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사 연대기
  • 고대
  • 법왕

법왕[法王]

불법(佛法)으로 왕권을 강화하다

미상 ~ 600년(법왕 2)

법왕 대표 이미지

부여 왕흥사지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법왕(法王)은 백제의 제29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599년~600년이다. 즉위하자마자 살생을 금하는 명을 내렸다. 이듬해에는 왕흥사(王興寺)를 창건하면서 30명이 승려가 되는 것을 허가하였다. 법왕은 2년이라는 짧은 재위기간에도 불구하고 불교 윤리를 확대시키기 위해 노력했고, 이를 통해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다.

2 법왕의 즉위 과정에 대한 논란

법왕의 이름은 선(宣) 또는 효순(孝順)이고, 성은 부여씨(扶餘氏)이다. 대부분의 문헌에서 제28대 혜왕(惠王)의 맏아들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수서(隋書)』에는 제27대 위덕왕(威德王)의 아들이라는 기록도 있다. 어머니와 왕비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아들은 부여장(扶餘璋)인데, 후에 무왕(武王)이 되었다. 무왕이 조카인 복신(福信)을 당에 사신으로 보냈다는 기록으로 보아, 무왕 외에 또 다른 아들이나 딸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령(高齡)의 혜왕이 재위 2년 만인 599년(혜왕 2)에 죽자, 법왕이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법왕 역시 즉위한 이듬해 여름에 죽고 말았다. 시호는 법(法)이다.

법왕의 즉위과정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는데, 첫 번째 주장은 다음과 같다. 498년(위덕왕 45), 위덕왕은 수(隋)에 사신을 보내 수가 고구려를 공격하면 백제가 향도가 되겠다고 자청하였다. 그러자 고구려가 이를 알고 백제 변경을 쳐들어와 약탈을 자행했다. 이때는 고령의 위덕왕이 사망 3개월 전으로, 왕의 통치력이 미약했을 시기이다. 당시 위덕왕의 동생인 혜왕 역시 고령이었고, 아들인 아좌태자(阿佐太子)는 왜(倭)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러므로 고구려전을 주도한 사람은 혜왕의 아들이자 위덕왕의 조카인 법왕이었다. 이 과정에서 법왕은 일종의 정변을 통해 정국 운영의 주도권을 장악했다. 그리고 위덕왕이 죽자 왕위계승서열이 앞서는 자신의 아버지 즉, 혜왕을 명목상 즉위시켜 귀족들의 반발을 피했다. 그리고 혜왕이 죽자 자연스럽게 법왕이 즉위하게 되었다.

반면에 이러한 주장을 반박하면서 위덕왕대 혜왕의 활약상을 주목하기도 한다. 혜왕이 위덕왕 초에 왜에 청병사로 갔던 사실로 보아, 위덕왕의 정치적 조력자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아좌태자가 왜에 계속 체류하는 상황에서, 꾸준히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다진 혜왕은 성왕계 왕족의 일원으로서 위덕왕의 왕위를 계승하였다. 그리고 뒤이은 법왕의 즉위 역시 아버지인 혜왕이 이룩한 정치적 기반에 힘입은 바 크다고 보는 것이다. 현재로서는 이 같은 견해에 조금 더 힘이 실리고 있다. 즉, 위덕왕은 성왕대의 정치를 지향하며 지속적으로 왕권을 강화해 나갔고, 이 과정을 함께 한 혜왕과 법왕이 자연스럽게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3 법왕대 호국사찰의 창건

『삼국사기(三國史記)』에 기록된 법왕대의 기록은 불교 관련 기록뿐이다. 그러므로 법왕의 통치는 곧 불교와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법왕의 정책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왕흥사 창건과 같은 호국사찰의 건립이다.

600년(법왕 2) 정월, 법왕은 왕흥사를 창건했다. 이보다 앞서 위덕왕이 죽은 왕자를 위해 왕흥사에 목탑을 건립한 바 있었다. 그러다가 법왕대에 이르러 사찰에 대한 본격적인 공사가 시작되면서 규모와 기능이 크게 강화되었다. 왕흥사 공사는 634년(무왕 35)에 이르러서야 완료되었다. 왕흥사는 왕실의 안녕과 흥성을 기원하며 나아가 국가의 안위를 도모하는 호국사찰의 성격을 띤다. 왕흥사 창건과 동시에 법왕은 30명이 승려가 되는 것을 허락하는 조치를 취한다. 이 승려들은 국가가 출가를 허락한 사람들로, 사상적으로 왕의 지지세력이 될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이 도승의 목적 역시 왕흥사의 호국불교적 성격과 궤를 같이 한다고 할 수 있다.

법왕이 2년에 불과한 재위기간 동안 적극적으로 불교 확대정책을 펼 수 있었던 것은 이전부터 그러한 기반을 닦아왔기 때문이다. 백제는 성왕의 사비천도 이후부터 사찰 건립을 추진했지만 성왕의 사망으로 중단되었다. 위기를 수습한 위덕왕은 능사(陵寺) 건립 이후 사찰 조영을 추진하고자 했으나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뒤이은 혜왕 역시 짧은 재위기간으로 인해 실질적인 추진이 어려웠다. 그렇지만 시간의 흐름 속에서 호국사찰 조영의 필요성은 계속적으로 커졌고, 이것이 법왕대에 이르러 본격적인 불사의 추진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한편 법왕대 창건된 사찰들의 위치도 주목된다. 왕흥사지는 현재 금강의 건너편, 즉 부소산성의 낙화암 맞은편에서 확인되었다. 그리고 법왕대에 창건된 것으로 보이는 오합사(烏合寺)는 전쟁에서 죽은 영혼들이 불계(佛界)에 오르기를 바라면서 지은 원찰인데, 현재의 충청남도 보령에 위치한다. 법왕이 자복사찰(自福寺刹)로 창건했다고 전하는 금산사(金山寺)는 전라북도 김제에 있다. 또한 이전에 위덕왕이 왕실의 원찰로 조영했던 능사(陵寺)는 사비도성을 둘러싼 나성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이들 사찰은 모두 왕과 왕실, 그리고 국가를 위해 희생한 사람들을 위한 호국사찰들이다. 이처럼 법왕대의 호국사찰들이 사비도성 외곽이나 지방에 창건되었다는 점은 당시 불교가 지방으로 확산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4 법왕의 금살생령(禁殺生令)

법왕의 불교 정책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은 금살생령, 즉 살생을 금지하는 명령이다. 법왕은 즉위 직후인 499년(법왕 1) 12월에 살생을 금지하고, 민가에서 기르는 매를 놓아주었으며, 어로와 사냥도구를 불태우도록 명령했다. 이것은 불교의 윤리를 민간에까지 전파하려는 노력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이듬해 가뭄이 들자 칠악사(漆岳寺)에 가서 기우제를 지내기도 했다. 여기서 칠악사의 존재는 백성들 사이에 이미 토착신앙보다 불교가 대세로 자리잡고 있었던 상황을 보여주는 것으로, 금살생령과 함께 민간에 불교의 계율이 확대되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한편, 법왕이 금살생령을 내리고 불과 한 달 만에 왕흥사 창건 기사가 이어지는데, 이것은 금살생령이 왕흥사 창건과 관련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왕흥사가 호국적 성격을 갖는 사찰이라면, 금살생령 역시 같은 맥락에서 또 다른 의미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금살생령의 내용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금살생령에서는 단순히 어렵도구를 불태웠다고 했지만, 왕권을 강화하려는 의도를 내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법왕은 금살생령을 내려 불교 윤리를 민간에까지 확대시키고자 했다. 또 한편으로는 살생의 도구인 귀족들의 병기를 회수함으로써 귀족들의 힘을 약화시키려 했다. 이러한 정책의 궁극적인 목적은 결국 왕권의 강화였다고 하겠다.

5 법왕대 불교정책의 의미

법왕의 불교정책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불교의 수직적·수평적 확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불교의 확산만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다. 법왕대 창건된 사찰들의 호국적 성격이나 금살생령의 의미를 생각한다면, 왕권 강화를 위해 시행한 다분히 의도적인 정책이라고 하겠다.

불교 자체가 국가·호국의 성격을 갖는 것처럼 법왕대 불교의 장려는 국가불교적 성격을 갖는 것이다. 여기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는 백제 불교의 한 특징인 계율종을 생각할 수 있다. 겸익(謙益)의 활동을 계기로 백제 불교는 계율 중심의 특징을 갖게 된다. 계율종은 불교의 호법(護法)과 현실에서의 호국(護國)을 등치시켜 왕권을 사상적으로 뒷받침해 주었다. 금살생령에서 볼 수 있듯이 법왕 역시 계율을 강조했고, 법왕이라는 시호에서도 그 영향을 확인할 수 있다.

계율종 외에 법화신앙(法華信仰)의 영향도 생각할 수 있다. 법화신앙은 호국삼부경(護國三部經) 중의 하나인 『법화경(法華經)』을 경전으로 하는 것으로, 왕권 강화를 뒷받침하는 사상으로 알려져 있다. 백제에서 법화신앙이 유행한 것은 위덕왕부터 혜왕·법왕을 거쳐 무왕 전기까지이다. 이 시기는 사비 천도 후 왕권 강화를 위해 노력하던 시기여서, 이를 위해 왕실 중심으로 법화신앙을 수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법왕대의 불교는 계율종과 법화신앙에 근거한 호국적, 국가불교적 성격을 갖고 있었다. 법왕은 금살생령을 내려 귀족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민간에까지 계율을 확산시켰다. 또한 사비도성 외곽과 지방에 왕흥사를 위시한 여러 호국사찰을 건립함으로써 불교가 지방까지 퍼지게 되었다. 이와 같이 호국불교가 일반 백성에게까지 전파되고, 수도를 넘어 지방까지 확산됨으로써 백제의 왕권은 사상적으로 더욱 공고해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확산은 이후 무왕(武王)대 익산에 미륵사(彌勒寺)가 창건되는 한 배경이 되었다.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