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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국천왕[故國川王]

명재상 을파소를 등용하고 진대법(賑貸法)으로 백성을 구제하다

미상 ~ 197년(고국천왕 19)

고국천왕 대표 이미지

삼국사기 고국천왕 기사

한국사데이터베이스(국사편찬위원회)

1 개요

고국천왕(故國川王, ?~197)은 179년~197년까지 재위한 고구려 제9대 왕이다. 독자적이고 자치적인 다섯 부(部)가 연합하여 성립한 고구려에서 왕권 강화를 추구한 왕으로 평가된다. 그는 상대적으로 낮은 신분 출신의 을파소(乙巴素)를 능력만 보고 중용하여 나라를 잘 이끈 현명한 왕이자, 어려운 백성들을 구제하는 진대법(賑貸法)을 시행한 인자한 왕이기도 하다.

2 가계와 생애

고국천왕은 179년~197년 동안 재위한 고구려 제9대 왕으로, 국천왕이나 국양왕(國壤王)이라 불린다. (고)국천이나 국양 등은 왕릉이 위치한 곳으로 고구려 전기 수도인 국내성 지역의 특정 지명을 의미한다. 고구려에서는 이처럼 왕릉의 위치를 왕의 시호로 삼는 경우가 많았다. 왕실 계보상으로는 시조 주몽의 5세손이며 본명은 남무(男武)이다. 혹은 이이모(伊夷謨), 이모(夷謨)라는 기록이 있고,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전왕인 신대왕(新大王)의 둘째 아들로 되어 있으며, 그가 즉위할 때 형인 발기(拔奇)와 분쟁을 벌였다고 기술되어 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고국천왕의 사후 그의 두 동생인 발기와 연우(延優, 이이모라고도 한다) 사이의 왕위계승분쟁이 고국천왕의 일로 잘못 알려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그의 이름이 이이모라거나 즉위 시 형과 분쟁이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그는 176년(신대왕 12) 태자로 책봉되었고, 부왕이 179년 12월 사망하자 왕위를 계승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고국천왕은 키가 9척(약 210cm 정도)이고 외모가 늠름하고 훌륭했으며 힘이 매우 세고, 남의 말을 잘 듣고 판단하여 일을 처리하며, 관대함과 용맹함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었다고 한다. 곧 문무를 겸비한 인재라 할 수 있다.

왕비는 우씨(于氏)로 연나부(椽那部) 출신으로, 고구려 왕비들은 연나부 출신이 많았다. 보통 계루부(桂婁部)가 연나부와 손잡고 5부 연합체인 고구려의 주도권을 장악했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동생으로 발기(發歧)와 산상왕(山上王)이 되는 연우(延優), 그리고 계수(罽須)가 있었다. 왕비와의 사이에서 자식이 없어, 그의 사후 둘째 동생 연우는 왕위에 오른 뒤 왕비 우씨와 결혼하였다.

3 왕권 강화와 명재상 을파소(乙巴素)

고국천왕이 즉위한 시기는 고구려가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하던 때라 할 수 있다. 고구려는 압록강 중류 지역의 다섯 지역 집단, 곧 부(部)가 연합하여 성립하였다. 그리고 점차 주변 보다 발전하여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다. 하지만 고구려의 이러한 성장은 곧 중국 군현의 견제를 받는 등 외부의 군사적 압박을 받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184년(고국천왕 6) 후한(後漢)의 요동태수(遼東太守)가 군사를 보내 고구려를 공격해 온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이러한 외부의 압박을 막아내고, 주변으로 확장하여 강대국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국력을 증진시킬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고구려를 구성하는 다섯 부는 독자적인 지역 집단의 성격이 강하여 하나의 국가로 통합해 힘을 결집시키는데 일정한 한계가 있었다. 결국 고국천왕은 즉위한 이후 고구려의 발전을 방해하는 외부 세력의 군사적 압박을 이겨내야 했는데, 그러기 위해서 내부적으로 독자적 지역 집단의 연합체라는 한계를 벗어나야 하는 과제를 가지고 있었다고 하겠다. 즉 왕권 강화를 바탕으로 통합된 정치체로서의 고구려를 지향해야 했던 것이다.

즉위한 초에는 연나부 수장 우소(于素)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여 연나부 세력과의 연대를 통해 집권력을 확보하고자 하였는데, 점차 시간이 지나며 연나부마저도 왕권하에 예속시키고자 하면서, 왕이 5부 전체를 장악하려는 의도를 보인다. 이러한 왕권 강화 시도는 반대로 다른 4부의 독자적 세력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고, 이는 다시 다른 부들의 반발로 이어지게 되었다.

190년(고국천왕 12) 9월에 자신들이 지배하고 있는 연나부에서 폭정을 하던 중외대부(中畏大夫) 패자(沛者) 어비류(於卑留)와 평자(評者) 좌가려(左可慮)를 왕이 처벌하려고 하였다. 고구려 5부는 원래 독자적이고 자치적인 지역 집단으로서 각 부의 수장들은 자신의 부에서 독자적 지배권을 가지고 있었는데, 고국천왕이 이에 대해 적극적으로 개입한 것이다. 왕이 백성을 위한다는 명분을 활용하여 부 세력들을 통제하려 한 것이다. 그러자 좌가려 등의 연나부가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은 다음 해 4월까지 이어졌고 연나부 세력은 왕도를 공격하기에 이른다. 왕은 직속의 병력을 동원하여 이 반란을 진압하는데 성공하였지만, 언제든지 왕권에 도전할 수 있는 4부 세력을 제어할 방법을 마련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4부에 명하여 그들의 대표이면서 왕을 도와 정치를 이끌 인재를 추천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는 4부의 독자적 성격을 타파하고, 왕 아래 하나의 국가 구성원으로서 고구려를 위해 일할 것을 요구한 것이고, 고국천왕은 이들이 천거한 인재를 각 부의 대표가 아니라 왕의 신하로서 국정 운영을 담당하게 하려 하였다. 이에 4부는 동부(東部, 順奴部)의 안류(晏留)를 천거하였다.

그러나 안류는 자신의 능력이 부족하다면서, 서압록곡(西鴨淥谷) 좌물촌(左勿村)에서 세상에 쓰이지 못하고 농사에 전력하고 있던 을파소(乙巴素)을 대신 추천한다. 고국천왕은 을파소를 불러 중외대부로 삼고 일을 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을파소는 관직이 낮아 자신이 원하는 바대로 국정을 이끌 수 없다고 판단하여 거절한다. 왕은 을파소의 뜻을 알아차리고 다시 국상(國相)이라는 국정 운영을 총괄하는 직위에 그를 임명하고 전권을 위임하였다. 을파소가 안류와 같은 5부의 수장 출신이 아니었음에도 최고 직위를 맡은 것은, 고구려가 초기의 국정 운영 방식이라 할 수 있는 5부 수장들의 합의제적 국정 운영에서 벗어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제는 정치권력을 장악한 왕이 임명한 국상이 다른 4부를 통제하고 관리하면서 국정 운영을 주도할 단초를 마련한 것이다. 을파소는 4부의 대표가 아니라 왕을 보좌하는 국상으로서 국정을 총괄하였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을파소의 기용은 다른 4부 세력들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하지만 고국천왕은 을파소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은 왕의 말을 듣지 않는 것과 같다고 하면서, 을파소의 명을 어기는 자는 그 일족까지 모두 처단할 것이라는 강력한 경고를 한다. 이는 4부 세력에게 왕권에 도전하지 말라는 엄포였다. 이로써 고구려는 독자적이고 자치적인 5부의 연합체에서 왕 아래 하나의 정치체로 통합되어가기 시작했다.

을파소 역시 뛰어난 능력을 십분 발휘하여 고국천왕의 뜻대로 국정을 잘 이끌어 고구려를 부강하게 만들었고, 명재상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된다. 고국천왕의 을파소 등용은 인재를 알아보는 훌륭한 군주가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뛰어난 인재를 요직에 등용하여 나라가 잘 된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지만, 고구려의 발전이라는 측면에서는 왕권 강화와 함께 정치 형태의 변화를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4 백성을 구제하는 진대법(賑貸法)을 시행하다

고국천왕은 을파소를 등용하여 국정 운영의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동시에 백성들의 안정적인 삶을 보장해주기 위해 노력하였다. 194년(고국천왕 16) 이른 가을에 서리가 내려 농사에 많은 피해를 주어, 백성들이 어려움에 처했다. 그러자 왕은 국가의 창고를 개방해 백성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 주었다. 이러한 백성 구제 정책에 국상 을파소의 역할이 컸음을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같은 해 10월 왕이 질양(質陽)으로 사냥을 나갔는데 길에서 앉아 우는 백성을 보고 그 연유를 물었다. 그 백성은 남의 집에서 일하여 늙은 어머니를 봉양하였는데, 이해 서리의 여파로 농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고구려의 경제 상황이 어려워졌고, 그 결과 이 백성은 어머니를 봉양할 일자리를 찾을 수 없어 울고 있었다고 하였다. 이에 왕은 백성들의 어려운 사정을 깨닫고 다시 관리들에게 명하여 어려운 백성을 도와줄 것을 명하였다. 그러나 고국천왕과 을파소의 백성을 위한 노력은 단순히 먹을 것을 일시적으로 나누어주는데 그치지 않았다.

어려운 백성들을 구제하는 제도를 만들어 시행하도록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진대법이다. 진대법은 봄 3월에서 가을 7월까지, 즉 춘궁기에 국가가 곡식을 어려운 백성에게 빌려주고, 백성은 겨울 10월 곧 추수한 후 여유가 있을 때 다시 국가에 갚도록 하는 제도를 의미한다. 이는 어려운 백성을 도와주는 방식이 상황에 따른 임시적인 방편에 머무르지 않고, 상시적으로 시행되는 제도를 만들어 지속적으로 백성들의 안정적인 삶을 뒷받침하도록 한 것이다.

그런데 이 진대법은 순수하게 어려운 백성들을 도와줄 목적만 있었다고 볼 수는 없고, 이 역시 고국천왕과 을파소가 추진한 왕권 강화 정책의 일환이었다고 할 수 있다. 고구려 초 5부 연합체제 하에서 고구려 백성들은 자신이 소속된 부에서 보살폈다. 따라서 각 부의 백성들은 고구려왕의 백성이면서도 자신이 소속된 부 수장에게 예속된 존재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각 부가 반란을 일으킬 때 동원되기도 했던 것이다. 진대법의 시행은 고구려 백성들이 모두 왕이 다스리고 보살피는 존재임을 확인시켜 줌으로써 왕에 예속된 존재로 만드는 목적도 일부 있었다. 물론 각 부에 각각 소속되었던 백성들이 이제는 하나의 고구려 백성으로 통합되는 효과도 있었다.

5 고국천왕 부재론과 고국천왕릉

고국천왕은 『삼국사기』에 분명히 기재된 고구려 제9대 왕이지만, 중국 측 문헌에는 아예 존재하지 않거나, 『삼국사기』의 기록과 다른 부분이 있어 그 실체에 대해 논란이 있었다. 먼저 『삼국지(三國志)』 고구려전과 같은 중국 측 문헌에 의하면 신대왕(新大王)이 사망한 이후 발기와 왕위 계승 분쟁을 벌여 즉위한 것이 이이모, 곧 산상왕이어서 고국천왕은 실재하지 않았던 왕이라는 주장이 있다. 또 고국천왕의 무덤이 고국천원(故國川原)에 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근거로 고국천왕이 없었다는 견해도 있었다. 산상왕의 형 발기가 동생의 즉위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고, 이와 관련하여 요동의 공손씨가 침공하였다. 이에 산상왕은 나라를 새로이 세웠다는 기록이 『삼국지』에 있는데, 이것이 고구려 건국지인 환인(桓因)에서 국내성으로의 천도를 의미하므로, 그 이전의 왕인 고국천왕의 무덤이 국내성 지역에 있을 수가 없고, 이는 고국천왕이 허구의 존재임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하지만 당시 중국 기록에 부정확점이 많은 것을 여러 다른 사례에서도 확인할 수 있어 『삼국사기』 보다 중국 측 문헌이 정확하다고 볼 근거는 없다. 오히려 「광개토대왕릉비(廣開土大王陵碑)」와 같은 고구려인들이 직접 남긴 기록을 보면, 『삼국사기』의 왕실계보가 정확함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삼국사기』의 고국천왕은 실재하는 왕이 확실하다. 다만 고국천왕이 그 형 발기와 왕위계승분쟁을 벌였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은 사실이 아니다. 이는 산상왕 즉위와 관련한 내용인데, 중국 측 문헌에 고국천왕의 즉위 사실이 기재되지 않으면서, 그 다음 산상왕 즉위에 대한 내용이 고국천왕의 일로 오해되어 『삼국사기』에 실렸을 뿐이다. 발기와 이이모의 왕위계승 분쟁은 『삼국사기』 산상왕 즉위조에 형사취수혼(兄死娶嫂婚)이라는 고구려 고유의 풍습과 함께 자세히 기록되어 있어 산상왕에 대한 이야기임이 확실하다.

고국천왕의 무덤 위치와 관련해서도, 고구려가 이미 3년(유리왕 22)에 국내성으로 천도했다는 기록도 있어서, 산상왕대에 가서야 국내성에 도읍을 정했다고 단정할 수 없다. 설사 산상왕대에 국내성으로 천도했다고 하더라도 고구려에서는 죽은 후 무덤에 안장되기까지 100여 일 이상 최대 3년이 걸렸다는 것을 생각하면, 천도 이전에 죽은 고국천왕이 국내성에 묻혔을 가능성은 충분하다.한편 『삼국사기』 동천왕 8년조에는 고국천왕의 무덤과 관련하여 재미난 설화가 실려 있다. 왕비 우씨는 고국천왕의 사후 그의 동생 산상왕과 재혼한다. 그리고 산상왕의 아들로 즉위한 동천왕대까지 살아 있다가 234년(동천왕 8) 9월 사망한다. 이때 유언으로 산상왕 옆에 묻어 달라고 하여 그대로 따랐다고 한다. 그런데 한 무당이 왕을 찾아와 고하기를, 고국천왕의 혼령이 우씨가 자신 옆에 묻히지 않고 산상왕 옆에 묻히는 것을 선택한 것에 화가 나 우씨의 혼령을 찾아가 크게 싸웠는데, 다시 생각하니 너무나 부끄러워 나라 사람들을 볼 면목이 없으니 자신의 무덤을 가려달라는 요청을 해왔다고 하였다. 이에 동천왕이 고국천왕릉 앞에 소나무를 7겹 심었다고 한다. 이 설화는 고국천왕릉이 당시 고구려 수도 국내성에 실재로 있었던 것을 증명하는 것이므로, 고국천왕이 실재했던 왕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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