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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장왕[寶藏王]

강대국 고구려의 마지막 왕

미상 ~ 682년(신문왕 2)

보장왕 대표 이미지

삼국사기 보장왕 기사

한국사데이터베이스(국사편찬위원회)

1 개요

보장왕(寶藏王, ?~668)은 고구려의 제28대이자 마지막 왕으로 재위 기간은 642년~668년이다. 연개소문(淵蓋蘇文)이 정변을 일으켜 영류왕(榮留王)을 시해하고 보장왕(寶藏王)을 세웠다. 따라서 당시 실권은 연개소문이 장악하였고, 그는 별다른 권위와 권력을 가지지 못하였다. 그의 재위 기간 동안 고구려는 당과 신라와 지속적으로 전쟁을 벌였으며, 결국 668년(보장왕 27년) 9월 고구려 멸망과 함께 마지막 왕으로 이름을 남기게 된다. 이후 고구려 부흥을 기도하기도 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고 유배지에서 일생을 마쳤다. 사후 당의 수도 장안(長安)에 묻혔다.

2 가계와 가족관계

고구려 제28대 왕으로 본명은 고보장(高寶藏)이다. 혹 고장(高藏)이라 기록된 것도 있다. 그가 재위 중에 고구려가 망했기 때문에, 시호(諡號)와 같은 별도의 왕명이 있지 않고, 자신의 이름을 그대로 왕명으로 쓴다. 아버지는 제25대 평원왕(平原王, 재위 559년~590년)의 아들 대양왕(大陽王) 혹은 태양왕(太陽王)이다. 제26대 영양왕(嬰陽王, 재위 590년~618년)과 제27대 영류왕(榮留王, 재위 618년~642년)이 그의 백부들이다.

왕비의 이름은 전하지 않으며, 아들로 647년(보장왕 6) 7월 당에 사신으로 간 고임무(高任武), 666년(보장왕 25) 당에 파견되어 태산(泰山) 봉선(封禪) 의식에 참석한 바 있는 태자 고복남(高福男), 고구려 멸망시 태자와 함께 당에 끌려간 것으로 기록된 고덕남(高德男), 699년 당 측천무후(則天武后)에 의해 안동도독(安東都督)에 임명된 고덕무(高德武), 정확한 시기를 알 수는 없지만 당에서 운휘장군 우표도대장군 안동도호(雲麾將軍 右豹韜大將軍 安東都護)에 임명되었던 고련(高連) 등이 있었다. 고구려 부흥운동 당시 왕으로 추대되었다가 후에 신라에 의해 보덕국왕(報德國王)에 책봉된 안승(安勝)도 보장왕의 서자(庶子)라는 기록이 있지만, 그는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淵淨土)의 아들로 보장왕의 외손자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손자로는 686년 조선군왕(朝鮮郡王)에 봉해졌던 고보원(高寶元)과 고련(高連)의 아들로 안사(安史)의 난 후 당을 괴롭히던 북방의 이종족을 격퇴하는데 큰 공을 세움으로써 개부의동삼사 공부상서 금오위대장군 안동도호 담국공(開府儀同三司 工部尙書 金吾衛大將軍 安東都護 郯國公)을 제수 받은 고진(高震)이 있었다.

3 고구려의 마지막 왕

보장왕은 평원왕의 아들이자 영류왕의 동생인 대양왕의 아들로 원래는 왕위계승 가능성이 높지 않았지만, 642년(영류왕 25) 10월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켜 왕을 시해하고는 왕으로 세웠기에 그가 즉위할 수 있었다. 따라서 그는 국정을 주도할 실권이 없는 왕이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고구려는 귀족연립정권을 구성하여 귀족들이 국정 주도권을 장악하였고,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킨 후는 연개소문 독재 정권에 가까운 상태였다. 연개소문 사후에도 연남생(淵男生), 연남산(淵男産) 등 그의 아들들이 권력을 장악하였기에, 보장왕은 고구려 멸망시까지 별다른 힘이 없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즉위하자마자 신라 김춘추(金春秋)가 백제를 공격하기 위해 군사 원조를 요청했으나 거절하고 오히려 그를 억류한 일이 있는데, 이도 보장왕의 판단이 아니라 연개소문의 의도에 따른 것이었다. 또 643년(보장왕 2) 3월 당에 요청하여 도사(道士)를 초빙하는 등 도교의 도입과 진흥을 시도했는데, 이 역시 연개소문의 건의에 의한 것으로 보장왕의 의도로 볼 수 없다. 이때 도교 도입 및 진작책 시행은 당이 도교를 크게 중요시했던 것과 연관시켜 보면, 당의 침략 위협이 있던 고구려에서 외교적 노력을 통해 당과의 관계 개선을 도모했던 측면이 있었다.

하지만 당은 고구려 침략을 단행하였고 이후 고구려 멸망시까지 지속적인 전쟁 상태로 돌입하게 된다. 645년 당 태종이 직접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에 대한 대대적 침공을 단행하였다. 하지만 안시성(安市城) 등에 결사 항전하는 고구려군에 막혀 큰 피해를 보고 퇴각하고 만다. 이후는 대규모 전면전 보다 장기 소모전으로 전략을 변경하고, 신라와 군사동맹을 맺으면서 고구려를 괴롭혔다. 649년 당 태종이 고구려 정복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사망하자 아들 고종(高宗)이 즉위하였는데, 그 역시 부친과 같이 고구려 침략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고구려 멸망시까지 전쟁이 지속된다. 이러한 장기간 당의 침략을 고구려는 잘 막아내었는데, 당시 왕이었던 보장왕도 강대국의 침략을 잘 막아낸 왕이라 볼 수 있다. 다만 당시 대당 항전은 연개소문을 중심으로 귀족들이 주도했다고 보아야 하므로, 보장왕이 대외 항전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고 평가하기는 어렵다.

고구려가 당시 세계 최강국이라 할 수 있던 당의 침략을 오랫동안 잘 막아내기는 했지만, 자신들의 영토에서 오랫동안 전쟁을 겪으면서 점차 국력이 쇠약해졌고, 백제 멸망 이후 주변에 자신들을 도와줄 세력도 없이 고립되어 갔으며, 신라가 당을 도와 고구려 공략에 나서면서, 고구려는 점차 어려움에 처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연개소문 사후 그 아들들인 연남생(淵男生)과 연남산(淵男産) 등이 권력 분쟁을 벌이고, 여기에서 패배한 연남생이 고구려를 배반하고 당에 망명하여 고구려 공격의 선봉에 서게 되면서, 결국 견디지 못하고 668년 9월 멸망하고 만다. 이때 보장왕은 적장 이적(李勣)에게 사로잡혀 아들 복남, 덕남을 비롯한 20만에 이르는 포로와 함께 당의 수도 장안(長安)으로 이송되었고, 그곳에서 당 고종이 자신의 아버지 태종의 영전에 이들 포로를 바쳐 고구려 정벌을 완수했음을 고하는 의식에 동원되어 망국의 설움을 겪게 된다.

4 다시 한 번의 기회를 노렸으나

고구려 멸망 이후 포로로 당에 끌려간 보장왕은 얼마 있지 않아 당 고종으로부터 사면을 받는다. 당시 보장왕이 실권이 없었기에 고구려의 일을 왕이 처리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감안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사평태상백 원외동정(司平太常伯 員外同正)에 임명하였다.

677년 2월 25일에는 당 고종이 보장왕을 개부의동삼사 요동도독(開府儀同三司 遼東都督)에 임명하고 조선왕(朝鮮王)에 봉하여, 고구려 멸망 후 그 땅에 설치한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의 통치를 맡게 하였다. 당시 당은 고구려를 멸망시키는 했지만, 고구려부흥운동과 나당전쟁으로 말미암아 고구려 영토를 완전히 장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고구려 평양에 설치했던 안동도호부를 670년에는 요동의 신성(新城, 지금의 중국 랴오닝성 푸순시)으로 옮겨야 했고, 676년 2월에는 요동성(遼東城, 지금의 중국 랴오닝성 랴오양시)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당에서는 요동 지역을 포함한 고구려 영토의 민심을 수습하고 안정화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러기 위해 보장왕을 고구려 땅으로 보낸 것이다. 물론 이러한 조치는 당시 당이 정복한 지역의 왕이나 수장을 그 지역의 통치 책임자로 임명하는 지배방식을 따른 것이기는 하지만, 고구려의 저항과 나당전쟁을 승리로 이끈 신라의 저력이 가져온 결과라 하겠다.

그리고 이때 보장왕은 마지막 기회를 잡으려 했던 것 같다. 요동으로 돌아온 그는 몰래 고구려 유민을 규합하고 말갈(靺鞨)과 연결하여 고구려의 부흥을 도모한 것이다. 그러나 일을 일으키기 전 이 사실이 발각되어 소환되었다. 보장왕은 681년 공주(卭州, 지금의 중국 쓰촨성 충라이시)로 유배가게 되었고 요동의 고구려 유민들은 다른 지역으로 이주 당했다.

이후 보장왕의 행적은 확인되지 않으며, 682년경 유배지에서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그가 사망하자 당 조정은 그를 위위경(衛尉卿)에 추증하고 시신을 장안으로 운반하여 장사지내게 하였다. 그의 무덤은 돌궐에서 귀의한 힐리가한(頡利可汗)의 묘 왼쪽에 조성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보장왕은 실권이 없이 연개소문이 시키는 대로 움직인 허수아비 왕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그가 요동에서 다시 한 번 고구려 부흥을 위해 노력한 사실을 본다면 그가 아무것도 하지 않은 무능한 왕이라 평가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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