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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천왕[美川王]

소금장수, 왕이 되다

미상 ~ 331년(고국천왕 1)

미천왕 대표 이미지

삼국사기(옥산서원본) 미천왕조

한국사데이터베이스(국사편찬위원회)

1 개요

미천왕은 고구려 제15대 왕이다. 아버지가 반역을 의심받아 자결 명령을 받자, 궁궐에서 도망쳐 머슴살이와 소금장수 등을 하면서 지냈다. 봉상왕(烽上王)이 실정을 거듭하자, 국상(國相) 창조리(倉助利) 등은 봉상왕을 폐위시키고, 민간에 있던 을불(乙弗, 미천왕)을 왕으로 옹립했다. 재위기간 동안 요동 서안평(西安平) 을 차지하고, 낙랑군(樂浪郡)과 대방군(帶方郡) 지역을 차지하는 등 영토 확장에 힘썼다.

2 미천왕의 가계와 즉위 과정

미천왕은 호양왕(好讓王)이라고도 한다. 이름은 을불, 우불(憂弗) 혹은 을불리(乙弗利)이다. 제13대 서천왕(西川王)의 손자이며, 고추가(古鄒加) 돌고(咄固)의 아들이다. 돌고는 서천왕의 둘째 아들이자 제14대 봉상왕의 동생이다. 그러므로 봉상왕은 미천왕의 큰아버지가 된다. 아들로는 왕위를 계승한 고국원왕(故國原王)이 있다. 미천왕의 어머니와 왕비에 대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을불(미천왕)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봉상왕이 의심과 시기심이 많아 인재들을 죽이는 등 실정을 거듭했기 때문이다. 292년(봉상왕 1), 봉상왕이 즉위한 후 처음으로 한 조치도 숙부인 안국군(安國君) 달가(達賈)를 죽인 일이었다. 달가는 서천왕 때 숙신(肅愼)의 공격을 막아내고 숙신의 부락들을 복속시켰다. 이 공으로 중앙과 지방의 군사 관련 일을 담당하면서, 백성들로부터도 두터운 신망을 받고 있었다. 이를 시기한 봉상왕은 음모를 꾸며 달가를 죽였다. 그 다음 해에는 아우인 돌고(咄固)가 반역의 뜻을 품고 있다고 의심해 자결하도록 하였다. 이 때 돌고의 아들인 을불(미천왕)은 들판으로 달아나 겨우 목숨만은 부지할 수 있었다.

을불은 처음에 수실촌(水室村) 음모(陰牟)의 집에 가서 머슴살이를 했는데, 밤낮으로 고된 일에 시달리다가 1년 만에 그 집을 떠났다. 그리고는 동촌(東村) 출신의 재모(再牟)와 함께 소금장사를 시작했다. 어느 날 압록강 변의 사수촌(思收村)이란 곳에서 하룻밤을 머물게 되었다. 집주인인 할멈이 소금을 요구해 한 말을 주었는데, 더 달라고 하는 것을 들어주지 않자 할멈이 소금 속에 신발을 숨겨두었다. 다음 날 길을 떠났던 을불은 신발도둑으로 몰려 태형을 당하고, 소금도 빼앗겼다. 그리하여 을불은 왕손이라고는 짐작도 못할 정도로 얼굴이 야위고 남루한 행색으로 지내게 되었다.

한편, 봉상왕의 재위기간 동안 고구려에는 자연재해와 흉년이 잇따라 백성들의 삶이 궁핍해졌다. 그러나 봉상왕은 신하들의 간언을 듣지 않고 백성들을 동원해 궁궐을 증축하는 등 토목공사를 일으켰다. 국상이었던 창조리는 신하들과 함께 왕을 폐위시키기로 모의하고, 비류하 가에서 을불을 찾아냈다. 창조리는 봉상왕이 사냥을 나가자 거사를 일으켜 왕을 폐하고 별실에 가두었다. 그리고는 을불을 맞이하여 옥새를 바치고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이렇게 왕위에 오른 미천왕은 300년부터 331년까지 32년간 고구려를 통치했다.

3 낙랑·대방군의 점령

미천왕 즉위 초, 중국의 서진(西晉)에서는 8왕의 난(291~306)이 일어나 내분이 극심한 상황이었다. 8명의 왕들은 정권을 다투는 과정에서 흉노와 선비 등 북방민족을 병력으로 동원하였다. 8왕의 난은 진정되었지만, 북방민족들이 화북지역에서 힘을 키우며 독자세력화 함으로써 이른바 5호 16국 시대의 혼란기가 도래하였다. 그 중에서 요동 지방의 경우, 선비족의 하나인 모용씨(慕容氏)가 성장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요동 지역에는 서진 중앙의 힘이 제대로 미치지 못했다. 미천왕은 이런 상황을 틈타 302년(미천왕 3)에 직접 군사 3만을 거느리고 현도군(玄菟郡)을 공격해 8천 명을 포로로 잡았다. 그리고 311년(미천왕 12)에는 요동 서안평을 점령해, 요동 진출의 발판을 마련했다. 그러나 310년대에 이르러 모용외(慕容廆) 세력이 급성장하자, 미천왕은 본격적인 요동 진출에 앞서 남쪽의 낙랑군(樂浪郡)과 대방군(帶方郡)을 공략하게 된다.

서진의 지배력 약화로 힘의 공백이 생긴 것은 한반도 서북쪽의 낙랑과 대방 지역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낙랑과 대방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던 사람은 요동 출신의 장통(張統)이었다. 고구려의 서안평 점령으로 서진 중앙과의 육상 연결이 차단되자, 장통은 고구려의 공격에 시달리게 되었다. 전쟁을 거듭하던 장통은 이를 견디지 못하고, 백성들을 이끌고 요동으로 달아나 모용외에게 귀부했다. 이에 미천왕은 313년(미천왕 14) 낙랑군을 멸망시켰고, 이듬해에는 대방군마저 점령했다. 이로써 낙랑과 대방은 고구려의 영역이 되었다.

미천왕이 낙랑과 대방을 먼저 점령한 것은 요동 진출의 한 과정으로 설명할 수 있다. 과거 동천왕 때 고구려는 위(魏)와 연합하여 요동의 공손씨(公孫氏) 정권을 멸망시켰다. 그러나 위는 그 직후 낙랑과 대방을 점령함으로써 배후에서 고구려를 압박해 왔다. 고구려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서안평을 공격했다가, 위 관구검의 대대적인 침입을 받아 환도성이 함락되는 위기를 겪기도 했다. 이런 국가적 위기를 겪은 고구려였기에, 미천왕은 낙랑과 대방을 점령함으로써 이 지역이 요동의 모용씨와 연결되는 것을 막고자 했다. 비록 장통이 요동에 투항하기는 했지만, 그 근거지를 고구려가 점령했기 때문에 배후의 위협은 제거된 셈이었다.

미천왕이 낙랑과 대방을 점령함으로써 중국의 군현은 한반도에서 모두 축출되었다. 낙랑과 대방은 본국과 동방 여러 나라와의 무역을 중계하면서 많은 이익을 남기고 있었다. 그리고 본국과의 잦은 교류로 주변국에 비해 선진적인 문물을 향유하고 있었다. 고구려는 낙랑과 대방의 이러한 이점들을 그대로 흡수하여 내적·외적 발전의 동력으로 삼았다. 그리고 고구려의 전통적인 염원이자 낙랑·대방 점령의 궁극적 목적이었던 요동으로의 진출을 본격적으로 시도하게 된다.

4 모용선비와의 관계

고구려와 모용선비와의 직접적인 충돌은 봉상왕 대에도 있었다. 293년(봉상왕 2)에 모용외가 침입했으나 고노자(高奴子)의 활약으로 물리쳤다. 그리고 296년(봉상왕 5)에는 모용외가 서천왕의 무덤을 파헤치려다 무덤에서 괴이한 소리가 나서 물러난 일도 있었다. 이후 봉상왕이 고노자를 신성(新城) 태수(太守)로 임명하자 모용외가 다시는 쳐들어오지 못했다고 한다. 이처럼 봉상왕대 양자의 대립은 고구려가 우세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미천왕대에 이르러 선비족의 상황에 변화가 생겼다. 모용외가 302년 극성(棘城)에서 같은 선비족 일파인 우문씨(宇文氏)를 격파하면서 국가체제를 갖추기 시작한 것이다. 307년에는 스스로를 선비대선우(鮮卑大單于)라 칭하면서 선비족의 통일을 시도했다. 이처럼 모용씨는 요서 지방을 중심으로 주변의 부족을 제압하면서 세력을 확장해가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미천왕은 낙랑과 대방을 점령하고, 이듬해인 315년(미천왕 16) 2월에는 현도성을 공파하기에 이른다. 이렇게 고구려의 요동 진출이 가시화되자, 또 다시 고구려와 모용선비의 충돌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당시 요동과 요서지방에는 서진의 멸망으로 인한 혼란을 피해 많은 한족들이 와 있었다. 한족들은 주로 이 지역의 유력자였던 왕준(王浚)과 최비(崔毖), 모용선비와 단선비(段鮮卑) 등에게 의탁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모용외에게 민심이 집중되는 상황이었다. 최비는 이런 상황에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마침 자신의 세력기반이었던 왕준이 피살되는 일이 벌어지자, 그는 고구려와 우문씨‧단씨에게 함께 모용씨를 정복하자고 제안하였다. 이에 세 세력이 연합하여 모용씨의 수도인 극성을 포위하였다. 모용외는 성문을 닫고 지키기만 하다가, 우문씨에게만 소와 술을 보내 위로하였다. 그러자 우문씨와 모용씨의 관계를 의심한 고구려와 단씨는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남아 있던 우문씨 역시 크게 패하고 말았다. 최비는 이 소식을 듣고 조카인 최도(崔燾)를 거짓 축하사절로 보냈으나, 최도는 모용외가 두려워 사실을 털어놓았다. 모용외가 최도를 돌려보내며 군사를 이끌고 뒤쫓자, 최비는 기마병 수십을 거느리고 고구려로 도망쳤다. 그리고 남은 무리가 모용외에게 항복하였다.

요동을 장악한 모용외는 장통(張統)을 보내 고구려의 하성(河城)을 공격했다. 장통은 하성에 머물고 있던 최도와 무리 천여 명을 사로잡아 극성으로 돌아갔다. 이에 미천왕이 여러 차례 요동을 공격했지만 오히려 모용외의 공격을 받아 화친의 맹약을 맺기도 했다. 미천왕의 요동 공격은 이듬해까지도 계속되었지만, 모용외의 방어로 실패하고 말았다.

모용씨를 타도하고 요동을 공략하기 위해 미천왕은 이제 전쟁 대신 주변국과의 연합이라는 외교적 시도를 하게 된다. 330년(미천왕21), 미천왕이 후조(後趙)의 왕 석륵(石勒)에게 사신을 보내 호시(楛矢)를 보낸 것이다. 호시는 싸리나무로 만든 화살로, 전쟁에서 사용되는 물품이다. 미천왕은 모용선비 남쪽의 후조와 연합하여 모용외에 대한 협공을 의도한 것이다. 그러나 다음 해에 미천왕이 사망함으로써, 이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다.

5 미천왕의 사망과 미천왕릉 논란

미천왕은 재위 32년만인 331년에 사망했다. 미천지원(美川之原)에 장사를 지내고, 왕호를 미천왕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미천왕은 죽은 후에도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342년(고국원왕 12)에 전연(前燕)의 모용황(慕容皝)이 4만의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를 쳐들어왔다. 모용황은 모용외의 아들이었다. 고구려는 전연의 군대를 감당하지 못했다. 고국원왕의 어머니와 왕비가 사로잡혔고, 환도성(丸都城)이 유린당했다. 모용황은 미천왕의 무덤을 파헤쳐 시신을 싣고 돌아갔다. 이것은 고구려인들이 다시 힘을 모아 자신들을 공격할 것을 대비해, 왕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인질로 삼고자 한 것이었다. 미천왕의 시신은 343년(고국원왕 13)에 고국원왕이 아우를 전연에 보내 신하를 칭하고 난 후에야 돌려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후 미천왕의 시신을 어떻게 처리했는지는 기록이 전하지 않는다.

미천왕의 무덤과 관련하여 한때 북한에서는 황해도 안악군에 있는 안악 3호분이 미천왕을 다시 매장한 것이라는 주장이 있었다. 그러나 현재는 고국원왕으로 표기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미천왕이 아닌, 동수(冬壽)의 묘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 외에 중국 통구(通溝)의 마선구 고분군(麻線溝 古墳群)에 있는 서대총(西大塚)을 미천왕릉이라 보기도 한다. 거대한 무덤의 한가운데가 파헤쳐져 있는데, 이것을 모용황이 미천왕의 무덤을 훼손한 흔적이라 보고 있는 것이다. 서대총의 규모로 볼 때, 이것을 왕릉급으로 보는 것에는 이견이 없으나, 현재로서 이것을 미천왕릉으로 볼 근거는 확실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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