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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왕[文武王]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文武王), 신라의 수호룡이 되다

미상 ~ 681년(문무왕 21)

문무왕 대표 이미지

문무왕 표준영정

전통문화포털(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정보원)

1 개요

문무왕(文武王, ?~681)은 신라 제30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661년~681년이다. 아버지 태종무열왕이 시작하였지만 완수하지 못한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하였다. 그가 완성한 삼국통일은 단순한 영토의 병합에 머무르지 않고, 고구려와 백제를 아울러 하나의 통합된 국가를 만들어낸 것이라 할 수 있다. 또 그는 죽음에 임해서도 나라를 생각하였고, 결국 죽은 이후에 동해의 용이 되어 신라를 수호했다고 전해진다.

2 가계와 생애

문무왕은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김춘추(金春秋)의 장남으로 본명은 김법민(金法敏)이다. 그의 집안은 진흥왕(眞興王)의 둘째 아들 진지왕(眞智王)의 직계로 진골(眞骨) 골품을 가지고 있었다. 아버지 태종무열왕이 진골로는 처음 왕위에 올랐고, 그 이후에는 태종무열왕 직계가 계속 왕위에 올랐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는 태종무열왕 직계가 왕위를 계승한 시기를 중대(中代)라 부르며 신라의 최전성기로 인식하기도 하였다.

어머니는 소판(蘇判) 김서현(金舒玄)의 둘째 딸이며 김유신(金庾信)의 누이인 문명부인(文明夫人) 김문희(金文姬)이다. 형제로는 김인문(金仁問), 김문왕(金文王), 김인태(金仁泰), 김노차(金老且), 김지경(金智鏡), 김개원(金愷元), 김개지문(金皆知文), 김거득(金車得), 김마득(金馬得) 등이 있고, 누이로 고타소랑(古陀炤娘), 요석공주(瑤石公主), 지소부인 김씨(智炤夫人 金氏)가 있었다. 왕비는 파진찬(波珍湌) 선품(善品)의 딸 자의왕후(慈儀王后)로, 둘 사이에서 태어난 신문왕(神文王)이 태자가 되어 그의 사후 왕위를 이었다.

그는 용모가 매우 뛰어났고 총명하며 지혜가 많았다고 한다. 650년(진덕여왕 4)에 당으로 건너가, 나당 군사동맹이 잘 유지되는데 많은 역할을 하면서 정치적 입지를 다져갔다. 아버지가 왕으로 즉위한 직후에는 4등 관등 파진찬(波珍湌) 지위를 받고 군사 업무를 총괄하는 병부령(兵部令)이 되어 부왕을 보좌하였다가, 655년(태종무열왕 2)에는 태자(太子)로 책봉되었다. 태자로 책봉된 이후에도 여러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는데, 특히 아버지의 숙원이라 할 수 있는 삼국통일의 첫걸음인 백제 정벌 전쟁에 참가하여 큰 공을 세웠다.

아버지가 백제 정벌 직후인 661년 6월 사망하자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문무왕은 왕이 된 이후 지속적으로 전쟁을 수행했다고 할 수 있다. 백제부흥운동 격퇴와 고구려 정벌, 그리고 삼국통일전쟁의 마지막 일전인 나당전쟁이 연이어 벌어졌는데, 그는 뛰어난 역량을 발휘하고 여러 동생들과 김유신(金庾信) 등 측근들의 도움을 받아, 이 모든 전쟁에서 최종적으로 승리를 거두고, 아버지가 미처 완료하지 못한 삼국통일을 완수하였다. 아울러 삼국을 통일하여 보다 발전한 신라에 걸맞게 왕궁을 포함한 수도의 수리와 정비, 각종 관제의 개편 및 정비들을 수행하였다.

그는 수많은 업적을 남기고, 681년 7월 1일 사망하였는데 죽는 순간까지도 신라를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장례를 간략히 치룰 것과 국정이 잘 이루어질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기울일 것을 당부하는 유조(遺詔)를 내렸다. 또 자신을 동해 바다 입구의 큰 바위에 장사지내라고 유언하였는데, 대왕암(大王岩)이라고도 부르는 사적 제158호 경주 문무대왕릉(慶州 文武大王陵)이 그 무덤이다. 죽은 후 동해의 용이 되어 신라를 지켰다는 설화는 문무왕이 동해 바다에 무덤을 만들라고 한 의도를 잘 보여준다. 문무왕에 이어 왕위에 오른 신문왕(神文王)은 그 인근에 감은사(感恩寺)를 지어 부왕을 기렸다.

3 삼국통일전쟁을 승리로 이끌다

문무왕의 가장 큰 업적은 삼국통일 전쟁의 완수이다. 그는 즉위 이전부터 이미 그 과업을 수행하고 있었는데, 진덕여왕 재위 시에는 사신으로서 당에 들어가 나당 동맹 유지에 힘썼고, 부왕 태종무열왕 재위 기간에는 국정 운영은 물론, 백제와의 전투에 직접 참여하였다. 661년 즉위한 이후로는 삼국 통일이라는 과업에 오로지하여 거의 전 일생을 전쟁 수행에 매진해야 했다. 가장 먼저 백제 부흥운동을 저지해야 했다. 왜의 원군과 합쳐진 부흥군은 이전 백제의 전역에서 위협이 되고 있었다.

문무왕은 여러 장수를 이끌고 출전하여 661년(문무왕 1) 옹산성(甕山城)과 우술성(雨述城)을 격파하였고, 663년(문무왕 3)에는 거열성(居列城), 거물성(居勿城), 사평성(沙平城), 덕안성(德安城) 등을 공격하여 백제부흥군을 제압하였다. 그리고 결국 김유신 등 28명의 장군과 함께, 손인사(孫仁師)가 이끄는 당군과 연합해 주요 지도층이 반목하여 분열한 백제부흥운동의 중심지 주류성(周留城)을 함락하는데 성공하였고, 뒤이어 차례로 부흥군을 격파하여 결국 백제부흥운동을 진압하였다. 특히 663년 8월 지금의 금강 하구에서 왜의 원군을 전멸시킨 백강전투(白江戰鬪)는 백제부흥운동에 큰 타격을 주었다. 이로써 삼국통일의 첫 단추라 할 수 있는 백제 정벌은 일단락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고구려였다. 하지만 문무왕은 고구려와의 일전이 이 전쟁의 끝이 아님을 알았다. 백제와의 전쟁이 완전히 끝나지 않았던 때부터 당의 신라 침공 계획이 흘러나오기도 하였고, 결정적으로 원래 나당 동맹을 맺을 당시의 약속이었던 백제 영토를 신라가 차지하는 것을 당이 지키지 않았던 것이다. 당은 백제 땅에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를 설치하여 당의 영토로 삼으로 하였고, 665년(문무왕 5)에는 백제 태자였던 부여융(扶餘隆)을 웅진도독으로 임명하고 신라와 화의를 다짐하는 맹세 의식을 취리산(就利山)에서 치르도록 하였다. 이로써 문무왕은 고구려와의 전쟁이 끝나더라도 모든 전쟁이 끝나지 않을 수 있고, 특히 백제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당과의 일전을 피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삼국통일의 두 번째 단계인 고구려와의 전쟁 역시 신라의 중요한 과제였고, 고구려 공략에도 신라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661년(문무왕 1) 소정방이 이끄는 당군이 고구려 수도 평양을 포위하고 공격하였지만, 함락시키지 못하고 겨울을 맞이하면서 식량의 부족과 추위라는 이중고를 겪게 되었는데, 함부로 퇴각하다가는 고구려군의 반격에 크게 당할 수 있어 후퇴도 하지 못하는 상황에 빠지고 말았다. 이때 당의 원조 요청을 받은 문무왕이 김유신에게 명하여 당군을 원조할 것을 지시했고, 김유신이 지략과 용맹함을 발휘하여 적진을 돌파하고 당군에 무사히 군량을 전하는 한편 적군의 일부를 유인하여 격파하여, 당군이 피해 없이 퇴각할 수 있도록 하였다. 당의 고구려 공략에 신라는 매우 중요한 협력자였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다만 백제부흥운동 진압이 우선 순위였던 것과 고구려가 멸망한 후 당이 침략해 올 수 있다는 점 등 때문에, 백제 정벌 때와 달리 신라가 직접 군사 활동을 적극적으로 벌이지는 않았다. 이윽고 백제부흥운동 제압이 완료되고 본격적인 고구려 원정이 본격화 되었다. 668년(문무왕 8) 당의 대군이 고구려 공격을 추진하자, 문무왕도 김유신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원정군을 편성하였다. 비록 김유신은 고령으로 출전하지 않았지만, 그해 9월 신라 정예군은 당군과 함께 평양성을 함락하고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이로써 백제와 고구려를 통합하는 삼국통일은 작은 완성을 이루었다. 그해 11월 문무왕은 백제와 고구려 평정을 선조 왕들을 모신 사당에 직접 고하여 삼국통일을 달성했음을 재확인한다.

하지만 신라 문무왕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백제 멸망 이후 당이 그 땅을 차지한 것은 원래 나당 동맹의 합의사항이었던 평양 이남의 땅을 신라가 차지한다는 약속을 지킬 의사가 없는 것은 물론, 신라까지 자신들의 영토로 삼으려는 의도를 보여준 것이다. 이에 문무왕은 당과의 마지막 일전을 준비하였다.

우선 안승(安勝)과 검모잠(劍牟岑)이 주도한 고구려부흥운동을 몰래 지원하여 당군에 타격을 주었고, 당이 고구려 전역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당군에 밀려 망명해 온 고구려부흥세력을 지금의 전북 익산시 지역에 해당하는 금마저(金馬渚)에 머물게 하면서 보덕국(報德國)을 세우게 하였다. 보덕국왕 안승은 신라의 책봉을 받았는데, 사실상 신라가 배후에 있었다. 이 보덕국(報德國)은 당과의 일전에 처음부터 신라가 전면에 나서려 하지 않았던 의도도 있었지만, 군사 강국 당과의 결전에서 승리를 거두기 위해서는 신라 단독의 힘만으로는 힘들고, 고구려와 백제의 힘까지 동원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고 고구려 유민을 포섭하려는 한 것이었다.

이렇듯 신라는 당과의 일전을 치밀한 계획 하에 추진하였다. 그리고 당시 당이 서쪽 토번(吐藩)의 침공으로 한반도 쪽에 신경 쓸 틈이 없다는 정보를 알고, 670년 웅진도독부를 공격하기 시작하여 671년에 백제 전역을 장악하고 소부리주(所夫里州)를 설치하면서 신라 영토에 편입시켰다. 이로써 신라는 삼국통일전쟁의 마지막 단계, 곧 당과의 일전에 돌입하였다. 나당 전쟁은 비록 당의 침략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었지만, 단순히 당의 침략을 받은 신라가 그것을 막아낸 것이 아니다. 삼국통일을 완수하기 위해 문무왕 계획하고 선택한 싸움인 것이다. 신라의 백제 지역 공격을 비난하는 당 장수 설인귀(薛仁貴)의 편지에 대한 문무왕의 답장에 그러한 모습이 잘 드러나 있다.

이후 여러 차례에 걸친 당군의 대대적 침공이 있었고, 신라가 여러 차례 위기를 맞이하기도 했지만, 결국 675년 9월의 매소성전투(買肖城戰鬪)와 676년 11월의 기벌포전투(伎伐浦戰鬪)에서 신라군이 큰 승리를 거두면서, 당군이 한반도에서 철수하고 신라가 최종적으로 승리를 거둔다. 이로써 문무왕은 긴 전쟁 끝에 삼국통일을 완성할 수 있었다.

다만 당과의 전쟁이 완전히 끝나지는 않았다. 이후 당은 여러 차례 신라 침공 계획을 세웠기 때문이다. 다만 당의 사정으로 그 계획이 실행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러한 정보들을 신라도 알고 있었기에, 문무왕은 676년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전쟁에 대비하였다. 이러한 긴장 상황은 문무왕이 죽을 때 까지 지속되었다. 또한 670년 12월 국호를 일본(日本)으로 바꾼 왜도 침략해 올 여지가 있었다. 따라서 문무왕은 죽는 순간까지도 나라를 걱정하며 지키고자 노력하고 염원하였다. 이러한 문무왕의 노력과 염원이 신라 백성들에게 널리 알려졌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죽은 후 용이 되어 신라를 지켰다는 설화가 만들어질 수 있었다.

4 삼국을 통일한 나라에 맞는 제도를 갖추어 가다

문무왕은 재위 기간 동안 전쟁을 끊임없이 치루면서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하였다. 그러면서도 삼국을 통일한 큰 나라가 된 이후를 위해, 그에 걸 맞는 국가 체제와 제도 마련에도 꾸준히 노력을 기울였다.

우선 새로 통합한 고구려와 백제 사람들을 포섭하기 위해, 고구려 지배층과 백제 지배층이 신라에서 어떠한 지위를 가질 것인가에 대한 기준을 마련하였다. 673년(문무왕 13) 백제 지배층들이 신라에서 받을 관등을 백제에서 받은 지위를 기준으로 정하였다. 그리고 674년에는 그간 새로 정복한 지역의 지배층, 곧 지방민에게 하사했던 외위를 없앴다. 이 조치는 기존의 신라인과 새로 편입된 고구려인과 백제인들 사이의 차별을 줄이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아울러 보다 넓어진 나라를 효과적으로 다스리기 위해 여러 제도들도 정비하였다. 663년(문무왕 3) 선부(船府), 667년 우이방부(右理方府)와 좌사록관(左司祿館), 681년 우사록관이 새로이 설치되었다. 이들 관부의 설치는 국가의 규모가 커지면서 늘어난 업무를 수행할 관부들을 신설하거나, 수가 늘어난 관인들에 대한 업무를 잘 수행하기 위한 조치들이다. 또 671년(문무왕 11)과 672년에 병부(兵部), 창부(倉部), 예부(禮部), 사정부(司正府) 등 중앙 관부 최하위 실무 담당자 사(史)의 정원을 늘렸는데 늘어난 업무를 잘 처리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678년(문무왕 18)에 북원소경(北原小京), 680년에 금관소경(金官小京)을 두었는데, 이는 넓어진 영토를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한 지방행정제도 정비의 일환이라 하겠다.

한편 군사제도의 개편도 있었다. 군사제도의 개편은 기본적으로 일련의 지속된 삼국통일전쟁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지만, 삼국 통합의 목적도 일부 있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 곧 통일신라의 주력 부대는 9서당(誓幢)이라 할 수 있다. 서당이라는 부대 자체는 진평왕 대에 처음 설치되었지만, 실질적으로 문무왕 대에 여러 서당을 추가로 설치하면서 9서당이 만들어져 갔다. 그중 백금서당(白衿誓幢)은 문무왕이 백제 지역을 차지하고 소부리주를 설치한 다음 해인 672년에, 백제유민들에서 군사를 선발하여 만들었다. 즉 백제 유민을 군사력에 포함함으로써 삼국통일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한 것이다.

이와 같이 문무왕 대 제도 정비는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이는 675년에 모든 관부[百司]와 지방행정단위인 주군(州郡)의 동인(銅印)을 제작하여 반포한 것에서 다시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문무왕은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제도의 정비와 개정을 통해 보완해 나갈 것을 유조에서 당부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문무왕의 노력은 고구려와 백제 유민들을 하나의 국가 구성원으로 통합하여 동질의식을 키우는데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결국 문무왕이 완수한 삼국통일은 단순히 전쟁에 의한 외형적 통합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그 통합된 국가에 걸 맞는 국가 체제와 각종 제도, 그리고 사람들의 인식 변화까지 모두 포함한 것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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