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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이왕[古爾王]

백제 국가의 기틀을 확립하다

미상 ~ 286년(고이왕 53)

고이왕 대표 이미지

삼국사기 고이왕 기사

한국사데이터베이스(국사편찬위원회)

1 개요

고이왕(古爾王)은 백제 제8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234년~286년이다. 좌평제와 관등제의 설치, 공복의 제정, 율령의 반포 등을 통해 고대 국가로서 백제의 국가체제를 확립했다. 대외적으로는 마한의 영도세력으로 성장하였으며, 한(漢)의 군현(郡縣)과도 대등하게 싸웠다.

2 고이왕의 출계와 왕위계승

고이왕은 구이왕(久爾王) 또는 고모왕(古慕王)이라고도 한다. 제4대 개루왕(蓋婁王, 재위 128~166)의 둘째아들이고, 제5대 초고왕(肖古王, 재위 166~214)의 동생이라고 전해진다. 그러나 개루왕과 고이왕의 즉위 연대가 100년 이상 차이나고 있어 이것을 역사적 사실로 보기는 어렵다. 234년부터 286년까지 53년간 백제를 통치하고, 아들인 책계왕 (責稽王, 재위 286~298)이 왕위를 이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고이왕의 즉위 과정이 비교적 자세히 실려 있다. 제6대 구수왕(仇首王, 재위 214~234)이 죽자 맏아들인 사반왕(沙伴王)이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나이가 어려 정치를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이에 제5대 초고왕의 동복 아우(母弟)인 고이가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이유가 어떻든 사반왕이 즉위했다가 다시 고이왕이 즉위한 것이어서, 왕위계승 자체에 부자연스러운 점이 있다. 이에 대해서는 백제 초기의 왕계를 보는 시각에 따라 다양한 주장이 제기되어 있다.

먼저 백제 초기의 왕계를 이원적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백제왕들의 출계가 주몽(朱蒙)의 아들인 온조(溫祚)와 우태(優台)의 아들인 비류(沸流)로 구분된다는 것이다. 즉, 주몽-온조-초고(肖古)로 이어지는 이른바 ‘초고계’와 우태-비류-고이로 이루어지는 소위 ‘고이계’가 있었으며, 두 계통에 의해 왕위계승이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이다. 특히 고이왕이 “초고왕의 모제(母弟)”라고 되어있는 기록에서 ‘모제’를 ‘동복 아우’가 아니라 ‘어머니의 동생’이라고 해석하고, 그 계통을 우씨로 파악하였다.

이 입장에서는 고이왕의 즉위를 왕실의 교체로 이해한다. 주몽과 온조를 시작으로 초고왕-구수왕-사반왕까지 직계로 이어지던 왕위계승이 고이왕에 이르러 갑자기 방계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고이왕은 사반왕이 나이가 어리다는 것을 구실로 왕을 폐하고, 일종의 정변을 통해 즉위한 것이 된다. 이후 고이왕의 자손인 책계왕 (責稽王, 재위 286~298)과 분서왕(汾西王, 재위 298~304)이 왕위를 이음으로써 이 시기는 고이계가 왕위를 계승한 것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고이왕의 즉위는 초고계에서 고이계로 왕실의 교체를 의미하는 것이 된다.

반대로 백제의 왕들은 왕계의 변화 없이 모두 온조왕의 후손에 의해 계승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이에 따르면 온조와 비류의 건국설화는 백제가 비류국을 흡수해 연맹왕국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일 뿐이다. 비정상적으로 보이는 고이왕의 즉위는 국가적 위기 속에서 이루어진 일종의 비상조치였다고 설명한다. 대내적으로는 사반왕이 나이가 어려 정사를 돌볼 수 없었고, 대외적으로는 한군현과 말갈, 신라의 위협이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탁월한 개인적인 능력과 모계와 연결된 진씨 세력의 군사적 기반을 바탕으로 고이왕이 즉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기록상 사반왕과 6촌 관계에 있는 고이왕은 같은 온조계의 후손으로서, 단일한 왕계에 속한 인물이 된다.

그 외에 구태(仇台)를 고이왕과 관련시켜 이해하기도 한다. 『주서(周書)』와 『수서(隋書)』 백제전에는 백제의 시조가 구태라고 나온다. 여기서 ‘구태’는 ‘구이’와 음운상 같고, 구이는 다시 ‘고이’와 같으므로 구태는 곧 고이를 말한다는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 고이왕을 백제의 실질적인 건국자이자 시조로 파악하고 있다. 이것은 고이왕이 재위 기간 동안 이룩한 각종 제도의 정비와 왕권 강화 노력에 큰 의미를 두고 있는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3 국가 체제의 정비와 왕권 강화

고이왕은 각종 국가체제를 정비하고 왕권의 강화를 추진하여 고대국가로서 백제의 기반을 마련한 인물이다. 고이왕은 즉위 이후 여러 차례 천지(天地)에 제사를 지냈다. 『주례(周禮)』에 따르면 천지에 대한 제사는 원래 황제가 하던 것이다. 그러므로 고이왕의 천지 제사는 왕으로서 자신의 권위를 과시하는 상징적인 행위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실질적으로 가장 먼저 취한 조치는 군사권의 장악이다. 240년(고이왕 7) 기록상 최초의 군사 관련 관직인 좌장(左將)을 설치하고 내외의 군사 업무를 맡긴 것이다. 최초로 좌장에 임명된 사람은 진충(眞忠)이고, 진충의 뒤를 이어서 진물(眞勿)이 임명되었다. 이들은 고이왕의 즉위에 일조했던 진씨 세력의 일원이다. 그러므로 좌장의 설치는 기존 연맹장들의 군사권을 약화시키고, 중앙에서 이를 통솔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국가체제의 정비와 관련해서 가장 주목되는 시점은 260년(고이왕 27)부터 262년(고이왕 29)까지의 시기이다. 이 시기에 고이왕은 정력적으로 각종 제도의 정비를 추진한다.

먼저 260년 정월에 6좌평(佐平)과 16관등을 설치하였다. 이때 6좌평의 명칭과 담당 업무가 모두 정해졌다. 그리고 좌평을 1품으로 하고, 극우(克虞)를 최하의 16품으로 둔 16관등제 역시 이 시기에 완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같은 해 2월에는 왕명으로 관등에 따라 관복의 색깔을 다르게 정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관등제와 공복제는 신하들을 일정한 위계질서로 편제하고, 그 위계에 따라 옷의 색깔을 구분함으로써 신하의 지위가 겉으로 드러나도록 한 것이다. 그러므로 왕권의 강화와 통치조직의 정비 측면에서는 매우 획기적인 조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제도는 일시에 정비된 것이 아니라, 최종적으로 완비된 형태가 고이왕대에 소급 기록된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 시기에는 좌평과 달솔(達率)·은솔(恩率)·덕솔(德率)·한솔(扞率)·나솔(奈率)의 솔급 관등만 설치되고, 사비시기에 가서야 16관등이 완비된 것이다. 하지만 좌평의 경우, 좌평 설치 이후 내두좌평(內頭佐平)을 제외한 5좌평의 관등을 지닌 인물들이 계속해서 등장하고 있어 한성시기에 이미 정비된 형태로 기능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고이왕은 262년 정월, 뇌물을 받은 관리와 도둑질한 사람에게 장물(贓物)의 세 배를 징수하고 종신 금고형(禁錮刑)에 처하라는 영을 내렸다. 백제의 경우 율령 반포에 대한 기록이 없어서 다양한 해석을 낳고 있다. 율(律)은 오늘날의 법이고, 령(令)은 행정법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율령에는 국가의 통치체계에 관한 규정과 형벌규정이 포함된다. 고이왕대에 확인되는 관등제와 공복을 제정, 형벌 규정 등을 근거로 이 시기에 율령이 반포된 것으로 이해한다. 율령이라는 성문법 체계가 형성됨으로써 백제의 통치는 보다 조직적이고 중앙집권적 형태를 띠게 되었다.

고이왕이 이룩한 국가통치체제의 정비는 대부분 260년에서 262년 사이에 집중되어 있다. 이러한 정비가 3년 만에 모두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은 회의적인 시각이 많다. 그러나 꾸준히 성장해오던 백제가 이 시기에 이르러 한 단계 성장했다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이 시기가 백제사의 발전 과정에서 획기적인 시기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4 고이왕대 한군현(漢郡縣)과의 관계

백제는 건국 이후 남쪽의 마한 세력을 병합하고, 북쪽으로는 한군현과 항쟁하며 꾸준히 국력을 신장시켰다. 특히 2세기 후반 이후에는 한예(韓濊)가 강성해지면서 한반도 중부와 남부의 여러 세력에 대한 낙랑군(樂浪郡)의 지배력이 약화될 정도였다. 그러자 중국은 3세기 초에 대방군(帶方郡)을 설치하여 이들 지역을 관할하도록 했다. 하지만 한반도 중부에서 성장해가던 백제를 비롯한 세력과 낙랑·대방과의 충돌은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246년(고이왕 13) 위(魏)의 유주자사 관구검(幽州刺史 毌丘儉)이 낙랑태수 유무(樂浪太守 劉茂)·대방태수 궁준(帶方太守 弓遵)과 함께 고구려를 공격했다. 그러자 고이왕은 그 틈을 타서 좌장 진충을 보내 낙랑 변방을 습격해 주민들을 잡아 왔다. 유무가 이것을 듣고 노하자, 고이왕은 침략을 받을까 두려워 주민들을 다시 낙랑에 돌려주었다.

그런데 같은 사건에 대해서 『삼국지(三國志)』 동이전(夷列傳)에서는 조금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위가 진한(辰韓)의 8국을 분할하여 낙랑에 귀속시키려 했다. 그러자 분할책에 불만을 품은 신지(臣智)가 한(韓)의 분노를 격발시켜 대방군의 기리영(崎離營)을 공격했다. 대방태수 궁준과 낙랑태수 유무가 싸웠지만, 여기에서 궁준이 전사하였다. 이에 두 군현은 한을 멸망시켰다고 한다.

여기에서 신지를 누구로 볼 것인가에 대해 다양한 주장이 있지만, 시기상 백제의 고이왕으로 보는 견해가 다수이다. 그렇다면 이 전쟁은 고이왕의 주도로 마한의 정치체들이 함께 수행한 것이 된다. 전쟁의 결과 두 군현이 한을 멸망시켰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빼앗았던 주민들을 다시 돌려보냄으로써 전쟁을 마무리한 것으로 보인다.

전쟁의 결과만 놓고 볼 때, 기리영 전투는 백제가 승리한 전쟁이라 보기는 어렵다. 땅을 빼앗은 것도 아니고, 잡아왔던 주민들 역시 낙랑으로 돌려보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백제는 마한 세력을 이끌고 한의 군현을 공격했다. 그리고 대방태수 궁준을 전사시킬 정도로 전쟁에서도 선전을 했다. 이렇게 볼 때, 기리영 전투는 마한의 실질적인 영도세력으로 성장해서 한 군현과도 대등하게 싸울 정도가 된 백제의 힘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대외적인 성장은 이후 국내 정치에서 각종 정치체제와 제도를 마련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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