를 건국하며 후삼국시대를 열기에 이르렀다. 이후 후백제와 후고구려는 관제를 정비하는 등 국가 체제를 갖추었고, 서서히 영역을 확장해 나갔다.

이 시기 신라는 제52대 효공왕(孝恭王)부터 제54대 경명왕(景明王)이 통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왕들은 견훤과 궁예의 침입에 대처하지 못했고, 후백제와 마진(摩震, 후고구려)이 나주 지역을 놓고 쟁탈전을 벌일 때에도 강 건너 불구경 하듯 바라만 보고 있었다. 신라의 영향력이 미칠 수 없었던 것이다. 신라의 태도는 918년(경명왕 2), 궁예가 쫓겨나고 왕건이 왕으로 추대되면서 변화하였다. 920년(경명왕 4) 정월, 경명왕과 왕건이 서로 사람을 보내 우호를 맺음으로서, 일종의 동맹관계가 형성된 것이다. 신라와 고려의 연결은 견훤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같은 해 10월, 견훤은 대야성(大耶城)을 공격해 함락시켰다. 그러자 경명왕은 왕건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고려가 구원군을 보내자 견훤은 이를 듣고 돌아갔다.

경명왕에 이어 즉위한 경애왕(景哀王)은 친고려 정책을 더욱 강화했다. 924년(경애왕 1) 9월, 그는 즉위하자마자 가장 먼저 고려에 사신을 보내 예방했다. 그리고 고려에게 후백제 정벌을 권하고, 실제로 지원군을 보내기도 했다. 고려가 신라와 함께 후백제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자, 견훤은 오히려 신라를 공격했다. 927년(경애왕 4) 9월, 견훤이 고울부(高鬱府, 영천)를 공격한 것이다. 경명왕은 즉시 고려에 구원을 요청했고, 왕건이 군사를 이끌고 출정했다. 그러나 구원병이 이르기 전인 11월, 견훤은 갑작스럽게 신라의 수도인 금성(金城)을 공격했다. 이 때 경애왕은 포석정(鮑石亭)에서 연회를 베풀며 놀고 있다가, 적들이 닥쳐오자 비빈들과 함께 후궁으로 달아났다. 이후 경애왕은 견훤에게 사로잡혔고, 견훤의 강요로 자결을 하고 말았다. 견훤은 경애왕의 이종사촌인 김부를 왕으로 세워 임시로 나라의 일을 맡아 다스리도록 했으니, 그가 바로 경순왕이다.

신라 하대의 왕위는 크게 보면 원성왕(元聖王)의 후손 집단에서 계승되었다. 그러다가 52대 신덕왕(神德王)이 박씨로서 왕위에 오른 이후, 경명왕과 경애왕까지 3대에 걸쳐 박씨왕이 즉위하였다. 그런데 견훤이 경애왕을 죽이고 경순왕을 옹립한 것이다. 이로써 3대 15년에 걸친 박씨 왕실은 단절되고, 신라의 왕계는 다시 김씨로 복귀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견훤이 경순왕을 왕으로 세운 이유는 무엇일까? 박씨왕 재위시기에 경순왕은 분명 왕위계승권의 밖에 있었다. 그러나 경애왕을 제거한 후, 박씨 왕실 밖에서 왕위계승권자를 찾자면, 가장 유력한 인물이 바로 경순왕이었다. 그는 문성왕의 후손인 김씨 왕족이었고, 동시에 경문왕가인 헌강왕의 외손자이기도 했다. 그리고 아버지 김효종은 신덕왕과 왕위계승을 겨룰 수 있을 정도로 유력한 인물이었으며, 자결한 경애왕과 경순왕은 이종사촌지간이었다. 이처럼 경순왕은 왕실로서의 자격과 정통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견훤은 김씨 왕실의 회복을 명분으로 경순왕을 옹립했고, 신라 내부에서도 이에 대한 반발이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즉위한 경순왕은 927년부터 935년까지 9년간 신라를 다스렸다.

4 경순왕, 그리고 저물어가는 신라

경순왕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경애왕의 시신을 거두어 신하들과 통곡하면서 장사를 지냈다. 이로써 경순왕의 반견훤 입장이 분명해졌고, 반대로 고려와의 관계는 더욱 우호적일 수밖에 없었다.

한편, 경애왕의 구원 요청을 받은 왕건은 군사를 이끌고 왔지만 왕은 이미 죽은 뒤였다. 927년(경순왕 1) 11월, 왕건은 금성 공격 후 돌아가는 후백제군을 공격하기 위해 공산(公山) 동수(桐藪)에서 기다렸다. 이곳에서 후백제군을 공격했지만, 오히려 고려가 대패해 장군 신숭겸(申崇謙)과 김락(金樂) 등이 전사했다. 왕건도 겨우 목숨만 건져 달아났다. 이 공산전투는 표면상 이루어지던 양국 간의 평화가 깨지고, 본격적인 대치상태로 들어가는 계기가 되었다. 공산전투 승리 이후 후백제는 더욱 거세게 신라를 공격했다. 같은 해 12월 대목군(大木郡, 칠곡)을 공격한데 이어, 이듬해에는 대야성 아래 군사를 주둔시켰고, 무곡성(武谷城)을 공격해 함락시켰다. 다음해에는 가은현(加恩縣, 문경)을 공격했다. 그러자 백제의 공격에 위기의식을 느낀 신라의 장군들이 고려에 투항하기도 했다. 이처럼 당시의 전황은 후백제가 우세한 상황이었다.

930년(경순왕 4), 고려와 후백제는 고창군(古昌郡, 안동) 병산(甁山) 아래에서 맞붙었다. 고려는 후백제군 8천 명을 죽이며 대승을 거두었다. 왕건이 고창전투의 승리 소식을 경순왕에게 전하자, 경순왕은 사신을 보내 왕건과 서로 만날 것을 요청했다. 이에 왕건은 이듬해인 931년(경순왕 5) 2월 23일, 50여 명의 기병만을 이끌고 신라를 방문했다. 경순왕은 교외로 나가 왕건을 맞이하고, 큰 잔치를 베풀었다. 왕건이 고려로 돌아갈 때까지 경순왕은 왕건을 극진히 대접했다. 이 일을 계기로 신라의 고려에 대한 의존은 더욱 심해졌다.

고창전투의 승리는 고려가 불리한 전세를 뒤집고 후백제보다 우위에 서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승리 직후 안동 일대 30여 군현이 차례로 고려에 항복했고, 이어서 명주(溟州, 강릉)부터 흥례부(興禮府, 울산)에 이르는 동해안 일대 110여 성도 고려에 귀부했다. 그 후에도 고려의 세력 확장은 계속되어, 934년(경순왕 8)에는 후백제의 영향 하에 있던 운주(運州, 홍성)의 30개 군현이 고려로 투항하기도 했다. 반면 후백제는 큰 타격을 입고 서서히 붕괴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935년(경순왕 9) 3월, 견훤이 장남인 신검(神劒)에 의해 금산사(金山寺)에 유폐되었다. 같은 해 6월, 견훤이 금산사를 탈출해 고려로 망명하자, 왕건은 그를 상보(尙父)라 높여 부르고, 양주(楊州)를 식읍으로 주었다.

935년(경순왕 9) 10월, 경순왕은 ‘사방의 토지가 모두 다른 사람의 차지가 되었고, 나라는 약하고 형세가 외로워 더 이상 스스로 나라를 지키기가 어렵다’고 판단했다. 견훤이 적국이었던 고려로 망명하여 존대를 받고 있는 상황도 경순왕의 결정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경순왕은 고려에 항복하기 위해 신하들과 의논하였다. 찬반이 분분한 가운데 가장 반대가 심한 사람은 태자였다. 그러나 경순왕은 나라의 위태로움이 심하여, 더 이상 죄 없는 백성들을 고생시킬 수 없다며 항복을 결정했다. 경순왕은 시랑(侍郞) 김봉휴(金封休)에게 국서를 가지고 가서 왕건에게 항복을 청하도록 했다. 그러자 태자는 울면서 금강산으로 들어갔고, 막내아들은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5 고려 귀부와 그 이후의 삶

935년 11월, 왕건은 항복을 청하는 경순왕의 국서를 받고, 왕철(王鐵) 등을 신라로 보내 경순왕을 맞이하도록 하였다. 11월 3일, 경순왕은 백관을 이끌고 금성을 출발했다. 이때 아름다운 수레와 보배로 장식한 말들이 30여 리에 이어졌고, 구경하는 사람들도 담을 두른 것처럼 많았다고 한다. 12일, 경순왕이 개경에 도착하니 왕건이 직접 교외로 나가 맞이하고, 궁궐 동쪽의 가장 좋은 집을 내려주었다. 그리고 맏딸인 낙랑공주를 아내로 삼게 했다. 또한 12월, 왕건은 경순왕을 정승공(正丞公)에 봉하고 지위를 태자보다 위에 있게 하였으며, 봉록 1천 섬을 주는 등 경순왕을 크게 우대했다.

『고려사』에 의하면 11월 28일, 경순왕은 왕건에게 신하가 되겠다는 글을 보냈으나, 왕건이 거부했다. 그러자 신하들이 경순왕의 요청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간언했고, 왕건이 마지못해 이 의견을 따랐다. 결국 12월 12일에 공식적으로 경순왕의 항복을 받아들임으로 신라의 역사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왕건은 이때 경순왕을 경주의 사심관(事審官)으로 임명해 부호장(副戶長) 이하를 관리하도록 했다. 이후 경순왕은 왕건의 아홉째 딸도 부인으로 맞이했다.

경순왕과 낙랑공주 사이에서 태어난 딸은 제5대 경종과 혼인하여 헌숙왕후가 되었다. 975년에 즉위한 경종은 장인인 경순왕에게 상보(尙父)·도성령(都省令)의 직위와 추충순의숭덕수절공신(推忠順義崇德守節功臣)이라는 칭호를 주었다. 그리고 도합 1만호의 식읍을 주었다.

한편, 경순왕은 937년(태조 20) 5월, 왕건에게 진평왕(眞平王)이 차던 옥대를 바쳤다고 한다. 이 옥대는 하늘이 내린 것[天賜玉帶]으로, 황룡사 9층탑, 장육존상과 함께 신라의 3보(寶) 중 하나였다. 이로써 고려는 신라의 정통성을 이어받았다는 상징성을 확보하게 되었다.

고려에 귀부한 후 경순왕은 집과 봉록을 받고, 왕건의 딸과 혼인을 했으며 태자보다 높은 지위를 인정받는 등 많은 우대를 받았다. 그러나 경순왕의 우대는 상징적이고 형식적인 것에 불과했다. 경순왕이 정치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은 경주의 사심관으로서 부호장 이하의 향직을 관리하는 정도였다. 978년(경종 3) 4월에 세상을 떠났지만, 고향인 경주에 묻히지도 못했다. 이것은 어쩌면 망국의 군주로서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경순왕릉은 현재 경기도 연천군에 위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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