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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흥왕[法興王]

율령과 불교로 나라를 다스리다

미상 ~ 540년(법흥왕 27)

법흥왕 대표 이미지

경주 법흥왕릉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법흥왕(法興王, ?~540)은 신라 제23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514년~540년이다. 그는 신라 전역에 적용되는 법제를 왕의 이름으로 만들어 시행하였고, 불교를 국가 차원의 종교로 인정하여 왕권을 뒷받침하는 이념으로 활용하였다. 그 결과 법흥왕대 신라는 초기 독자적인 지역 집단인 부(部)들의 연합체적 성격에서 완전히 탈피하여, 왕권 중심의 중앙집권국가로 발돋움 할 수 있었다.

2 가계와 생애

법흥왕은 지증왕(智證王)의 장남으로 514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즉위한 후, 540년 사망할 때까지 신라를 다스렸다. 그는 키가 7척(약 170cm 정도)였고, 성품이 너그러우면서 후하여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본명은 모즉지(牟卽智)로 원종(原宗), 무즉지(另卽知), 모진(募秦, 慕秦) 등으로 적기도 했다. 또 그전까지 신라왕들이 자신의 본명을 왕명으로 삼았던 것과 달리, 법흥왕은 불교를 공인한 일을 강조하여 법흥이라는 별도의 왕명을 사용하여 주목된다.

어머니는 지증왕비인 연제부인 박씨(延帝夫人 朴氏)로 이찬(伊湌) 등흔(登欣)의 딸이다. 법흥왕에게는 입종갈문왕(立宗葛文王), 신라 당대 기록에는 사부지갈문왕(徙夫智葛文王)이라 하는 동생이 있었는데, 법흥왕 다음에 왕위에 오르는 진흥왕(眞興王)의 아버지이다. 또 어사추여랑(於史鄒女郞)이라는 누이도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왕비는 보도부인 박씨(保刀夫人 朴氏)로 이름은 부걸지(夫乞支)이다. 왕비와의 사이에서 딸 지소부인(只召夫人)을 낳았는데, 그녀는 삼촌인 입종갈문왕과 결혼하여 진흥왕(眞興王)을 낳았다. 지소부인은 진흥왕이 어린 나이에 즉위했기 때문에 초반에 섭정도 하였다. 다른 자녀가 더 있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적어도 그의 사망시점에 아들은 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법흥왕 사후에 외손자이자 조카인 진흥왕이 즉위하기 때문이다.

법흥왕은 27년간 재위하다가 540년 7월에 사망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그의 무덤은 애공사(哀公寺) 북쪽 봉우리에 만들어졌다. 애공사란 절은 그 위치가 전하지 않아 정확히 어떤 무덤인지 알기는 힘들다. 현재 사적 제176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는 경주 법흥왕릉은 조선 영조대(英祖代)에 경주 김씨 문중에서 법흥왕릉으로 비정한 것이다. 일부 학자들은 선도산 동쪽 기슭 태종무열왕릉 뒤편에 위치한 4기의 대형 고분(경주 서악동 고분군) 가운데 가장 위쪽에 있는 것을 법흥왕릉으로 보고 있다.

3 율령을 반포하다

신라는 건국시 독자적인 지역 집단이었던 6부(部)를 중심으로 성립하였다. 초기에 6부는 자치적으로 운영되었고, 왕은 6부 중 가장 유력한 부인 훼부(喙部)의 장이 맡았지만, 중요한 직책은 6부의 유력자가 담당하였고, 국정 운영은 6부 수장들의 합의에 의해 이루어졌다. 또한 새로 정복한 지역은 신라의 영토가 되었지만, 그 지역의 독자성이 여전히 유지되기도 하였다. 이는 같은 신라 안에서 지역에 따라 시행되는 법과 제도가 다를 수 있었던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초기 국가체제와 정치형태는 ‘마립간(麻立干)’이라는 왕호의 등장과 함께 4세기부터 변화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대등한 세력을 가지고 있던 6부였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힘의 격차가 나타나게 되고, 그에 따라 한두 유력 부들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반면, 경쟁에서 밀린 부가 도태되어 갔다. 그 결과 힘을 가진 부가 왕위를 독점하면서 왕권이 크게 강화되고, 6부의 합의에 의한 국정 운영이 쇠퇴하게 된다. 권력 구조가 점차 왕권 중심으로 변모해간 것이다. 또 강한 국력을 바탕으로 영토를 확장하면서 새로 확보한 영역의 독자성을 해체하고 완전히 신라의 영토로 만들려고 하였다. 한마디로 왕권 중심의 중앙집권적 고대국가로 변모해 나갔던 것이다. 특히 전왕인 지증왕대에는 왕의 위상강화와 함께 지방제도를 비롯한 각종 제도의 마련과 정비가 대대적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법흥왕대까지 이러한 변화가 국가 통치 제도에 그대로 반영된 것은 아니었다. 아직까지 6부의 합의제적인 국정 운영 방식이 유지되고 있었고, 새로 정복한 모든 지역에 신라의 법과 제도가 일률적으로 시행되지 않고 있었다. 이는 신라가 보다 발전하는데 적지 않은 제약이 되었다. 특히 이미 중앙집권적 고대국가로 발전하여 서로 간에 치열한 경쟁을 벌이며 신라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고구려와 백제는 신라에게 커다란 위협이자 자극이 되었다. 양국의 압박에서 벗어나고 그들과 대등하게 경쟁하기 위해서는 신라 역시 중앙집권적 고대국가로 완전히 변모해야만 했던 것이다.

법흥왕대는 이렇듯 신라가 중앙집권적 고대국가로의 발전을 이룩해야만 하던 시점이었고, 법흥왕은 그것을 성공적으로 완수했다. 그것을 가장 잘 확인할 수 있는 것이 520년(법흥왕 7)의 율령 반포이다. 율령은 지금의 형법(刑法)을 뜻하는 ‘율(律)’과 현재의 행정법(行政法)에 상당하는 ‘영(令)’으로 이루어진 단어로, 쉽게 말하면 성문화된 법전을 갖춘 ‘법률제도’이며, 넓은 의미에서 국가가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잘 운영될 수 있도록 하는 모든 제도라 할 수 있다.

즉 법흥왕의 율령 반포는 단순히 새로운 법과 제도를 만들어 시행했다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중앙집권적 고대국가에 걸맞은 법과 제도를 만들어 시행했다는 의미이다. 또 신라 초기 여러 집단의 연합체적 국가체제 하에서 각 집단 마다 법과 제도가 달랐던 것을 극복하고, 이제는 신라 전역이 왕이 만들어 시행하는 하나의 법과 제도만 존재하게 되었다. 이는 여러 지역 집단 내지 소국들로 구성되어 있던 신라가 완전히 하나의 국가로 통합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고, 그와 동시에 이제 신라왕이 단순히 여러 수장들의 대표가 아니라 나라의 법과 제도를 만들 수 있는 유일한 권력자가 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4 불교를 국교로 삼다

법흥왕대에 있었던 또 다른 중요한 변화는 527년(법흥왕 14) 내지 528년의 불교 공인이다. 신라에 불교가 처음 전래되었던 것은 눌지왕대(訥祗王代, 재위 417~458)나 소지왕대(炤知王代, 재위 479~500)로 여겨지며, 고구려나 백제를 거쳐 왔다고 추정된다. 하지만 여전히 신라인들의 다수는 애니미즘[物神信仰]이나 샤머니즘[巫覡信仰]적 성격이 강한 기존의 토착신앙을 신봉하였다.

법흥왕은 이 불교에 크게 심취하여 흥륜사(興輪寺)라는 절을 창건하여 불교를 진작시키려 했다. 하지만 불교를 믿지 않는 당시 귀족들, 다시 말해 6부 수장들의 반대가 심하였다. 이에 법흥왕의 측근인 이차돈(異次頓)이 계책을 내었다. 자신이 왕의 명을 받았다고 거짓말을 하고 토착신앙의 성소인 천경림(天鏡林)에 절을 짓는 사업을 시작하였고, 이에 여러 신하들이 반발하자, 법흥왕은 왕의 위엄을 보이며 이차돈을 처형하여 반대자들이 더 이상 왕의 뜻에 저항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에 신라에서 불교가 공식적으로 인정받게 된다.

전하는 이야기들에서는 이차돈이 처형당할 때, 목이 잘린 곳에서 흰 우유빛 피가 한 길이나 솟구치는 이적이 행해졌음을 강조하여, 이차돈의 순교가 불교 공인의 결정적 계기였다고 이해하기도 한다. 하지만 불교의 진작은 법흥왕이 추진했던 것이고, 이차돈의 순교는 법흥왕의 뜻을 이루기 위한 계책이었으므로, 불교 공인은 이차돈 보다 법흥왕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할 것이다.

이후 불교는 신라의 국교로 자리 잡게 된다. 이 역시 법흥왕의 역할이 상당했음은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면류관을 벗어버리고 가사를 입고 궁궐의 종친들을 절의 노복으로 삼고 그 절의 주지가 되어 몸소 널리 교화시켰다”는 기록에서 볼 수 있듯이, 그 자신이 직접 출가하여 승려 ‘법공(法空)’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왕비 역시 출가하여 여승이 되었다고 한다. 물론 법흥왕은 죽을 때까지 왕위에 있었기 때문에, 왕위를 완전히 버리고 출가한 것은 아니었다. 아마도 중국 남조 양(梁)의 무제(武帝)가 동태사(同泰寺)를 중창하고 여러 차례 그곳에 출가한 것과 유사한 행위였을 것이다. 법흥왕은 양 무제의 행적을 참고로 하여 신라에서 불교의 흥기를 꾀하였다고 생각된다.

또 529년(법흥왕 16)에 도살 등의 살생을 금지하는 금령(禁令)을 내리기도 했는데, 국가 정책에 불교 교리를 적극적으로 반영한 것으로, 국가 운영의 원리로도 불교를 적극 사용하였음 보여준다. 그 결과 신라에 불교가 빠르게 자리 잡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이 불교 공인은 법흥왕대 정치사에서 율령 반포와 함께 중요한 사실로 취급된다. 법흥왕대 불교 공인 과정에서 왕권이 여타 귀족 세력을 압도하는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법흥왕대 불교 공인 과정은 국왕이 토착신앙을 믿는 기득권층의 불교 진작에 대한 반대를 극복하는 과정인데, 당시 정치권력의 구조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이전까지는 부의 유력자들이 함께 의논하여 국사를 결정하던 방식이 유지되고 있었기에 왕의 의지라 해도 그대로 관철되지 못할 수가 있었다. 법흥왕이 흥륜사를 창건하며 불교를 흥성시키고자 하였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쉽사리 뜻을 이룰 수 없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이차돈의 계책으로 법흥왕은 귀족세력의 반대를 물리치고 뜻을 이룰 수 있었는데, 이때에 법흥왕은 왕명을 거역한 죄를 사형으로써 다스렸다. 여기에는 얼마 전에 반포한 율령이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법흥왕은 율령에 근거하여 이차돈에게 사형을 내렸는데, 이는 동시에 왕의 권위에 도전하는 다른 귀족세력들에 대한 압박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이제 율령 반포를 통해 달라진 왕의 위상을 귀족들에게 각인시켜준 사건이라고 하겠다. 결국 이 불교 공인을 계기로 왕권이 귀족세력들을 압도하는 변화를 가져왔다고 하겠다.

이후 불교는 신라의 국교이면서 동시에 중앙집권적 고대국가로의 발전과 운영을 뒷받침하는 이념으로 기능하였다. 진흥왕대 ‘전륜성왕(轉輪聖王)’ 표방이나 진평왕대(眞平王代) ‘왕즉불(王卽佛)’ 관념의 도입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신라왕들이 왕권의 권위와 정당성을 불교를 통해 확보했던 것이다.

결국 법흥왕은 불교의 공인을 통해 왕권 강화와 함께 중앙집권적인 체제를 갖추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5 중앙집권적 고대국가로

법흥왕은 율령 반포와 불교 공인을 통해 왕권 강화의 기틀을 마련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국가체제를 정비해 갔다. 강해진 왕권 중심의 새로운 정치구조를 뒷받침하는 통치조직을 설치하기 시작한 것이다. 먼저 중앙 정치 제도를 마련해 나갔다. 516년(법흥왕 3)에 군사 업무를 담당하는 관직인 병부령(兵部令)을 만들고, 이듬해에 신라 최초의 관부 병부(兵部)를 설치했다. 531년(법흥왕 18)에는 처음으로 상대등(上大等)이라는 최고 직위를 만들어 철부(哲夫)를 임명하였다. 그 임무는 국사(國事)를 총괄하는 것으로, 병부령이 군사 업무를 총괄했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군사 업무 이외의 국정을 총괄하는 재상(宰相)과 같은 존재이다.

지방제도 역시 정비되어 갔다. 법흥왕대 율령 반포와 함께 새롭게 편입된 지역의 수장들을 회유하고 포섭하여 신라에 흡수 통합하기 위해 외위(外位) 관등을 만들어 수여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도사(道使)와 군주(軍主) 등의 지방관을 다수 파견하여 여러 지역을 직접 통치하는 방식을 일반화시켜 나갔다.

군사제도의 정비도 이루어졌다. 신라 군사제도의 정비는 진흥왕대에 대당(大幢)의 설치에서 본격적으로 시작하지만, 그 토대는 이미 법흥왕대에 마련되었다. 우선 군정을 총괄하는 병부의 설치가 그 시작이라 하겠다. 그리고 523년(법흥왕 10)에 무관직으로 감사지(監舍知)가, 이듬해에는 군사당주(軍師幢主)가 설치되었다. 감사지는 6정(停)을 포함한 여러 군단에 설치된 무관직이고 군사당주는 군사당이라는 군단을 지휘하는 군관이다. 병부 설치 이후 군사조직의 확충이 이루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 지방에 주둔했던 것으로 보이는 법당군단(法幢軍團)도 법흥왕대 창설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한편 이러한 중앙집권적 고대국가에 걸맞은 제도의 마련과 정비는 신라 국력을 크게 증진시켰을 것이다. 법흥왕대는 이러한 토대 위에 본격적인 대외확장이 시작된 시기이기도 하다. 법흥왕대에는 남쪽 가야지역으로의 확장이 활발히 전개되었는데, 532년(법흥왕 19)에 전기 가야 연맹의 맹주국이었던 경상남도 김해시 지역에 있던 금관가야(金官加耶)의 항복을 받아내었다. 이때 금관국왕(金官國王)인 김구해(金仇亥)가 왕비 및 세 아들과 함께 귀순하였다. 신라는 낙동강 동쪽 지역을 거의 차지하면서 영역을 크게 넓힌 것뿐만이 아니라, 낙동강과 남해안 교통상의 요충지인 김해를 점령함으로써, 이후 주변으로 진출하는데 매우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주변으로의 확장은 한반도에서 신라의 위상을 크게 높이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제 신라는 고구려, 백제와 한반도의 패권을 놓고 자웅을 겨루는 삼국의 일원으로 부상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신라의 발전을 바탕으로 법흥왕은 ‘건원(建元)’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한다는 공표를 하였다. 이는 신라가 발전한 결과로 나타난 것이기도 하지만, 신라인들 스스로가 자신들의 발전을 자랑스러워 한 결과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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