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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왕[東川王]

위(魏) 관구검(毌丘儉)의 침입을 물리치다

209년(산상왕 13) ~ 248년(동천왕 22)

동천왕 대표 이미지

위 관구검기공비(魏 毌丘儉紀功碑)

한국사데이터베이스(국사편찬위원회)

1 개요

동천왕은 고구려 제11대 왕이다. 동천왕은 당시 요동에서 세력을 떨치며 고구려를 위협하던 공손씨(公孫氏)를 위(魏)나라와 함께 멸망시켰다. 그러나 위와 국경을 마주하게 되면서 양국은 긴장관계로 접어드는데, 이를 타개하기 위해 서안평(西安平)을 선제공격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위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毌丘儉)의 대대적인 침입을 받았지만, 이를 물리치고 국력 회복에 힘썼다.

2 동천왕의 가계와 왕위계승

동천왕은 동양왕(東襄王)이라고도 한다. 이름은 우위거(憂位居)이고, 어릴 적 이름은 교체(郊彘)이다. 『삼국지(三國志)』 동이전(東夷傳) 고구려조에는 위궁(位宮)으로 기록되어 있다. 제10대 산상왕(山上王)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관나부(貫那部) 주통촌(酒桶村) 출신으로, 이름은 후녀(后女)라고 하나 성은 전하지 않는다.

동천왕의 출생과 관련하여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산상왕은 형인 고국천왕(故國川王)이 죽은 후, 고국천왕의 왕후인 우씨(于氏) 덕분에 왕위에 올랐다. 그래서 형의 부인인 우씨를 그대로 자신의 왕후로 삼았다. 하지만 산상왕과 우씨 사이에는 아들이 없어, 산천에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기도하곤 했다. 어느 날 꿈에서 하늘이 “내가 너의 소후(小后)에게 아들을 낳게 할 것이다.”라고 일러주었으나, 당시 산상왕에게는 소후가 없었다. 몇 년 후, 교제(郊祭, 천자가 교외에 단을 쌓고 천지에 지내는 제사)에 쓸 돼지가 달아나서 이를 잡으러 가다가 주통촌에 이르렀는데, 담당 관리가 잡지 못하는 것을 이 마을의 여인이 잡았다. 산상왕이 이것을 이상하게 여겨 여인의 집으로 찾아가 여자와 관계를 맺었다. 이후 주통촌 여자가 아들을 낳자 교제에 쓸 돼지로 인해 태어난 아이라 하여 아이의 이름을 교체(郊彘)라고 하고, 여자를 소후로 삼았다.

고구려의 왕들은 대대로 연나부(椽那部, 혹은 절노부) 출신의 왕비를 맞이해 왔다. 그럼으로써 연나부 세력을 계루부(桂婁部) 왕실의 협조자로 만들고, 이들을 이용해 왕권을 굳건히 하고자 했다. 그러다보니 연나부의 힘이 지나치게 강성해지는 문제가 발생했다. 우씨 왕후 역시 연나부 출신으로, 고국천왕과 산상왕 2대에 걸쳐 왕후가 되어 세력을 떨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산상왕이 주통촌 출신의 여자를 소후로 맞이한 것은 우씨를 위시한 연나부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주통촌 여자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동천왕이 왕위에 오름으로써 그 목적은 어느 정도 달성되었다.

213년(산상왕 17) 1월, 동천왕은 5살의 나이에 왕태자에 책봉되었다. 그리고 산상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는데, 당시 19살이었다. 227년부터 248년까지 31년간 고구려를 통치했다. 왕비에 대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고, 아들로는 동천왕이 태자 시절에 낳은 연불(然弗) 즉, 중천왕(中川王)이 있다. 그 외에 동천왕의 동생으로 예물(預物)과 사구(奢句)가 있었는데, 조카인 중천왕이 왕위를 이을 때 반란을 일으켰다가 처형되었다.

3 3세기 전반 요동지역의 정세

고구려는 태조왕(太祖王) 이래로 꾸준히 요동 경략을 추진해 왔다. 2세기 말, 후한(後漢)이 혼란에 빠지면서 요동지역에 대한 지배력이 약해지자, 중원의 혼란은 고구려에게 기회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틈을 타고 공손탁(公孫度)이 요동에 지방정권을 세우면서 오히려 고구려에게는 커다란 위협이 되었다.

공손씨가 현도군(玄菟郡)에 자리잡기 시작한 것은 공손탁의 아버지인 공손연(公孫延)이 처음 이곳으로 이주하면서부터였다. 공손탁 역시 처음에는 현도군의 하급관리에 불과했다. 그러다가 동탁(董卓)의 도움으로 요동태수(遼東太守)가 되었는데, 이를 계기로 공손씨는 본격적인 세력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 공손탁은 요동태수가 된 이듬해에 요서(遼西)와 중료(中遼)의 2개 군으로 나누고, 스스로 요동후 평주목(遼東侯 平州牧)이라 칭하며 자립하였다. 이때가 190년이었다. 이후에도 공손탁은 지속적으로 고구려를 공격했고, 서쪽으로 오환(烏桓)과 남쪽으로 동래(東萊)의 여러 지역을 점령하였다. 중원이 삼국시대의 혼란을 겪는 동안, 공손탁은 조조(曹操)로부터 무위장군(武威將軍)과 영녕향후(永寧鄕侯)로 임명받는 등 위(魏)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점차 세력을 넓혀가고 있었다.

당시 위는 촉(蜀)·오(吳)와의 대립이 본격화되면서, 표면적으로는 후방의 공손씨 정권과 유화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공손탁의 손자인 공손연(公孫淵) 때 오왕 손권(孫權)이 위를 견제하기 위해 공손씨 정권에 사신을 파견했다. 이때 공손연은 오의 사신을 죽여 위에 바침으로써 위와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위는 배후의 공손씨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위는 관구검(毌丘儉)을 내세워 요동 정벌을 단행했으나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다. 그러자 공손연은 스스로 연왕(燕王)을 칭하며 자립하여, 위와는 대립구도가 형성되었다.

이처럼 공손씨 세력이 강성해지자, 지속적으로 요동 진출을 도모하던 고구려에게는 커다란 위협이 되었다. 이런 점에서 고구려는 중원의 삼국 중 위와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부분이 있었다. 위는 공손씨를 제거하기 위해 우선 배후에 있는 고구려와 연결을 도모했다. 이에 234년(동천왕 8) 고구려에 사신을 보냈고, 동천왕은 이를 계기로 위와 화친관계를 맺었다. 그리고 2년 후인 236년(동천왕 10)에는 오가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했다. 그러나 동천왕은 5개월 동안이나 사신을 억류하다가 목을 베어 위나라로 보냄으로써 외교적으로 위를 선택했다. 238년(동천왕 12, 위 경초 1), 위의 사마의(司馬懿)가 4만의 군사를 이끌고 요동을 공격했는데, 동천왕도 천 명의 군사를 보내 힘을 보탰다. 이 정벌에서 공손연 부자가 피살됨으로써 공손씨 정권은 멸망하게 되었다.

고구려와 위에게 있어서 공손씨 정권이 큰 위협이 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동시에 양국 사이의 완충역할을 함으로써 고구려와 위의 직접적인 충돌을 막아주는 역할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공손씨 세력이 사라짐으로써 양국은 국경을 접하게 되었고, 팽팽한 긴장관계가 형성될 수밖에 없었다.

4 위나라 관구검의 침입

공손씨 정권의 멸망으로 고구려와 위의 관계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전통적으로 고구려는 요동 진출을 염원했고, 위는 반대로 요동을 넘어 고구려 쪽으로 세력을 확장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위는 고구려 몰래 해로를 이용해 낙랑(樂浪)과 대방(帶方)을 공격했다. 그리고 대방군이 동예(東濊)와 한강 유역의 여러 토착국가들을 치도록 함으로써, 배후에서 고구려를 견제했다. 이렇게 후방을 위협받게 된 고구려는 이에 대한 보복조치로서 요동의 서안평현(西安平縣)을 공격하였다. 이때가 242년(동천왕 16)이었다.

압록강 하구에 위치한 서안평은 당시 낙랑·대방과 요동을 잇는 주요 통로로, 고구려가 요동으로 진출하기 위한 길목에 해당하는 곳이었다. 반대로 위의 입장에서 서안평의 상실은 낙랑·대방은 물론이고, 요동까지 직접 공격을 받을 수 있는 요충지를 잃게 되는 셈이었다. 게다가 만약 고구려가 남쪽의 오(吳)와 손을 잡게 된다면, 위로서는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이에 위는 삼국 전쟁에 전념하기 위한 사전작업으로서, 고구려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단행하게 된다.

위는 유주자사 관구검을 보내 고구려를 공격했다. 관구검의 공격 시점은 『삼국사기』와 『삼국지』 「위관구검기공비」가 다르게 전하고 있는데, 후자의 기록에 따라 244년(동천왕 18, 위 정시(正始) 5)으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초기의 전황은 고구려 측에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동천왕이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비류수(沸流水)와 양맥(梁貊)의 계곡에서 연달아 승리를 거둔 것이다. 그러나 관구검은 요동의 지리와 사정에 밝은 사람이었다. 관구검의 방형 진[方陣]에 막혀 고구려군은 대패하고, 동천왕은 압록원(鴨綠原)으로 달아났다. 그러자 관구검은 환도성(丸都城)을 함락시키고 많은 사람들을 죽이거나 포로로 잡은 후 본국으로 돌아갔다. 이 때가 245년(동천왕 19, 위 정시 6) 5월이었다.

위는 얼마 지나지 않아 고구려에 다시 군대를 보냈다. 관구검의 지휘 아래 현도태수(玄菟太守) 왕기(王頎)는 환도성을 거쳐 북옥저 일대를 공격했고, 낙랑태수(樂浪太守) 유무(劉茂)와 대방태수(帶方太守) 궁준(弓遵)은 동예(東濊) 지역을 공격했다. 고구려 뿐 아니라, 고구려의 영향 하에 있던 지역까지 대대적으로 공격함으로써 고구려에 대한 압박 수위를 높여갔다. 이에 환도성이 재차 함락되었고, 동천왕은 또 다시 피난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동천왕은 밀우(密友)의 결사대가 추격병과 싸우며 시간을 벌어준 덕분에 겨우 남옥저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위군이 남옥저까지 추격해 오자, 유유(紐由)가 거짓으로 항복하고는 위나라 장수의 가슴을 칼로 찌르는 계책을 발휘했다. 장수를 잃은 위군이 혼란에 빠지자 이 틈을 타 동천왕이 공격을 개시했고, 마침내 위군은 후퇴하고 말았다. 그 때가 246년(동천왕 20, 위 정시 7)이었다.

여기에서 동천왕의 피난처와 위군의 주체에 대해서는 사료에 따라 견해가 엇갈린다. 『삼국지』에는 동천왕의 피난처가 매구(買溝), 즉 북옥저 지방이고, 왕을 추격한 사람은 현도태수 왕기라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 왕기의 공격 루트가 환도성을 거쳐 북옥저로 추정되므로, 동천왕의 피난처와도 일치하여, 오랫동안 주류 학설로 인정되어 왔다. 반면 『삼국사기』는 고구려의 입장에서 자체 원전을 근거로 자세히 기록한 것이므로, 남옥저설을 인정해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이러한 견해에 입각하여, 위군이 동천왕에게 패한 후 낙랑으로 퇴각했다[遂自樂浪而退]는 해석을 근거로 위군 장수의 정체를 낙랑태수 유무로 추정하기도 한다.

관구검의 고구려 침입 경과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존재하고 있지만, 침입의 1차적인 목적이 242년의 서안평 공격에 대한 보복이었다는 점에서는 견해가 일치한다. 고구려는 전통적으로 전략적 요충지인 요동을 차지함으로써 국가적 발전을 도모해 왔다. 서안평 공격 역시 이러한 대외정책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삼국 간의 항쟁에서 주도권을 장악하고, 나아가 천하를 통일하려는 위에게 커다란 위협이 되었다. 때문에 본격적인 전쟁에 앞서 배후를 안정시키기 위해 관구검을 앞세워 대대적인 공격을 단행했던 것이었다. 3년에 걸친 전쟁을 치른 끝에 위의 군대는 물러났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고구려 측의 피해가 막심했고, 요동 진출을 위한 동력도 크게 상실되었다. 결과적으로 고구려의 요동 공략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5 국력 회복 노력과 동천왕의 죽음

관구검의 침입으로 고구려는 왕이 옥저 지방까지 피신하고, 수도인 환도성을 함락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군사적 피해는 물론, 인적‧물적 수탈도 극심해서 백성들의 생활이 피폐해졌다. 고구려와 위의 전쟁을 살펴보면, 초반에는 고구려가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하지만 초반의 연전연승은 오히려 고구려에게 독이 되었다. 심리적 해이와 전략적 판단 오류로 큰 패배를 당하고, 수도가 함락되는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위기도 밀우와 유유 같은 충신들의 활약으로 극복할 수 있었다.

고구려는 위와의 전쟁에서 5천의 철기병과 2만의 보기(步騎)를 동원할 정도로 강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비록 어려움을 겪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위의 군대를 몰아낼 정도로 당시 고구려는 저력이 있었다. 이러한 저력을 바탕으로 동천왕은 신속히 전후 복구에 나서게 된다.

관구검의 침입에서 가장 큰 피해를 당한 곳은 환도성이었다. 환도성은 도읍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할 정도로 황폐화되었다. 수도로 돌아온 동천왕이 가장 먼저 취한 조치는 새로 평양성(平壤城)을 쌓고, 종묘‧사직과 백성들을 옮기는 것이었다. 이때의 평양성은 장수왕이 천도한 평양성과는 별개의 성으로, 국내성에서 그리 멀지 않은 지역으로 추정된다. 비록 인근 지역이라고 하더라도, 고대 사회에서 성을 쌓고 수도를 옮기는 것은 매우 어려운 결정이다. 많은 재원과 노동력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지배세력들의 이해관계가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동천왕이 이렇게 빠른 결정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은, 전후 복구에 대한 지배세력과 백성들의 지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지는 관구검의 침입에 대한 고구려인들의 위기감과 자부심이라는 양가적 감정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동천왕은 국력 회복을 위해 의욕적으로 노력했지만, 3년 만에 사망하고 말았다. 동천왕에 대한 백성들의 지지는 사후에도 이어졌다. 동천왕을 따라 죽으려는 신하가 많아서 중천왕이 이를 금지시킬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례일에는 무덤가에 와서 스스로 죽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고구려 사람들이 땔나무를 떼어 이들의 시체를 덮어주었기 때문에 그곳을 시원(柴原)이라 이름하였다. 현재 평안남도 강동군에는 한왕묘(漢王墓) 혹은 황제묘(皇帝墓)라 불리는 무덤이 있는데, 강동군의 읍지인 『오주지(吳州志)』에는 이 고분이 동천왕릉이라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무덤 양식으로 볼 때 후대인 5~6세기의 것으로 추정되어, 동천왕릉이라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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