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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왕[東城王]

웅진 천도 후의 혼란을 수습하고 정치적 안정을 이루다

미상 ~ 501년(동성왕 23)

동성왕 대표 이미지

임류각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동성왕(東城王)은 백제의 제24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479년~501년이다. 백제는 웅진 천도 후 5년 동안 2번이나 왕이 교체되는 극심한 혼란을 겪었다. 동성왕은 이러한 정치적 혼란을 수습하고 왕권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말년에 측근정치를 강화하고 사비천도를 계획하면서 귀족들과 마찰을 빚었고, 그 과정에서 반대파의 핵심인 백가(苩加)에 의해 시해되었다.

2 동성왕의 가계와 즉위과정

동성왕은 이름이 모대(牟大)인데, 이름을 따서 모대왕(牟大王)이라고도 불린다. 그 외에 『삼국사기』에 마모(摩牟)라는 이름이 전하고, 『삼국유사』에는 마제(麻帝) 혹은 여대(餘大), 『일본서기』에는 말다(末多)라고 기록되어 있다. 시호는 동성왕이다. 삼근왕이 재위 3년 만에 죽자,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479년에 왕위에 올라 501년까지 23년간 백제를 다스렸다.

동성왕의 아버지는 곤지(昆支)이다. 곤지에 대해서는 개로왕의 아들이라는 기록과 동생이라는 기록이 전하는데, 대체로 동생으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문주왕(文周王)이 시해되고 그의 아들인 삼근왕(三斤王)이 13세의 나이로 즉위했지만, 삼근왕 역시 3년 만에 죽고 말았다.

곤지는 461년(개로왕 7)에 왜로 파견되어 476년경까지 15년 이상을 왜에 머물렀다. 『일본서기』의 기록에 의하면 왜에 가는 도중에 낳은 무령왕을 포함해 다섯 명의 아들을 낳았는데, 그 중 둘째가 바로 동성왕이다. 동성왕은 곤지가 백제로 돌아올 때 함께 귀국하지 않고 계속 왜에 머물렀다. 그러다가 삼근왕이 사망하자 축자국(築紫國)의 군사 5백과 함께 돌아와 왕위에 올랐다. 이 때 동성왕의 나이는 10대에 불과하였다.

동성왕이 어린 나이로 즉위할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인 곤지의 영향력이 컸다. 웅진 천도 후 백제의 혼란상은 해구(解仇)의 권력 농단에서 비롯되었다. 해구는 문주왕을 시해하고 어린 삼근왕을 옹립했으나, 곧이어 반란을 일으켰다. 이러한 해구의 전횡과 반란을 제압하기 위해 왕족과 귀족, 신진세력들이 힘을 모았는데, 이미 사망한 곤지와 그의 아들 모대(동성왕)는 그 구심점이 되었다. 게다가 왜의 동성왕 지지는 고구려의 위협 속에서 군사적 안정을 도모할 수 있는 한 방편이었다는 점에서 동성왕의 즉위는 힘을 얻을 수 있었다. 이렇게 국내외 지지세력의 도움으로 왕위에 오른 동성왕은 웅진 천도 후의 혼란을 수습하고 정치적 안정을 위해 노력할 수 있었다.

3 동성왕의 왕권 강화 정책

동성왕은 왜에서의 오랜 체류 등으로 국내 사정에 밝지 못했던 것 같다. 이에 자신의 즉위를 도왔던 진남(眞男), 진로(眞老)와 같은 진씨세력, 곤지를 지지하는 왕족, 그리고 사씨·연씨·백씨 등 신진세력을 적극 등용했다. 특히 재위 5년 이후 신진세력을 각종 좌평에 임명하기 시작하는데, 이것은 동성왕의 친정체제 구축 노력과 관련이 있다. 금강 유역에 토착적 기반을 가진 새로운 세력을 등용함으로써, 기존의 귀족에 대한 견제는 물론 두 세력 간 힘의 균형을 도모한 것이다. 왕의 중재에 기반한 지배세력의 다변화는 왕권의 안정을 이루는 중요한 정책이었다.

정치적 안정 속에서 동성왕은 왕도와 지방통치의 정비에 나섰다. 수도에 웅진교를 가설하고, 궁궐 동쪽에 임류각(臨流閣)을 지어 왕도로서의 위엄을 다졌다. 그리고 왕성 주변에 새로이 성을 쌓아 수도 방비를 강화했다. 새로 쌓은 성에는 신진세력을 배치함으로써 적극적인 지방지배를 꾀하였다. 특히 이 시기에 동성왕이 남제(南齊)에 보낸 표문에는 도한왕(都漢王)·팔중후(八中侯)·아착왕(阿錯王)·불사후(弗俟侯)와 같이 앞에 지명을 관칭한 왕·후의 존재가 나타난다. 백제의 왕후제 실시 여부와 성격, 실시지역 등에 대해서는 학자들의 주장이 매우 다양하다. 다만 이들이 기존의 지방통치를 보완하는 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신진세력에 의한 지방통치의 강화는 동성왕의 왕권 강화와 친정체제 구축에 큰 힘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동성왕은 사비(泗沘) 천도를 계획했다. 490년(동성왕 12)과 501년(동성왕 23) 3차례에 걸쳐 사비에서 수렵을 실시했는데, 이때부터 사비를 천도 후보지로 주목한 것으로 보인다. 고대 사회에서 천도는 정치적 중심의 이동과 지배세력의 재편을 의미하는 것이어서 필연적으로 기득권 세력의 반발을 동반한다. 그러므로 사비천도 계획은 그만큼 동성왕의 왕권 강화에 대한 열망이 강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4 동성왕대의 대외 정책

동성왕이 웅진 초기의 혼란을 수습하고 오랫동안 왕권을 유지할 수 있었던 또 다른 배경은 적극적인 대외정책의 추진이다. 당시 백제의 외교는 고구려 견제에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고구려의 남진 위협을 막고 예전의 위상을 되찾기 위해서라도 주변국과의 외교는 매우 중요했다.

동성왕은 484년(동성왕 6)에 남제가 고구려 장수왕(長壽王)을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에 책봉했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사신을 보냈다. 그리고 같은 해 7월에 내법좌평 사약사(內法佐平 沙若思)를 남제에 보냈는데 서해에서 고구려군에 의해 막혀 가지 못했다. 이처럼 동성왕의 남제에 대한 외교는 고구려를 염두에 둔 것이었다. 고구려 역시 이를 알아서 백제와 남제의 접근을 견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제는 계속해서 남제에 조공하고, 왕·후의 관작 제수를 요청하는 등 남제에 대한 외교를 강화해 나갔다.

왜는 동성왕이 태어나서 즉위하기 전까지 성장한 곳이다. 그리고 동성왕의 즉위를 지지하기도 했었다. 이로 인해 왜는 동성왕대 내내 백제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신라와의 나제동맹은 동성왕대에도 이어졌다. 고구려의 공격이 있으면 양국이 상호 군사적 지원을 하는 형태로 동맹이 유지되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주목되는 사실은 혼인동맹이다. 493년(동성왕 15, 소지마립간 15)에 동성왕이 신라에 사신을 보내 혼인을 청하자, 신라는 이벌찬 비지(伊伐飡 比智)의 딸을 보냈다. 동성왕은 비지의 딸과 혼인함으로써 나제동맹을 더욱 공고히 했다. 이로써 대외적으로는 고구려의 남진을 저지하고, 내부적으로는 왕비족의 득세를 막는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이와 같이 동성왕의 외교는 고구려를 의식한 것이었다. 482년(동성왕 4), 고구려가 말갈을 동원해 한산성(漢山城)을 습격했다. 그러자 동성왕은 이듬해 한산성을 방문하여 군사와 백성을 위문하였다. 이를 통해 백제가 고구려에게 빼앗겼던 옛 한성 지역을 빠르게 회복해 간 것을 알 수 있다. 백제의 영역 확장으로 고구려와의 사이에 긴장이 조성되었다. 동성왕은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 남제와 왜, 신라와의 우호적인 외교관계를 유지했다.

5 동성왕의 죽음과 정치적 평가

동성왕은 신구 세력의 조정을 통해 왕권을 강화했고, 나아가 친정 체제를 구축했다. 그러나 이것은 497년(동성왕 19), 연돌(燕突)을 병관좌평(兵官佐平)에 임명하면서부터 측근 정치로 변질되어, 소수의 측근을 통한 권력의 집중을 추구하게 된다. 측근들에 의해 언로가 막힌 동성왕은 가뭄이 들어도 백성들을 구휼하지 않고, 임류각에서 유희를 즐기면서 간언하는 신하들을 배척했다. 나라에는 자연재해가 계속되었고, 동성왕의 통치에 대한 부정적 인식도 확산되었다. 이런 상황이 동성왕이 사비 천도 계획과 맞물리면서 천도 반대 세력과 마찰을 빚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동성왕은 반대파의 핵심인 백가에게 가림성(加林城)을 지키도록 하였다. 그러나 웅진을 근거지로 하는 백가에게 부여 임천면으로 추정되는 가림성으로의 전출은 좌천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에 불만을 품은 백가는 자객을 보내 동성왕을 시해했다.

한편 동성왕의 시해에 대해서 『일본서기』는 다른 사실을 전하고 있다. 동성왕이 포학무도하여 국인(國人)들이 함께 제거했다는 것이다. 국인이란 동성왕의 왕권 강화 과정에서 배제된 귀족들로 생각되는데, 동성왕을 시해한 백가도 이에 포함한다. 최근에는 무령왕이 동성왕 시해 사건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하였고, 덕분에 동성왕이 죽자마자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는 주장도 주목된다.

동성왕이 추진한 왕권 강화 정책과 대외정책은 어느 정도 효과를 거두었다. 신구 귀족의 균형 속에서 백제의 정치와 왕권은 빠르게 안정을 되찾았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잃어버린 한성 지역도 일부 회복할 수 있었다. 반면 집권 말기 측근정치에 빠지고, 대규모 토목공사와 자연재해로 민심 이반을 겪으며 비극적 최후를 맞이한 것은 동성왕의 정치적 한계로 지적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성왕대의 안정은 이후 무령왕과 성왕대에 백제의 중흥을 이끄는 기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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