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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武寧王]

백제, 다시 강국이 되다

462년(개로왕 8) ~ 523년(무령왕 23)

무령왕 대표 이미지

무령왕릉 내부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무령왕(武寧王)은 백제의 제25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501년~523년이다. 재위 기간 동안 담로제(擔魯制)를 실시하여 지방통치를 강화하고, 백성에게 귀농과 정착을 장려하여 농민층의 안정을 이루었다. 그리고 고구려와 가야 지역에 진출하여 영역을 넓혔으며, 중국과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이로써 무령왕은 양(梁)에 보낸 국서에서 “(백제가) 다시 강국이 되었다”라고 천명할 정도로 백제 중흥의 기반을 마련했다.

2 무령왕의 탄생과 즉위과정

무령왕의 성은 부여(扶餘)이고, 이름은 사마(斯麻) 혹은 융(隆)이다. 이름을 따서 사마왕이라고도 한다. 『일본서기』에는 도군(嶋君)이라고도 기록되어 있다. 시호는 무령이다. 무령왕릉 출토 지석에 의하면 462년(개로왕 8)에 태어났다. 501년(동성왕 23)에 동성왕(東城王)이 시해되자 40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고, 523년 사망 시까지 23년간 나라를 다스렸다.

무령왕의 아버지에 대해서는 사료에 따라 다양한 주장이 있다. 동성왕의 둘째 아들이라는 설, 개로왕(蓋鹵王)이 생부이고 곤지(昆支)는 의붓아버지라는 설, 마지막으로 곤지의 첫째 아들이고 동성왕은 그의 이복 아우라는 설 등이다. 그러나 무령왕릉 출토 지석의 사망연대를 역으로 계산하고, 여러 사료들을 비교 검토한 결과 현재는 곤지의 장남이자 동성왕의 이복형으로 이해되고 있다. 곤지는 왜에 가던 도중에 축자(築紫)의 각라도(各羅嶋)에서 무령왕을 낳았다. 섬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이름을 도군(嶋君)이라 하고, 곧바로 배에 태워 백제로 돌려보냈다고 한다.

백제에 돌아와서 즉위하기까지 무령왕에 관한 기록은 전무하다. 다만 한성 함락에서 살아남은 것으로 보아, 개로왕과 함께 왕궁에서 거주하지는 않은 듯하다. 그러다가 곤지가 귀국하면서 아버지를 도와 국내 정치에 참여했을 것으로 보인다. 무령왕이 다시 문헌기록에 등장하는 것은 동성왕이 시해되면서부터이다. 동성왕 시해를 주도한 백가(苩加)는 무령왕 즉위 직후 반란을 일으켰다가 무령왕에 의해 곧바로 진압당하고 만다. 40세의 노련한 무령왕은 정치적으로 동성왕의 죽음과 자신의 즉위를 이끌어내면서 자연스럽게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했고, 이를 바탕으로 다양한 개혁정책을 펼쳐 나가게 된다.

3 무령왕대의 국내 정치

동성왕은 신진 세력을 등용해 친정체제를 구축해 나갔지만, 말년에 측근정치로 변질되면서 시해를 당했다. 이런 과정을 지켜본 무령왕은 동성왕을 반면교사로 삼아 신구 귀족의 세력균형을 꾀하였다. 백가의 난을 평정한 해명(解明)과 무령왕 후반기에 보이는 인우(因友)·사오(沙烏) 등은 구귀족과 신귀족의 대표 세력이라고 할 수 있다. 신진귀족의 중앙 진출은 동성왕대부터 본격화되었는데, 무령왕대에 이르러 그 수가 더욱 증가했다. 이에 무령왕은 좌평직을 개편하여 상좌평·중좌평·하좌평·대좌평 등으로 분화하였다. 이로써 같은 좌평이라고 하더라도 그 안에서 서열이 다시 정해졌다. 무령왕은 늘어난 귀족세력을 통제하기 위해 국왕 중심의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리고 즉위 초부터 왕족을 대외전쟁과 지방통치에 적극 활용하였다. 무령왕대에는 22개의 담로가 있어 지방통치를 담당했는데, 담로의 책임자로 “자제종족(子弟宗族)” 즉, 왕족들을 파견한 것이다. 왕족의 지방 파견으로 지방 토착세력은 중앙의 통치질서 안으로 편입되었다. 이로써 무령왕의 왕권은 한층 강화되었다.

한편 웅진 천도의 혼란 속에서 극심한 자연재해가 발생하면서 일반 백성들의 혼란은 가중되고 있었다. 자연재해는 동성왕과 무령왕대에 가장 심각했는데, 가뭄과 홍수가 계속되고 이로 인해 도적과 전염병도 창궐했다. 무령왕은 백성들의 유망을 막기 위한 근본적인 대책으로 유망민을 강제로 정착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제방을 축조해 자연재해에 대비하고, 유민들에게 농사를 짓도록 한 것이다. 이 같은 귀농정책으로 조세수취와 노동력의 기반이 확대되었고, 사회적 혼란도 점차 진정되었다.

4 무령왕대의 대외 관계

무령왕대 대외관계의 가장 큰 특징은 고구려에 대한 입장이 공세적으로 전환되었다는 점이다. 무령왕은 즉위하자마자 우영(優永)을 보내 고구려 수곡성(水谷城)을 공격했다. 고구려가 말갈을 동원해 백제를 공격하자 목책을 설치하고 성을 새로 쌓는 등 방비를 튼튼히 했다. 또한 무령왕이 직접 출정하여 고구려의 공격을 막아내는 등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다소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 이때 양국이 전쟁을 벌인 고목성(高木城), 장령성(長嶺城), 횡악(橫岳), 쌍현성(雙峴城) 등지는 한강 유역에 위치하고 있다. 그러므로 무령왕대에 백제는 어느 정도 한강 유역에 대한 영유권을 확보하고 있었다고 하겠다.

무령왕이 고구려와의 전쟁을 수행할 때 나제동맹의 당사자인 신라는 백제를 지원하지 않았다. 당시 신라는 지증왕(智證王)이 즉위한 이후 고구려와의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하던 상황이어서 백제와 고구려의 충돌에 개입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521년(무령왕 21, 법흥왕 8) 백제가 양(梁)에 사신을 보낼 때 신라 사신이 여기에 동행할 정도로 나제동맹은 여전히 유효했다.

무령왕은 대내외의 안정을 바탕으로 가야 지역을 적극 공략했다. 『일본서기』에는 백제가 왜에게 임나 4현(任那四縣)을 할양받고, 기문(己汶)과 대사(帶沙) 지역을 사여받았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들 지역은 현재의 섬진강 유역에 해당한다. 일본의 입장에서 할양과 사여의 주체를 왜로 기록한 것을 제외하면, 이것은 백제가 섬진강 유역을 영토로 편입한 것을 의미한다. 이로써 백제는 대가야로 진출하는 교두보를 확보하게 된다.

무령왕은 고구려전에서 우위를 확보하고, 남북으로 영역을 확대하면서 자신감을 가졌다. 이 자신감은 521년(무령왕 21) 양에 보낸 표문에 극명히 드러난다. 백제가 여러 차례 고구려를 격파하여 마침내 다시 강국이 되었다고 선언한 것이다. 이에 대해 양은 무령왕을 사지절 도독백제제군사 영동대장군(使指節 都督百濟諸軍事 寧東大將軍)으로 책봉함으로써 무령왕과 백제의 국제적 지위를 공인해 주었다. 이로써 무령왕은 웅진천도 후의 혼란을 극복하고, 대내외적으로 예전의 위상을 되찾을 수 있었다.

5 무령왕릉과 백제 문화의 성격

무령왕릉은 1971년 송산리 고분군의 배수로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발견되었다. 덕분에 도굴의 피해 없이 완전한 형태로 조사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 무령왕릉 발굴조사에서 가장 큰 성과는 무덤의 주인공이 밝혀졌다는 점이다. 내부에서 발견된 지석을 통해 무령왕은 523년 5월에 사망해 525년 8월 무덤에 안치되었고, 왕비는 526년 11월에 사망하여 529년 2월에 안치되었음이 밝혀졌다. 이로써 왕릉의 묘제와 출토유물에 절대 편년이 가능해졌고, 무령왕릉은 이후 다른 유적과 유물의 연대 추정에 기준이 되었다. 그리고 현재까지 무덤의 주인공이 확인된 유일한 고대 왕릉으로서 그 가치를 더하고 있다.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유물은 총 4,600여 점에 이른다. 무덤 입구인 널길에서 석수(石獸)와 청자육이호(靑瓷六耳壺), 오수전(五銖錢) 등이 지석과 함께 발견되었다. 관 안에서도 목침과 족좌(足座)를 비롯, 동경(銅鏡)과 관 장식, 귀고리, 팔찌, 신발 장식 등 다양한 장신구가 확인되었다. 이 유물들은 백제의 문화와 기술이 응축된 것으로, 화려하고 세련된 아름다음의 절정을 보여준다.

무령왕릉은 당시 백제 문화의 국제성을 드러내고 있기도 하다. 벽돌무덤이라는 형식 자체가 당시 중국 남조에서 유행하던 묘제였다. 무덤을 수호하는 진묘수(鎭墓獸) 역할을 했던 석수와 중국제 청자육이호와 청자등잔의 존재도 백제와 남조의 활발한 교류를 보여준다. 그리고 일본산 금송(金松)으로 만든 목관을 통해 왜와의 밀접한 관계 역시 짐작할 수 있다. 최근에는 무령왕릉 출토 유리구슬에 사용된 납이 태국에서 생산되었음이 밝혀졌다. 또한 왕비 관장식의 꽃무늬와 인도 산치탑 난간 무늬와의 유사성이 지적되기도 했다. 이처럼 백제는 동아시아를 넘어 동남아시아·인도와 교류하는 국제성을 띠고 있었고, 더불어 선진 문화를 수용하여 백제화하는 주체성도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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