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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왕[武王]

백제 땅에 미륵의 불국토를 구현하고자 하다

미상 ~ 641년(무왕 42)

무왕 대표 이미지

무왕 표준영정

전통문화포털(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정보원)

1 개요

무왕(武王)은 백제의 제30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600년~641년이다. 또한 서동설화의 주인공이다. 정치조직을 개편하고, 왕흥사와 미륵사를 창건함으로써 정치·사상적으로 왕권을 강화했다. 대외적으로는 신라를 견제하기 위해 고구려와 수·당, 왜와 화친과 견제의 적절한 국제관계를 유지했다.

2 무왕의 즉위과정과 서동설화

무왕의 성은 부여(夫餘), 이름은 장(璋)이고, 여장(餘璋)이라고도 한다. 『삼국유사』에는 무강왕(武康王)·헌병왕(獻丙王)이라는 이칭도 기록되어 있다. 아버지는 제29대 법왕이다. 하지만 서동설화에서는 어머니가 연못의 용과 관계하여 낳았다고 전한다. 그리고 이에 따르면 무왕의 부인은 진평왕의 셋째 딸인 선화공주이다. 그런데 익산 미륵사지 서탑에서 발견된 금제사리봉안기(金製舍利奉安記)에는 무왕의 부인이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딸로 나와 있어 서동요의 내용이 역사적 사실이라기보다는 설화적 구성임을 확인하게 되었다. 왕이 즉위한 이듬해인 600년(법왕 2)에 죽자 왕위에 올라, 641년까지 42년간 백제를 다스렸다.

무왕의 출생과 성장에 대해서는 『삼국유사』의 서동설화가 가장 자세하다. 어머니는 서울의 남지(南池) 가에 집을 짓고 살던 과부였는데, 연못의 용과 관계하여 무왕을 낳았다. 항상 마를 캐다 팔아서 생계를 유지했으므로 이름을 서동(薯童)이라 하였다. 서동은 진평왕의 셋째 딸인 선화공주가 아름답다는 소문을 듣고 아이들에게 노래를 지어 부르게 해 선화공주를 아내로 맞았다. 서동은 마를 캐던 곳에 쌓여 있던 황금을 지명법사(知命法師)의 도움으로 진평왕에게 보냈다. 진평왕은 서동의 신통함을 특별히 여겨 관심을 가졌고, 이로 인해 인심을 얻은 서동이 왕위에 올랐다고 한다.

물론 서동설화의 내용을 글자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이에 대해서 연못의 용은 법왕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고, 가난한 어머니는 그녀가 무왕의 정비가 아닌 것을 의미한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반면에 용은 몰락한 왕족을 의미하며, 그러므로 무왕은 법왕의 아들이 아니라는 정반대의 주장도 있다. 그러나 여러 기록을 종합해 볼 때, 무왕은 혜왕에서 법왕, 그리고 무왕까지 부자관계로 이어지는 정통성을 가진 인물로 보는 것이 대체적인 견해이다. 그러나 앞선 두 명의 왕이 재위기간 2년을 채우지 못하고 사망했기 때문에, 왕위계승 과정에서 혼란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서동설화에 보이는 기이한 출생과 불우한 성장과정, 선화공주와의 혼인 등은 이러한 어려움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3 무왕대의 국내 정치

서동설화에서 알 수 있듯이, 무왕은 법왕의 아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즉위 과정에서 우여곡절을 겪었다. 그 어려움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기록이 없어 확실히 알기 어렵다. 다만 대성8족이라고 불리던 귀족들의 견제가 원인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법왕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피살 가능성을 제기하는 주장도 같은 맥락이다.

귀족들의 견제 속에서 무왕은 왕권 강화를 위해 노력했는데, 그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이 바로 602년(무왕 3)의 아막성전투(阿莫城戰鬪)였다. 좌평 해수(解讐)는 기병 4만을 거느리고 신라의 아막성(전라남도 남원시 운봉면)을 공격했지만 참패하고 혼자만 살아 돌아왔다. 아막성전투를 주도했던 귀족들은 인적·물적으로 큰 타격을 입고 혼란에 빠졌다. 무왕은 이를 기회로 삼아 친왕세력을 대거 등용하면서 자신의 권력을 강화해 나가기 시작했다.

무왕은 이전의 행정조직을 유지하면서도 기존의 좌평을 6좌평제로 전환시켰다. 그리고 이들을 22부사(部司)의 장(長)으로 임명하고 구체적인 임무를 부여함으로써 좌평을 행정관료로 편제했다. 이로써 중앙의 정치구조는 국왕 중심으로 재편되었고, 상대적으로 귀족들의 힘은 약해졌다.

630년(무왕 31), 높아진 왕의 권위를 드러내기 위해 무왕은 사비의 궁궐을 수리했다. 이듬해에는 장자인 의자(義慈)를 태자로 책봉했다. 후계 계승을 명확히 함으로써 왕위계승에 대한 귀족들의 간섭을 차단한 것이다.

또한 무왕은 왕권 강화를 위해 불교를 적극 활용했는데, 왕흥사와 미륵사 창건이 대표적인 예이다. 왕흥사는 위덕왕(威德王) 때 처음 창건되었다. 그러다가 법왕 때 대대적으로 중창을 시작해서 34년만인 634년(무왕 35)에 완공되었다. 왕흥사는 말 그대로 왕과 왕실이 흥하기를 바라는 일종의 호국사찰이었다. 그리고 639년(무왕 40)에 창건된 미륵사는 현재 확인된 백제 사찰로는 최대 규모이다. 미륵사는 무왕과 왕비가 용화산 아래의 연못에서 미륵삼존(彌勒三尊)을 만난 것을 계기로 지어졌는데, 이것은 불교에서 전륜성왕(轉輪聖王)이 성불한 미륵을 맞이하러 용화수 아래로 갔다는 이야기와 통한다. 즉, 무왕은 미륵사를 창건해 스스로를 전륜성왕과 일치시킴으로써 자신의 위상을 높이려 했던 것이다.

이처럼 무왕은 즉위 초 전쟁으로 정국 주도의 계기를 마련하고, 이후 정치구조의 재편과 사상적 무장으로 꾸준히 왕권을 강화해 나갔다. 무왕 말기에는 궁남지(宮南池)를 조성하고, 대왕포(大王浦)와 망해루(望海樓) 등에서 잔치를 베푼다. 이 또한 단순한 연회가 아니라, 왕의 권위를 과시하려는 일종의 통치행위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 같은 무왕 말기의 정국 운영을 “전제왕권의 확립”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4 무왕대의 대외관계

무왕은 대내적 안정을 기반으로 대외관계를 전개한다. 특히 신라와는 치열한 전쟁을 치른다. 앞서 성왕(聖王)은 힘들게 회복한 한강유역을 진흥왕의 배신으로 신라에게 다시 빼앗겼다. 그리고 562년(진흥왕 23) 신라가 대가야를 멸망시킴으로써 이 지역에 대한 지배권도 상실했다. 이로써 백제는 신라에 의해 둘러싸인 형국이 되었다. 이에 백제는 먼저 대가야지역 진출을 노리고 무왕 즉위 3년 만에 아막성을 공격했다. 이때의 공격은 좌평 해수를 필두로 귀족층이 주도했는데, 4만의 군대가 참패하면서 실패하고 말았다. 이후 왕권을 강화해 나가던 무왕은 624년(무왕 25)에 속함성(速含城. 경상남도 함양군) 등 6성을 공격해 빼앗았다. 이로써 소백산맥을 넘어 함양, 거창, 산청 지역을 확보하고 가야 지역 진출의 교두보를 마련하였다.

한편 무왕은 가잠성(椵岑城)을 세 차례나 공격하여 한강유역으로 진출하고자 했다. 가잠성은 경기도 안성군 죽산면으로 추정되는데, 한강으로 진출하는 길목에 있었다. 무왕은 가잠성을 일시 회복했으나 다시 신라에 빼앗기고 말았다. 627년(무왕 28)에는 한강 유역을 회복하고자 크게 군대를 일으켜 웅진성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신라 진평왕이 당에 도움을 요청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만두었다. 이 해에 조카 복신(福信)이 당에 사신으로 갔다가 신라와 화목하게 지내라는 당 태종(太宗)의 조서를 가지고 돌아왔다. 그러나 무왕은 겉으로만 순종할 뿐 속으로는 원수지간으로 여겼다고 한다. 백제의 신라에 대한 감정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처럼 백제의 한강 유역 진출은 좌절되었지만, 무왕은 신라와의 변경 지역에 다수의 성을 쌓으면서 지속적으로 신라와의 전쟁을 대비하고 있었다.

무왕의 대고구려 정책은 수와 당을 이용하는 일종의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이었다. 607년(무왕 8)에 무왕이 수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 공격을 요청하자, 이를 안 고구려가 백제를 공격했다. 무왕은 611년(무왕 12)에도 수 양제(煬帝)의 고구려 공격 계획을 알고 군기(軍期)를 청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전쟁이 일어나자 아무런 군사적 움직임을 취하지 않는 양단책을 사용했다. 이렇게 볼 때, 백제가 고구려를 적대시 했다고 보기는 어려울 듯하다. 오히려 신라와의 전쟁에 전념하기 위해 중국을 이용해 고구려를 견제하는 전략을 구사한 것으로 보인다.

무왕은 왜(倭)와는 기존의 우호관계를 유지하고자 했다. 그러나 당시 왜의 집권자였던 쇼토쿠태자(聖德太子)가 왜의 독자성을 강조하면서, 수와 독자적 외교를 하고 백제와는 거리를 두려 했다. 이에 대한 불만으로 백제는 이른바 ‘국서탈취사건’을 일으킨다. 608년(무왕 9), 당에 갔다가 돌아가는 왜의 사신이 백제를 지날 때, 백제인이 수 황제의 국서를 빼앗은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양국의 관계는 악화되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631년(무왕 32)에 무왕의 손자인 풍장(豊璋. 부여풍)이 왜에 질자(質子)로 가게 된다. 풍장은 백제 멸망 후 부흥운동군에 의해 왕으로 추대되어 귀국하는데, 그때까지 30년을 왜에 체류하며 양국의 우호적 관계를 주도했다.

무왕대 대외관계의 1차적인 목적은 신라에 대한 보복이었다. 억울하게 잃어버린 한강 유역과 가야지역을 회복하기 위해 전쟁도 불사했다. 고구려나 중국·왜와의 관계는 신라와의 전쟁에 집중하기 위한 부수적인 차원이었다. 이러한 정책은 의자왕대에 이르면 백제와 고구려가 연합해 신라를 공격하는 형태로 발전하게 된다.

5 무왕의 익산 경영과 미륵사

익산에는 무왕과 관련한 많은 유적들이 남아 있다. 왕궁으로 추정되는 왕궁리유적(王宮里遺蹟)을 비롯해서 왕궁의 내불당(內佛堂) 역할을 하던 제석사지(帝釋寺址), 무왕과 왕비의 무덤이라고 전해지는 쌍릉(雙陵) 등이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유적은 바로 미륵사지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무왕과 왕비인 선화공주는 용화산 사자사의 지명법사를 찾아가는 길에 산 아래 큰 못가에서 미륵삼존이 나타나는 것을 보았다. 이에 지명법사의 신력으로 하룻밤 사이에 연못을 메우고 절을 지었는데, 절 이름을 미륵사라 했다고 한다.

이처럼 익산에는 왕궁 추정지나 대형 호국사찰, 왕릉급 무덤 등 백제의 핵심도시였다고 볼만한 유적들이 많이 남아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에는 무왕과 익산의 관련성을 알려주는 기사가 거의 없다. 그렇다면 익산 천도는 실제로 이루어진 것인가? 이와 관련해서는 다양한 주장이 있다. 실제로 천도가 이루어졌다고 보기도 하고, 익산으로 천도했다가 사비로 다시 환도했다고 보기도 한다. 그리고 천도를 추진했으나 귀족들의 반대로 실천할 수 없었다는 주장도 있다. 반면에 천도 사실 자체를 부정하면서 별도의 수도 즉, 별도(別都)라고 주장하거나, 왕도의 5부(部)에 준하는 별도의 부(部) 즉, 별부(別部)로 보아 수도 행정구역의 일부로 보기도 한다. 현재로서는 천도를 추진했지만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는 주장이 가장 유력하다.

익산 천도에 관한 어떤 주장이라도 무왕이 익산을 중시했다는 점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무왕이 익산을 중요시한 이유는 이곳이 대가야지역 진출을 위한 교통상·군사상의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배후에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다는 경제적 이점도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서동설화가 보여주듯 익산이 바로 어린 시절 무왕의 생활터전이었다는 점이다. 이곳에 궁궐과 미륵사를 창건함으로써 미륵불국토를 구현하려 했던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가 전륜성왕이 되어 자신의 위상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고자 했다. 하지만 무왕의 익산 천도는 630년(무왕 31) 사비궁 수리와 함께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2009년 미륵사지 서탑 해체복원 과정에서 금제사리봉안기가 발견되었다. 봉안기에 따르면 미륵사를 창건하고 사리를 봉안한 사람은 무왕의 왕비인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딸이고, 사리를 봉안한 시기는 기해년(639)이라고 한다. 미륵사의 창건이 왕비인 선화공주의 발원으로 이루어졌다는 서동설화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다. 이로 인해 서동설화와 사리봉안기의 내용적 모순을 둘러싼 다양한 해석이 제기되었다.

현재로서는 두 기록을 절충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중론이다. 선화공주가 무왕의 첫 번째 왕비이고, 선화공주 사망 후에 사택왕후를 후비(後妃)로 맞았다고 보는 것이다. 미륵사의 건립 주체도 무왕이 주도하되, 그 과정에서 선화공주와 사택왕후가 단계적으로 조성했다고 본다. 미륵사는 동원과 서원, 중원에 각각 하나씩의 탑과 금당이 자리하고 있는 3원식 가람형태로, 중창을 완료하기까지 34년이 걸렸다. 따라서 미륵신앙을 토대로 한 중원은 선화공주가 먼저 조성하고, 후에 동원과 서원은 법화신앙을 토대로 사택왕후가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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