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눌지마립간[訥祗麻立干]

고구려의 그늘에서 벗어나, 자주적 발전을 도모하다

미상 ~ 458년(자비 마립간 1)

눌지마립간 대표 이미지

박제상 유적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눌지마립간(訥祗麻立干)은 신라의 제19대 왕이다. 고구려의 지원 덕에 실성마립간(實聖麻立干)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으나, 재위기간 동안 고구려의 간섭을 배제하고 왕권을 안정시키고자 노력했다. 고구려의 남하정책이 본격화되자, 백제와 나제동맹을 맺어 고구려에 공동으로 대응했다. 그리고 장자의 왕위계승 원칙을 확립함으로써 왕위계승의 혼란을 막고, 왕권의 안정을 도모했다.

2 눌지마립간의 가계와 즉위 과정

눌지마립간은 내지왕(內只王)이라고도 한다. 내물마립간(奈勿麻立干)의 아들로, 성은 김(金), 이름은 눌지(訥祗)이다. 어머니는 미추이사금(味鄒尼師今)의 딸인 보반부인(保反夫人) 김씨인데, 다른 말로 내례희부인(內禮希夫人)이라고도 한다. 왕비는 실성마립간의 딸 김씨이다. 자식으로는 왕위를 계승한 자비마립간(慈悲麻立干)과, 지증왕(智證王)을 낳은 조생부인(鳥生夫人) 김씨가 있다. 417년 즉위하여 458년까지 41년간 신라를 다스렸다. 신라에서 시호제(諡號制)가 성립되기 이전이라 별도의 시호는 없고, 이름을 따서 눌지마립간이라 불린다. 황남대총(皇南大塚) 남분이 눌지마립간의 능이라는 주장이 있으나, 이것을 내물마립간의 능으로 보는 견해도 있어 단정하기는 어렵다.

눌지마립간의 즉위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내물마립간과 실성마립간 시기의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4세기 후반 근초고왕(近肖古王, 346~375)의 활약으로 백제가 세력을 떨치자, 이를 견제하기 위해 고구려와 신라는 우호관계를 형성했다. 그러나 광개토왕(廣開土王, 391~412)의 등장으로 양국의 관계는 고구려가 주도하게 되었다. 광개토왕은 연달아 백제를 공격하며 남쪽을 압박했고, 이런 상황에서 신라에 사자를 보내 인질을 요구했다. 그러자 내물마립간은 왕족인 실성(實聖)을 볼모로 보냈다. 실성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미추이사금의 아우로 기록되어 있다. 이때가 392년(내물마립간 37) 1월이었다.

이후 실성은 9년이 지나서야 신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 사이 광개토왕은 신라에 쳐들어온 왜군을 물리치기 위해 가야 지방까지 진출하는 등 군사적 지원을 명분으로 신라에 대한 간섭을 심화시켜 나갔다. 실성이 신라로 돌아온 이듬해, 내물마립간이 죽었다. 그러나 아들인 눌지가 너무 어려, 나라 사람들이 실성을 왕으로 올렸다고 한다. 실성의 즉위에도 고구려의 영향력이 개입한 것으로 보인다.

왕위에 오른 실성은 내물마립간이 자신을 인질로 보낸 것을 원망하여, 내물마립간의 아들인 미사흔(未斯欣)과 복호(卜好)를 각각 왜와 고구려에 인질로 보냈다. 그리고 눌지를 해쳐 원수를 갚고자 했다. 실성은 고구려에 인질로 있는 동안 알게 된 사람을 불러 눌지의 살해를 지시하지만, 그는 눌지의 풍모를 보고 사실을 고하였다. 그러자 눌지는 돌아와서 실성을 죽이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한편 『삼국유사』에 의하면, 실성은 내물마립간의 태자였던 눌지가 덕망이 있음을 꺼려, 고구려에 군사를 청해 거짓으로 눌지를 맞아 죽이려고 하였다. 그러나 고구려인들이 눌지의 행실을 보고, 오히려 실성을 죽이고 눌지를 왕으로 세운 후 돌아갔다고 한다. 어느 쪽이든 내물마립간-실성마립간-눌지마립간으로 이어지는 왕위의 계승에 고구려의 영향력이 작용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3 박제상(朴堤上)의 활약과 왕권의 강화

눌지마립간은 고구려의 도움으로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러나 왕위계승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고구려의 간섭이 지나치게 커지고 있는 상황에서, 그는 고구려의 영향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했다.

이를 위해 눌지마립간이 가장 먼저 행한 조치는 고구려에 인질로 보낸 복호를 다시 신라로 데려오는 일이었다. 왕의 동생이 인질로 잡혀 있는 것만으로도 고구려와의 관계에서 열세를 면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눌지마립간은 복호를 데려오기에 적합한 인물을 수소문했고, 삽라군태수(歃羅郡太守) 박제상(『삼국유사』에는 김제상으로 기록)이 적임자로 선택되었다.

418년(눌지마립간 2), 박제상은 사신의 자격으로 고구려에 들어가 장수왕(長壽王)과 담판을 짓고 무사히 복호를 데려올 수 있었다. 『삼국유사』에는 박제상이 변장을 하고 고구려에 들어가, 몰래 보해(寶海, 복호)를 구출시킨 것으로 나와 있다. 고구려군이 추격했지만, 이를 따돌리고 무사히 귀환할 수 있었다.

복호의 귀한을 성공시킨 박제상은 곧바로 왜국으로 향했다. 박제상은 왜국에 가서 신라왕이 자신의 가족을 해쳤기 때문에 도망쳐 왔다며 거짓으로 고하고, 왜에 머무르게 되었다. 박제상은 왜왕의 의심을 불식시킨 후, 미해(美海, 미사흔)를 먼저 신라로 들여보냈다. 그리고 자신은 왜에 붙잡혀 죽음을 맞았다. 왕은 박제상에게 대아찬을 추증하고, 부인은 국대부인(國大夫人)으로 삼았다. 그리고 박제상의 둘째 딸을 미사흔과 혼인하도록 하였다.

내물마립간부터 눌지마립간의 즉위에 이르는 기간은 왕위계승을 둘러싼 내물계와 실성계의 경쟁이 극심한 시기였다. 상대방을 번갈아 외국에 인질로 보내며 국내에서 자신의 세력기반을 확대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눌지마립간이 실성마립간을 죽이고 왕위에 올라, 자신의 두 동생들을 국내로 데려오면서 이 경쟁은 내물계의 승리로 끝났다. 특히 눌지마립간에 이어 즉위한 자비마립간(慈悲麻立干)과 소지마립간(炤知麻立干)은 전 왕의 장자로서 왕위를 계승한다. 이렇게 눌지마립간은 장자에 의한 왕위계승 원칙을 확립함으로써, 자신이 겪었던 왕위계승 경쟁을 미연에 방지하고 왕권의 안정을 도모하게 된다.

한편 일반적으로 내물마립간 때부터 ‘마립간’이란 왕호를 사용했다고 알려진 것과는 달리,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눌지마립간 때부터 마립간 호를 사용한 것으로 되어 있다. 김대문(金大問)의 해석에 의하면, 마립간은 우두머리, 제일의 간(干)이라는 뜻으로 최고 지배자라는 의미이다. 이전의 이사금(尼師今)이 연장자라는 의미였던 것을 생각하면, 정치적 지배력이 한층 강화된 왕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삼국사기』의 이와 같은 기록은, 이전의 왕위계승 분쟁을 종식시키고 왕권과 왕실의 안정을 이룩한 눌지마립간의 업적을 반영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4 나제동맹과 대(對) 고구려 관계

신라는 백제와 비교적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근초고왕 시기 백제의 지나친 팽창은 신라에게도 부담이 되었다. 373년(내물마립간 18), 백제의 독산성주(禿山城主)가 주민을 이끌고 신라에 항복했는데, 내물마립간이 근초고왕의 송환 요구를 거절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양국의 관계는 악화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고구려는 평양성전투에서 고국원왕(故國原王)이 전사한 이후 지속적으로 백제에 대한 공격을 단행한다. 특히 광개토왕은 한강을 넘어 한성을 포위하고, 아신왕(阿莘王)의 항복을 받기까지 했다.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의 적대적 관계를 이용하여, 고구려의 편에 섰다. 고구려의 도움으로 전진(前秦)에 처음으로 사신을 파견하고, 실성을 고구려에 인질로 보내는 등 고구려와의 우호적 관계 증진을 위해 노력한 것이다.

하지만 고구려군이 신라 왕경에 주둔하고, 신라의 왕위계승에도 간섭하는 등 고구려의 영향력이 지나치게 커지는 문제가 발생했다. 눌지마립간 역시 고구려의 지원 덕에 왕위에 올랐으므로, 초기에는 고구려와의 외교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왕권의 안정을 위해서는 고구려의 영향력 배제가 필수적이었다. 이러한 신라의 상황은 고구려에 적대적이었던 백제의 이해관계와도 일치하는 것이었다. 특히 장수왕이 평양(平壤) 천도와 함께 남하정책을 본격 추진하면서, 신라와 백제의 관계는 급속도로 가까워지게 된다.

신라와 백제 사이의 나제동맹 체결은 433년부터 434년에 걸쳐 진행되었다. 433년(눌지마립간 17, 비유왕 7), 백제가 먼저 신라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하자 신라가 이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듬해에 백제가 신라에게 좋은 말 두 필과 흰 매를 보내니, 신라가 이에 화답하여 금(金)과 명주(明珠)를 예물로 보냈다. 이로써 신라와 백제는 고구려의 팽창을 함께 견제할 수 있게 되었다.

나제동맹의 체결로 신라와 고구려의 마찰 역시 피할 수 없게 되었다. 450년(눌지마립간 34), 고구려의 변방 장수가 실직(悉直)에서 사냥을 했는데, 신라의 하슬라성(何瑟羅城) 성주 삼직(三直)이 공격해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장수왕은 사신을 보내 항의하고는, 곧바로 군사를 일으켜 신라를 공격해왔다. 눌지마립간이 사죄함으로써 고구려군이 물러가기는 했으나, 이것은 양국 간의 관계 변화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이후 455년(눌지마립간 39, 개로왕 원년)에 고구려가 백제를 공격하자, 신라는 나제동맹에 따라 군사를 보내 백제를 구원하였다. 이처럼 신라와 고구려의 관계는 악화되었으나, 신라는 이제 고구려의 영향에서 벗어나 자주적인 발전을 도모할 수 있게 되었다.

5 불교의 전래

눌지마립간대의 일들 중에서 주목할 만한 것으로 불교의 전래를 들 수 있다. 묵호자(墨胡子)라는 승려가 고구려에서 일선군(一善郡, 경북 구미시 선산읍)으로 왔다. 그러자 모례(毛禮)라는 사람이 자기 집 안에 굴을 파서 방을 만들고 묵호자를 머무르게 하였다. 그 때 양(梁)에서 사신을 보내 향과 의복을 보내왔는데, 왕이 향의 용도를 몰라 널리 수소문하니 묵호자가 알려주었다. 대답을 들은 눌지마립간은 마침 병들어 있던 자신의 딸을 위해 향을 사르고 소원을 빌도록 했다. 그러자 공주의 병이 나았다. 그러나 궁궐을 나온 묵호자는 모례를 찾아가 작별을 고하고는 사라졌다고 한다.

신라에서 불교는 법흥왕(法興王) 때인 528년(법흥왕 15)에 공인되었다. 하지만 묵호자의 이야기를 통해, 눌지마립간 때 이미 불교가 민간에 전해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고구려와 백제의 불교 전래가 국가 간의 외교적 사절에 의해 이루어진 것과는 대조적이다. 오히려 민간에서 시작된 불교가 왕실까지 전달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왕실에서는 불교가 큰 성과를 내지 못했다. 공주의 병을 고칠 정도로 불교의 영험함을 알았기에, 눌지마립간이 불교 수용에 소극적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토착신앙이나 기존 귀족들의 반발이 거세서, 왕실 불교로 정착하지 못한 것이다. 이후 신라에서 귀족들의 반발을 무마하고 불교를 공인하기까지는 100여 년이 걸렸고, 또 이차돈(異次頓)이라는 충신의 희생이 필요했다. 이처럼 민간에서 시작된 불교가 오랜 세월에 걸쳐 공인되는 과정 역시 고구려‧백제와는 다른 신라 불교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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