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사 연대기
  • 고대
  • 근초고왕

근초고왕[近肖古王]

백제의 전성기를 이룩한 정복군주

미상 ~ 375년(근초고왕 3)

근초고왕 대표 이미지

서울 석촌동 고분군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근초고왕(近肖古王)은 백제 제13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346년~375년이다. 활발한 정복활동을 펼쳐, 남쪽으로는 마한 세력을 통합하고 가야 지역까지 진출했다. 북쪽으로는 대방군과 낙랑군의 일부 지역을 확보했고, 평양성까지 진출해서 고국원왕을 전사시키기도 했다. 그리고 바다 건너 요서지역과 왜에도 진출하여 활발히 교류했다. 이로써 백제 역사상 최대 영토를 자랑하며 전성기를 이룩했다.

2 근초고왕의 가계와 왕위계승

근초고왕은 조고왕(照古王) 또는 초고왕(肖古王)으로도 전해진다. 『진서(晉書)』에는 ‘여구(餘句)’라고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제11대 비류왕의 둘째아들이다. 왕비는 진씨이고, 아들은 근구수왕 (近仇首王, 재위 375~384)이다. 346년부터 375년까지 30년간 백제를 다스렸다. 서울 석촌동 3호분을 근초고왕의 무덤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백제사에서 분서왕(汾西王, 재위 298~307)부터 근초고왕까지의 왕위계승은 매우 독특한 양상을 보인다. 백제 왕계를 이원적으로 보는 입장에서 보면 이른바 초고계와 고이계가 번갈아서 왕위에 오르는 상황이 전개되는 것이다. 먼저 10대 분서왕은 고이왕-책계왕 으로 이어지는 고이계 왕이었다. 그런데 분서왕 사후 비류왕(比流王, 재위 307~344)이 왕위를 계승했다. 비류왕은 초고왕-구수왕으로 이어지는 초고계이다. 그런데 11대 비류왕이 죽자, 이번에는 분서왕의 맏아들인 고이왕계 계왕(契王, 재위 344~346)이 즉위했다. 계왕은 즉위 3년 만에 사망하는데, 그 뒤를 이어 비류왕의 둘째 아들이자 초고계인 근초고왕이 즉위하게 된다.

근초고왕의 즉위 이전 왕위계승은 초고계와 고이계에 의해 분립적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근초고왕 이후부터는 근초고왕의 직계가 계속 왕위를 계승하면서 초고계에 의한 단선적인 왕위계승이 확립되었다. 왕위계승이 안정됨으로써 왕권이 안정되었고, 정국 운영의 주도권도 귀족이 아닌 왕이 장악할 수 있었다. 이러한 국내 정치의 안정은 근초고왕이 대외 정복활동을 추진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3 근초고왕의 내치(內治)

근초고왕은 즉위 후 맞는 첫 정월에 천지(天地)에 제사를 지냈다. 천지 제사는 원래 황제만이 지낼 수 있는 제사이다. 근초고왕이 즉위의례로 천지 제사를 지냈다는 것은 초고계 왕으로서 정통성의 확립과 자신의 권위에 대한 확신을 목적으로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근초고왕은 당시 유력 귀족이었던 진씨를 왕비를 맞아 자신의 지지기반으로 삼은 바 있다. 이후 366년(근초고왕 2), 왕후의 친척인 진정(眞淨)을 형벌과 감옥에 관한 일을 담당하는 조정좌평(朝廷佐平)에 임명했다. 진정은 성품이 사납고 어질지 못한데다, 권세를 믿고 마음대로 해 국인들이 미워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기록을 왕권강화 과정에서 일어난 엄혹한 숙청작업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어서 흥미롭다.

근초고왕대의 기록은 3년부터 20년까지 공백으로 남아 있다. 이후의 기록은 주로 정복전쟁과 관련된 기록이다. 아마도 이 공백기에는 왕권 강화를 위한 통치체제의 정비와 같은 조치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이러한 국내 정치의 안정 속에서 박사 고흥(博士 高興)이 『서기(書記)』라는 역사책을 편찬하기에 이른다. 『서기』의 편찬은 왕실과 왕권의 정통성과 역사성을 확보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이 때 고흥이 가지고 있는 박사라는 직명은 원래 유학과 관련된 기능을 담당하던 사람에게 주던 것이었다. 그러므로 박사 고흥의 역사책 편찬은 유교적 이념으로 왕권 강화를 정당화하려는 목적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4 근초고왕의 정복활동

근초고왕은 대외 진출을 활발히 모색했다. 먼저 남쪽의 마한 지역 정복에 나섰다. 『삼국사기』 근초고왕 조에는 마한 정복 관련 기사가 전혀 실려 있지 않다. 마한은 온조왕대에 이미 백제에 통합된 것으로 나오는데, 이것은 근초고왕대의 사실이 온조왕대에 소급 기록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대신 『일본서기』를 통해 근초고왕의 마한지역 정복활동 사실을 추정할 수 있다.

369년(근초고왕 24), 백제와 왜군이 함께 가야 지역을 공격해 비자벌(比自伐, 창녕)과 남가라(南加羅) 등 가야의 7국을 평정했다. 그리고 서쪽으로 군대를 돌려 침미다례(忱彌多禮)를 정벌하니 이에 비리(比利)·벽중(辟中) 등 4읍이 항복해 왔다. 여기서 침미다례와 비리읍은 전남 해안지역으로 비정된다. 그러므로 이 시기에 근초고왕이 마한의 잔여 세력들을 정복하고 전남 해안과 가야지역까지 진출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근초고왕의 정복에 대해서 일회적인 사건으로, 공납적 지배 수준에 머물렀다고 보기도 한다. 하지만 이후 근초고왕의 대대적인 북방 진출을 생각하면, 남쪽은 안정적 지배가 관철되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므로 근초고왕대 백제가 전남지역까지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추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근초고왕은 남쪽의 안정을 바탕으로 북쪽으로도 확장을 시도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3세기 초 고구려에 의해 낙랑군과 대방군이 멸망하고 양국 간에는 완충지대가 사라졌다. 이런 상황에서 백제의 북진은 곧 고구려와의 정면충돌을 뜻하는 것이었다. 양국의 충돌은 고구려의 선제공격으로 시작된다. 371년(근초고왕 24), 고국원왕이 군사 2만을 거느리고 치양(雉壤, 황해도 배천)을 공격하자, 근초고왕은 태자 근구수를 보내 고구려군을 물리쳤다. 그리고 2년 후인 373년(근초고왕 26), 고구려가 다시 쳐들어오니, 근초고왕은 패하(浿河, 예성강) 가에 군사를 매복시켰다가 급습해 승리를 거두었다. 그리고 태자와 함께 고구려 평양성(平壤城)까지 들어가 공격했는데, 여기에서 고국원왕이 전사하기에 이르렀다. 이 전쟁으로 백제는 대방과 낙랑지역의 일부를 장악할 수 있었다.

한편, 이 시기 백제의 요서지방 진출을 의미하는 요서경략설(遼西經略說)이 있다. 요서경략설은 백제가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 분열 시기를 이용해서 요서 지역에 진출해 백제군(百濟郡)을 설치하고 이 지역을 직접 지배했다는 주장이다. 관련 기록은 중국의 『송서(宋書)』와 『양서(梁書)』, 『남사(南史)』 등 남조계 사서에서만 확인된다. 이에 대해서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로 인정하는 주장과 전면 부정하는 주장이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그러나 최근에는 백제의 요서 진출 자체는 인정하되, 직접 지배보다는 고구려를 견제하고 교역을 위한 거점의 확보라는 측면에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5 근초고왕대의 외교

백제가 중국과 처음으로 외교관계를 맺은 것은 372년(근초고왕 27) 정월이다. 백제가 동진(東晉)에 사신을 보내자, 동진은 같은 해 6월, 근초고왕을 진동장군 영낙랑태수(鎭東將軍 領樂浪太守)에 책봉해준 것이다. 이로써 양국 간 최초로 공식 외교관계가 수립되었다. 근초고왕은 이듬해에도 동진에 사신을 보냈고, 이것은 근구수왕 대에도 이어졌다.

근초고왕이 동진과 책봉·조공을 특징으로 하는 공식 외교관계를 맺을 수 있었던 것은 백제의 대외적 성장과 관련이 있다. 근초고왕은 남쪽으로 진출해 마한 잔여세력을 통합하고, 정치적으로 복속시켰다. 이전까지 마한 세력은 독자적으로 사신을 파견했지만, 372년 이후에는 백제라는 이름으로 중국과의 외교관계가 이루어지게 된다. 그리고 북쪽으로의 영역 확대 과정에서 고국원왕을 전사시키는 등 국제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근초고왕은 주변국과의 관계 속에서 동아시아 국제무대에 백제왕이라는 이름으로 나설 수 있게 되었다.

한편 동진에 처음 사신을 보내던 372년, 근초고왕은 왜에 칠지도(七支刀)를 보냈던 것으로 추정된다. 칠지도는 일본의 이소노가미신궁(石上神宮)에 소장되어 있는 백제 시대의 철제 칼이다. 명문에 보이는 연호를 태화(泰和) 4년으로 파악하고 이를 근거로 369년(근초고왕 24)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칠지도의 명문 내용에 대해서는 다양한 주장이 있다. 일본에서는 백제왕이 왜왕에게 헌상했다는 것이 통설이다. 반면에 우리나라에서는 백제왕이 왜왕에게 하사한 것으로, 하사의 주체는 근초고왕일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칠지도의 존재는 당시 동아시아에서 백제의 위상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근초고왕은 왜에 선진문물을 전해주기도 했다. 대표적인 예로 아직기(阿直岐)와 왕인(王仁)을 왜국에 보내 『논어』와 『천자문』을 전해주었는데, 이들은 일본 유학의 시조로 평가받고 있다. 이러한 인적·물적 교류와 더불어 군사적 협력까지 생각한다면, 당시 백제와 왜가 얼마나 밀접한 관계에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