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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물마립간[奈勿麻立干]

이사금(尼師今)에서 마립간(麻立干)으로

미상 ~ 402년(내물마립간 47)

내물마립간 대표 이미지

경주 내물왕릉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내물마립간(奈勿麻立干, ?~402)은 신라 제17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356~402년이다. 그는 제13대 왕 미추(味鄒)에 이어 김씨로는 두 번째로 왕위로 올랐으며, 그 이후로 김씨만 왕이 되었고, 왕의 호칭도 이사금(尼師今)에서 마립간(麻立干)으로 바뀌었다. 이러한 변화는 신라가 왕권이 강화되면서 초기 독자적인 지역 집단인 6부의 연합체적 성격을 벗어나, 중앙집권적 고대국가로 발전하기 시작하였음을 보여준다. 한편 그는 재위 중 가야(加耶)와 왜(倭)의 지속적 침략을 받고 고구려 광개토왕(廣開土王)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는데, 이 때문에 당시 신라가 고구려의 강한 영향력 하에 들어가게 된다.

2 가계와 생애

내물마립간은 356년~402년 재위한 신라 제17대 왕이다. ‘내(奈)’는 ‘나’로도 발음을 할 수 있는데, 왕의 이름을 나밀(那密)로 표기한 사례도 있어, ‘내물’ 보다는 ‘나물’로 부르는 것이 당시 발음에 가깝다고 보기도 한다. 또 누한(樓寒)으로 기재한 것도 있다.

그는 김씨로 최초로 왕위에 오른 미추이사금(味鄒尼師今)의 아버지 구도갈문왕(仇道葛文王)의 손자이며, 각간(角干) 말구(末仇)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휴례부인 김씨(休禮夫人 金氏)로 전한다. 왕비는 미추이사금의 딸 보반부인(保反夫人)이어서, 그는 미추이사금의 조카이자 사위가 된다. 356년 4월 전왕인 흘해이사금(訖解尼師今)이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왕위에 올랐는데, 미추이사금의 근친으로서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부인과의 사이에서 눌지마립간(訥祗麻立干), 복호(卜好), 미사흔(未斯欣) 등의 자식을 두었으며, 46년간 왕위에 있다가 402년(내물마립간 47) 2월 사망하였다.

『삼국유사(三國遺事)』 「왕력(王曆)」에 그의 무덤은 지금의 국보 제31호 경주 첨성대(慶州 瞻星臺)를 의미하는 점성대(占星臺) 서남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에 입각하여 현재 사적 제188호 경주 내물왕릉(慶州 奈勿王陵)이 그의 무덤으로 지정되어 있다. 그러나 당시 신라 왕릉이 대형 무덤인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인데 비해, 현재의 경주 내물왕릉은 규모도 작고 후대 양식인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으로 추정되어, 실재 내물왕릉이 아니라고 보는 견해가 많다. 일부 학자들은 사적 제512호 경주 대릉원 일원 (慶州 大陵園 一圓)에 있는, 흔히 황남대총(皇南大塚)으로 부르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무덤인 황남동 98호분을 내물왕릉으로 추정한다.

3 왕의 호칭을 마립간으로 바꾸다

신라의 왕호는 거서간(居西干), 차차웅(次次雄), 이사금(尼師今), 마립간(麻立干), 왕(王) 순서로 바뀌었다고 한다. 내물의 경우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이사금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그의 아들 제19대왕 눌지(訥祗)때부터 마립간 호칭을 사용했다고 한다. 따라서 그의 공식적인 호칭은 내물이사금이다. 하지만 『삼국유사』 「왕력」에는 내물부터 마립간 호칭을 사용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이사금은 제3대 왕 유리(儒理)의 즉위 과정에서 유래한 호칭으로 강한 권력을 가지고 세습하는 왕을 의미하지 않고, 신라를 구성하던 여러 집단의 수장들 중 연장자와 같이 자격 있는 사람이 추대되는 방식과 연관된 것이다. 즉 강한 중앙권력이 존재하지 않는 것을 보여준다. 그에 비해 마립간은 여러 수장, 곧 간(干)들 중에 제일 으뜸가는 간(干)이라는 의미를 가지는 용어로, 여러 수장들 보다 강한 힘을 가지고 그들을 통솔하는 지위에 있는 존재를 칭한다. 곧 강력한 정치권력을 가지고 있는 왕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내물이 즉위한 이후부터는 박(朴), 석(昔), 김(金) 세 성씨 출신이 왕위를 교대로 계승하던 것에서 김씨만 왕위를 독점적 세습하게 바뀌었다는 점, 4세기경에 신라 수도인 지금의 경주 일대에 많은 인력을 동원할 수 있는 정치권력이 있어야지만 만들 수 있는 대형 무덤인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이 다수 조성되는 점 등을 고려할 때, 내물이 재위하던 시기는 이전에 비해 월등히 강한 왕권이 확보되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내물부터 마립간 호칭을 사용했다고 파악하고 있다. 실제 당시 기록이라 할 수 있는 「광개토대왕릉비(廣開土大王陵碑)」에도 내물을 마립간의 다른 표기로 보이는 ‘매금(寐錦)’으로 적고 있어 이 추정을 뒷받침한다.

그렇다면 내물마립간 재위를 전후하여 신라는 보다 강한 중앙 권력을 바탕으로 체제를 정비하고 국력을 증진시켜, 진한(辰韓) 지역 전체에 영향력을 미치는 강대국으로 발돋움해 나갔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발전은 신라가 국제무대에 이름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신라는 381년(내물왕 26), 중국 측 문헌인 『태평어람(太平御覽)』에 의하면 382년에 비록 고구려 사신과 함께이기는 하지만 전진(前秦)에 사신을 파견한다. 이는 신라가 최초로 자신들의 이름으로 중국과 교류한 것이다.

그리고 이때, 전진의 왕 부견(苻堅)이 신라 사신 위두(衛頭)에게 묻기를, “경이 말하기를 해동(海東)의 일이 옛날과 같지 않다고 하는데 무슨 일인가?” 하자, 위두가 “중국과 마찬가지로 시대가 달라져 그 이름이 바뀌었으니 지금이 어찌 옛날과 같을 수 있겠습니까.”하고 대답하였다.

이것은 그간 진한 12국 중 하나에 불과했던 신라가 진한 전체를 대표하는 존재로 우뚝 섰고, 이제는 진한이 아니라 신라라는 이름으로 중국과 관계를 맺게 되었음을 알리는 것이었다. 바로 신라가 마립간이라는 호칭을 사용하면서 보다 발전한 고대국가로 나아가기 시작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하겠다.

4 내물마립간과 고구려

내물마립간 대에 와서 신라는 진한 지역 전체를 장악해 나가면서 강한 국가로 발전해 갔다. 이러한 신라 발전에는, 당시 백제 근초고왕(近肖古王, 재위 346년~375)이 마한 전역을 정복하고 낙동강 유역까지 진출한 것이, 자극이 되었던 측면이 있기도 했을 것이다. 그리고 반대로 신라의 발전이 주변국을 자극하기도 하고, 신라가 영역을 확장하면서 주변국과의 충돌이 일어나기도 했다.

특히 내물마립간 재위기간 중 가야(加耶)와 왜(倭)가 지속적으로 신라를 공격했다. 당시 백제가 가야 지역에 진출하고 왜와 통교했던 점을 고려한다면 이들의 배후에 백제가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373년(내물마립간 18)에는 백제의 독산성주(禿山城主)가 3백여 명을 거느리고 신라에 망명한 일로 백제와 외교적 마찰이 있었던 점을 볼 때 백제와도 경쟁했던 것이 분명하다. 내물마립간은 발전한 국력을 바탕으로 이들의 침략을 잘 막아내기는 했지만, 주변 여러 나라의 계속된 군사적 압박을 이겨내기가 쉽지 않았다.

이에 재위 말인 399년(내물마립간 44, 광개토왕 9)에 내물마립간은 당시 한반도에서 최대 군사 강국이라 할 수 있는 고구려의 광개토왕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된다. 신라가 381년 고구려 사신을 따라 전진에 사신을 파견한 것을 생각하면, 그전부터 고구려와 교류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392년(내물마립간 37)에는 이찬(伊飡) 대서지(大西知)의 아들 실성(實聖)을 볼모[質]로 보내는 등 강력한 고구려와 우호적 관계를 맺고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 왔던 것을 확인할 수도 있다. 하지만 399년 이전까지 군사적 협력 관계를 구축하거나 하는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지는 않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고구려와의 관계가 이전과 크게 달라진 것이다.

400년(광개토왕 10) 광개토왕이 5만의 군대를 보내 신라를 공격하는 가야와 왜를 격파하여 신라를 도와주었지만, 이제는 고구려군이 신라를 도와준다는 명분 아래 신라 영내에 주둔하면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하여, 신라에 큰 부담이 되었다. 당시 고구려가 신라에 얼마나 큰 영향력을 행사했는지는 402년 2월 내물마립간이 죽은 이후, 고구려에 볼모로 갔다가 내물 사망 직전에 귀국한 실성이, 내물의 아들들을 제치고 왕으로 즉위한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고구려의 영향력은 신라가 더 성장하는데 큰 제약이 되었다. 이는 381년 전진에 사신을 파견한 이후 법흥왕대까지 중국에 사신을 파견하지 못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내물마립간대는 신라가 국제무대에 이름을 알릴 정도로 성장했던 시기이지만, 또 고구려의 강한 영향력 하에 들어가 추가적인 성장에 제약이 있었던 때이기도 하다. 이제 신라는 고구려의 간섭에서 벗어나 독자적 발전을 추구해야 하는 과제를 가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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