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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왕[文王]

발해 전성기의 기틀을 다지다

미상 ~ 794년(성왕 1)

1 무왕(武王)의 뒤를 이은 문왕(文王)

문왕(재위 737~793)의 이름은 대흠무(大欽茂) 로, 737년 무왕(재위 719~737) 대무예(大武藝)가 병으로 죽자 발해의 3대 왕으로 즉위하였다.

2 당과의 교류와 내부 체제 정비

무왕 대무예는 시호(諡號)에서도 알 수 있듯이 무력을 바탕으로 당의 등주(登州)를 공격하는 등 강경책을 구사하였지만, 문왕 대흠무는 당과의 우호를 선택하고 당의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발해 내부의 정치·경제·사회·문화 전 분야의 체제 정비에 중점을 두고 문치를 바탕으로 안정적인 통치를 우선에 두었다. 뒤에 선왕(宣王) 대에 발해가 해동성국(海東盛國)으로 불릴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대흠무의 정책이 밑바탕에 있었던 것이다. 문왕의 57년이라는 긴 재위 기간도 발해가 건국기를 지나 안정기에 접어드는 데 한몫을 하였다.

문왕은 57년의 재위 기간 동안 당에 61회 이상 사신을 파견하였는데 즉위 한 다음해인 738년 당에 사신을 보내 『당례(唐禮)』·『삼국지(三國志)』·『진서(晉書)』·『삼십육국춘추(三十六國春秋)』의 필사를 요청하였다.

특히 『당례(唐禮)』는 732년에 완성된 『대당개원례(大唐開元禮)』를 의미하는데 문왕은 자신의 시호에 걸맞게 즉위 초반부터 최신의 당의 예의와 제도, 유학(儒學) 받아들이면서 문치(文治)를 지향하였고 한편으로는 무왕 대와는 달리 당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문왕 대에는 3성(省) 6부(部)의 중앙 정치 기구가 마련되었다. 3성은 선조성(宣詔省), 정당성(政堂省), 중대성(中臺省)으로 각각 당의 문하성(門下省), 상서성(尙書省), 중서성(中書省)에 비견된다. 6부는 충부(忠部), 인부(仁部), 의부(義部), 지부(知部), 예부(禮部), 신부(信部)가 있는데 각각 당의 이부(吏部), 호부(戶部), 예부(禮部), 병부(兵部), 형부(刑部), 공부(工部)에 해당한다. 발해의 3성 중 특히 주목되는 것은 선조성인데 선조성은 왕명의 출납을 관장하던 부서로서 ‘조(詔)’는 칙(勅)이나 제(制)처럼 황제의 명령을 뜻한다. 발해에서는 왕의 명령을 황제의 명령과 마찬가지로 ‘조’라고 하였고 이는 문왕을 ‘황상’이라고 불렀던 내용과도 연결된다.

또한 발해는 사방 5천리의 넓은 영역을 5경(京) 15부(府) 62주(州)로 나누어 통치하였는데 지방 제도의 완비는 선왕 때(재위: 818~830) 이루어지나 777년(문왕 41)에 15부 중의 하나인 남해부(南海府)가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문왕 때부터 당의 부주현(府州縣) 제도를 받아들여서 지방 제도를 정비해 나갔던 것 같다. 5경은 상경, 중경, 동경, 남경, 서경이고 15부는 상경의 용천부, 중경의 현덕부, 동경의 용원부, 남경의 남해부, 서경의 압록부, 장령부, 부여부, 막힐부, 정리부, 안변부, 솔빈부, 동평부, 철리부, 회원부, 안원부이다.

3 문왕의 자신감-대흥보력효감금륜성법대왕(大興寶曆孝感金輪聖法大王), 황상(皇上), 천손(天孫)

발해사를 복원할 사료가 매우 부족한 현실에서 그 공백을 조금이나마 메워줄 금석문(金石文)의 발견은 가뭄에 단비와도 같다. 1949년 길림성 돈화시 육정산 고분에서 정혜공주무덤이 발굴되었고, 1980년에는 길림성 화룡현 용두산에서 정효공주무덤이 발견되었다. 정혜공주(738~777)는 문왕의 둘째 딸이고, 정효공주(757~792)는 넷째 딸로 공주들의 이력을 적은 묘지명에는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문왕을 지칭하는 용어와 당시에 쓰인 연호(年號) 등이 적혀 있어 문왕의 통치시기를 복원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묘지명에서는 문왕을 대흥보력효감금륜성법대왕(大興寶曆孝感金輪聖法大王)이라고 지칭하였는데 여기서 대흥(大興)은 문왕이 즉위하여 쓴 연호로, 연호에는 왕이 추구하는 이상을 반영하는 경향이 있다. 문왕은 대흥이라는 연호를 짓고, 크게 일어나겠다는 의지를 표방한 것 같다. 보력(寶曆)도 774년부터 쓰인 문왕 대의 연호이다.

원래 연호는 황제만이 쓸 수 있는 것으로 당에서는 발해가 사사롭게 시호를 올리고, 연호를 마음대로 고치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발해는 멸망할 때까지 발해의 독자적 연호를 사용하였는데 현재까지 확인된 것은 인안(仁安), 대흥(大興), 보력(寶曆), 중흥(中興), 정력(正曆), 영덕(永德), 주작(朱雀), 태시(太始), 건흥(建興), 함화(咸和)이다. 금륜(金輪)과 성법(聖法)은 불교 용어로 문왕 대에 불교가 성행하였고 문왕이 이상적인 제왕인 전륜성왕을 지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묘지명의 구절 중에는 딸을 잃은 아버지 문왕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는 “황상(皇上)이 조회를 파하고 크게 슬퍼하여 정침(正寢)에 들지 않고 음악도 중지시켰다…”는 구절을 통해서 알 수 있는데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문왕을 ‘황상’이라고 지칭했다는 점이다.

이처럼 문왕 대의 체제 정비를 통한 내부 안정을 통해 신료들은 문왕을 ‘황상’이라 칭하였고, ‘대흥’, ‘보력’과 같은 독자적 연호를 사용하였으며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는 ‘하늘의 자손(天孫)’이라고 칭하는 등 자신감을 표출하였다.

4 문왕의 빈자리

57년이라는 긴 재위 기간 동안 안정적으로 체제 정비에 힘썼던 문왕이 사망한 이후 발해에서는 25년 동안 일곱 번이나 왕위가 바뀌는 혼란을 겪게 된다. 문왕의 아들 대굉림(大宏臨)이 일찍 죽어 문왕의 족제(族弟)인 대원의(大元義)가 즉위하였지만 의심이 많고 포악한 성격으로 국인(國人)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고 뒤를 이어 대굉림의 아들인 대화여(大華璵)가 즉위하여 성왕(成王)이 되었다. 성왕은 수도를 동경에서 상경으로 옮기고 연호를 중흥으로 고치는 등 국정을 쇄신하고자 하나 곧 사망한다. 1년 남짓한 시간 동안 문왕이 죽고 성왕의 죽음까지 이어지면서 왕권의 불안정이 계속되었다. 이어 문왕의 아들인 대숭린(大嵩璘)이 즉위하였으니, 강왕(康王)이다. 강왕은 연호를 정력으로 고치고 15년간 재위하였다. 강왕 이후 10년 동안 정왕(定王), 희왕(僖王), 간왕(簡王)이 즉위하는 등 왕위의 교체가 빈번하게 일어났고, 818년 선왕(宣王) 대인수(大仁秀)에 이르면서 다시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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